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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19>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③허조[許稠(1369-1439), 시호 文敬公, 배향공신](下)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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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5월13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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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마소요구]

 

명나라가 조선에 말을 보내줄 것을 요청해왔다. 지난 태종 9년 10월(1409)에도 말 만 필을 요구해 보내었고 세종 3년(1421) 9월에도 보냈는데 이제 또 말 1만 여 필을 요구한 것이다(세종 5년 8월 2일).

 

이 문제를 여러 재상과 의논하다가 다른 모든 재상들은 물리치고 이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만 남았다. 허조는 말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는 것을 반대했다. 북방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예측이 어렵기도 하려니와 나라 안은 흉년으로 창고가 비었으므로 형편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적미적 대면서 지연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했다. 세종은 이에 반대했다. 그러자 허조는 이렇게 말했다: “국방에 말만큼 소중한 게 없는데, 지난번과 이번을 합해 2만 마리의 튼튼한 말을 보내면 우리나라 기병이 2만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이 일 때문에 신은 밤에 잠을 못 자고 걱정이 됩니다. 우리 태조 때에는 3, 4천 마리도 준 적이 없었는데 그것은 신이 주청사로 가서 반으로 줄였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5천 필을 보내심이 옳겠으며 꼭 다 보내시려면     내년을 기다려 바치는 것이 옳겠습니다(세종 5년 8월 2일).”

 

병조판서 조말생도 같은 생각이었다. 두 판서가 다 나가자 임금은 여섯 명의

대언과 상의했다. 모두들 이렇게 말했다 : “허조의 말은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내다 본 말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난 번 말을 보낼 때 의주가 피해를 많이 입었으며 게다가 기근에 말먹일 콩이 매우 부족하여 평안도가 입을 폐단이 작지 않습니다. 허나 임금께서 즉위하신지 얼마 되지 않았고 황제의 은총이 매우 깊으시니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세종 5년 8월 2일).”

 

말 2만 여 마리를 두 차례에 나누어 보낸 지 10년 만인 세종 14년 5월에 명 황제는 소 만 마리를 무역하자는 칙서를 보내왔다. 대가를 치르겠다는 것이기는 하지만 세종은 망설였다. 소가 희소하고 농사에 긴요하므로 마땅히 감면을 주청하기는 해야겠는데 그렇게 되면 중국을 실망시킬 수도 있겠고 또 만 마리를 다 보낸다고 국력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아니므로 그 쪽 요구를 들어 줌직도 했다. 이번에는 세종이 먼저 대안을 제시했다.

 

   “장차 반만 보내고 나머지 반은 깨끗이 감면해 주기를 주청함이 

    좋겠는가(1안). 아니면 보내는 반의 값을 안 받는다하고 반만 보내는 

    것이 좋겠는가(2안). (將爲半備進 其餘未備者 奏請蠲免乎 請除其價 

    爲半備進何如 : 세종 14년 5월 28일)”

 

그냥 솔직히 형편이 어려우니 반을 면제해주자(1안)고 할 것이냐 아니면 보내는 반의 값을 안 받는다 하고 반만 보내느냐(2안) 것이다. 판중추원사 이징옥 등은 (2안)이 중국 조정에게 매우 무례하게 들려 물의가 일어날 염려가 있다고 했다. 그러니 보내는 반의 값은 물건으로 쳐서 받고 못 보내는 반은 솔직히 면제해 주기를 주청하자고 했다. 병조판서 최사강은 나머지 반은 번식시켜서 보내자고 했다. 허조는 권조, 정초, 이징옥과 같은 생각이었다. (1안)이 더 낫다는 생각이다: “소는 농가에 매우 소중한 것이고 백성에 절실한 것입니다. 당연히 (반감해 주기를)주청해야 합니다. (중략) 보내는 반은 무역으로 중국물건과 교환하고 나머지는 깨끗이 탕감해주기를 주청하더라도 전혀 혐오하지 않을 것입니다(세종 14년 5월 28일).”

 

그러나 좌의정 맹사성은 태종 4년(1404) 4월의 소 무역요구 이후 이번이 처음 있는 칙사이니 요구하는 수대로 바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임금은 맹사성의 의견을 좇기로 했다. 도승지 안숭선이 곁에서 동의했다. 맹사성의 말을 듣고는 반만 보내야겠다는 처음 생각을 뒤집어 버린 것이다.  


[허조의 인재등용과 검소]

 

허조는 인재등용에 탁월한 사람이었고 특히 국가유공자 자손 및 효자순손(孝子順孫)에 대해 매우 특별한 배려를 하여 다 등용시켰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효자순손이 많겠느냐고 의아해하자 허조는 이렇게 대답했다.; “ 일리에도 미인이 있는데 우리나라 같이 많은 사람들 중에 어찌 사람이 없겠오? 없다고 말 못 합니다. 간혹 가짜가 없지는 않겠지만 효행을 권장하고 격려하는 풍속이 무익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오. 그리고 훗날 그 좋은 풍속이 넘쳐나서 그 간에 진실한 효자가 배출될지 어찌 알 수 있소(세종 21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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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조는 사람 됨됨이를 보는 안목이 매우 높았으므로 세종이 항상 그와 같이 사람의 현명함을 의논하였고 그의 말을 대부분 좇았다. 한 번은 세종이 허조에게 이렇게 물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경은 사적으로 사람을 임용한다고 하오. 

    (人或稱卿任用所私 : 세종 21년 12월 28일)”

 

허조는 전혀 개의치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현자이면 친척인들 피할 이유가 없는 것이며 불초한 사람이라면 신이 어찌 감히 천지조화를 참람하게도 사적인 사람에게 더하겠습니까(세종 21년 12월 28일).”

 

 

허조는 매우 검소한 사람이었다. 스스로 청빈한 생활을 했지만 궁궐의 사치도 용납하기 어려웠다. 근정전의 천정 천화판이 금색과 화려한 색깔로 입힌 다는 것이 사치스럽다는 생각을 늘 해오던 참찬 허조가 임금께 말했다.; “근정전 천화판은 태조께서도 검약하기를 힘쓴 것입니다. 이제 진언(眞言:불교법어)을 삭제함이 옳겠습니다. 사치한 것을 명령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윗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아랫사람들이 반드시 몹시 따라 할 것입니다. 제작규모는 모르겠으나 일을 마친 다음에 간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닌 것 같아 미리 품었던 생각을 말씀드립니다(세종 8년 11월 3일).”

 

세종도 동의하고 예조판서 안숭선으로 하여금 근정전 호화공사를 중단시켰다.

   “그렇다. 금을 붙이고 채색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도 사치이다. 

    (然.貼金着彩 吾亦意爲侈也 : 세종 8년 11월 3일)”

 

허조는 마산 앞바다의 한 섬에 모여 사는 왜국 상인에 대해서도 세금을 물기를 원했으나(세종 11년 3월 20일), 세종은 사소한 인원에 불과하니 그럴 것이 없고 다만 왜인의 숫자와 거래규모는 파악하여 보고하도록 했다. 중국과의 교역에서도 약과 책을 허용할 것이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는데 대부분의 대신들은 이조판서 허조와 함께 둘 다 제한 없이 허용하자고 했다(세종 14년 10월 4일). 황희는 아직 시기상조이니 미루자고 했다. 다만 우의정 권진만은 약재가 부득불 필요하므로 교역을 허용하되 서책만은 미루자고 제안했다. 세종은 권진의 의견을 따랐다.

    

[허조의 죽음과 애국심]

 

지난해 세종 20년 11월에 황희와 함께 사직을 청했음에도 불구하고 허락받지 못한 허조를 세종은 다음해 세종 21년 6월에 오히려 좌의정으로 승진 발령하였다. 그러나 허조의 건강은 위독한 것이 분명했다. 6개월 뒤인 그 해 12월 1일 좌의정 직을 유지하면서 은퇴시키는 치사(致仕)를 내렸다. 세종이 매사냥 구경을 갔다 오던 중 사람을 보내 병문안을 보냈더니 허조가 도승지를 뵙고 싶다하여 급히 김돈을 보냈다. 김돈에게 허조가 한 마지막 말이 이러하다: “신이 평범한 사람으로서 편벽되게 임금 은혜를 입어 높은 재상의 자리까지 이르고 나이가 칠십이 넘었으니 한이 없습니다. 다만 병환으로 누  운지 육십 여일에 다시 나아 임금의 용안을 뵙기 어려울 것 같아 임금께 신의 품은 생각을 전달해 주고자 그대를 불렀오. 우리나라는 북으로 야인이 있고 동으로는 섬 오랑캐가 있어서 만약 동시에 난이 일어난다면 우리나라가 위태롭게 되오. 여러 신하들이 지금 다투어 태평성대라고 말하는데 난이 일어난 뒤에야 누가 위태롭다 아니하겠습니까. 바라옵기는 임금께서는 깊이 염려하시어 변방을 튼튼히 방비하소서(세종 21년 12월 25일).”

 

이 말을 전해들은 세종은 마음속 깊이 감동했다.

 

   “정말 좋은 말이오. 내가 정말 기쁘오.

    (實善言也 予甚嘉之 : 세종 21년 12월 25일)”

 

이 말을 전해들은 지 사흘 뒤 허조는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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