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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12>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IV. 사람 중심의 바른 정치 4. 이런 인재가 필요하다 ②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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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3월25일 20시1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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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넓이보다 깊이이다(정숙관천,精熟貫穿).]

 

어느 경연 도중에 한 경연관이 이렇게 지적했다. 한(漢)나라 선비들은 한 가지 분야를 전문적으로 깊게 학문하기 때문에 대단히 자세하고 상세히 보게 되나 우리나라는 이것저것 잡다하게 공부하기 때문에 연구를 해도 깊이 얻는바가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 부분에 세종이 동감하며 이렇게 지적했다.

 

“이것이 내가 학자들에 대해 근심하는 바이다. <사서오경>과 백가제사를

어찌 하나같이 통달할 수 있겠는가. 요즈음 학자들이 <사서오경>을

두루 읽다보니 밝게 깨닫는 게 없다. 치밀하고 깊이 꿰뚫어 읽기를

해야 하는 곳으로는 경전을 깊이있게 공부하는 것 만한 것이 없다.

(此吾所以爲學者患也 四書五經百家諸史 安得一樣精熟 今學者欲遍習四書 五經 其無所得明矣 必欲精熟貫穿 莫如專經之學 : 세종 15년 2월 2일)”

 

[모름을 부끄러워하지 마라(毋嫌其所不知).]

 

경연에서 있은 일이다. 경연관이 한참 경전을 해석하고 있었는데 임금이 보기에 의심나고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물었더니 아무도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세종의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의심할 만하다. 틀릴 수도 있다. 대저 의심나는 부분을

알고서 열심히 공부하면 결국에는 다 알게 되는 법이다.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 모른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스스로 모르는 것이 없다고 떠드는 자야말로 바로 용류(어리석은 부류)라 일컬음이라.

그대들은 모르는 부분이 있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此言可疑 闕之可也 大抵知其可疑而益究之 則庶有得焉

凡學者自謂不知者 然矣 自謂無所不知者 斯其所謂庸流也

爾等毋嫌其所不知也 : 세종 14년 12월 22일)”

 

대사헌 김효손이 상벌은 임금의 고유한 권한 중 하나이므로 절대로 남용되면 안 된다고 하면서 판울진현사 김익상과 수산포 부만호, 장홍도가 죽인 유구국 난파선 선원들은 왜구가 아니라 무장하지도 않고 표류하던 선량한 사람들이 분명하므로 이들을 죽인 관리들을 엄벌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세종이 듣지 않자 곁에 있던 장령 장수라는 자는 허기져 쓰러져 있는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공이냐고 따졌다. 세종이 대답했다.

 

“공이 의심스러우면 무거운 쪽으로 여기라는 성훈이 있다. 또 옛 고사에

죽은 말을 사가지고 산 말을 산 고사도 있다. 내가 상을 후히 내리는 것 은 뒷 사람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功疑惟重 明有聖訓 且古有買死馬 以致生者 今予之嘉賞者

以激後來也 : 세종 11년 9월 24일)”

 

IV.5 인재육성과 집현전(集賢殿)

 

집현전 설치의 아이디어는 태종 때 이미 나왔었다. 태종 17년(1417년) 1월에 사간원이 5개 조항의 정책건의(治道數條)를 올렸는데 이 중 첫째 건의안이 집현전 설치였다. 인재는 국가의 도구(器用)이니 미리 양성해야 하고 이를 위해 학자와 문사를 선택하여 모아 두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제안은 그동안 묻혀 있었는데 세종이 즉위하자마자 바로 이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일찍이 집현전을 설치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어찌 다시 아뢰지

않는가. 선비 10여인을 뽑아 매일 모여 강론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曾有設集賢殿之議 何不更啓. 其擇取儒士 十餘人 日會講論可也

: 세종 1년 12월 12일)”

 

왕의 독촉에 따라 집현전 설치문제는 급진전을 보게 되어 꼭 석 달 지난 다음 해 세종 2년(1420년) 3월 16일에 최고위 직인 정1품 영전사 두 명(박은과 이원), 그리고 정2품 대제학 두 명(유관과 변계량), 종2품인 제학 두 명(탁신과 이수)을 겸직으로 집현전에 발령함으로써 집현전의 체제가 구축된다. 그 아래 정3품인 부제학과 종3품인 직제학, 그리고 응교, 교리, 수찬,박사 등의 관직으로 여러 명이 임명되었다. 유능하고 나이어린 인재였던 이들의 역할은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주야로 공부하여 임금께 강론하고 때때로 임금에 자문하는 것이 주된 기능이었다. 경서, 즉 사서오경(<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 <대학>, <중용>, <논어>, <맹자>)과 각종 역사서를 탐독하여 규칙적으로 임금께 강론함은 물론 수시로 왕의 자문에 대비하는 역할이었다. 세종은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다. 그렇기 때문에 집현전과 같은 자문기구를 만들어 곁에 두기도 했고 또 정치적으로 뛰어난 치적에 대한 역사적 사료를 모으게 하기도 하였다(<치평요람>). 그리고 형벌을 잘 못 내린 역사적 고사를 모두 모으도록 하여 책으로 발간하여 형벌을 내림에 있어서 다시는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전범으로 삼았다. 세종은 과거 역대제왕의 인재등용 사례를 철저히 연구하였다. 주나라는 덕행과 도예가 깊은 사람을 높이 등용했고 한나라는 청렴하고 효도하는 인재를 과거인재와 함께 등용했다. 세종은 따라서 과거인재와 추천인재를 고루 발탁하여 국정에 등용시켰다.

 

[국비유학생 파견]

 

세종은 인재의 양성을 위하여 젊고 총명한 자를 중국에 보내 유학시키고 싶었다. 장차 크게 쓰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모름지기 나이 적고 총명한 자를 선발하여 전심으로 공부에 연마하도록 하면 나중에 크게 쓸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문장과 행실이 성숙된 것만 좇아 나이어린 사람을 선발하지 않으면 공부에 게을러지고, 또 곧 늙어 못 쓸 것이다. 지체 높은 의관자제와 시골평민을 불문하고 나이 어리고 총명한 소년을 뽑도록 하라. 아마 시골평민자제 중에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하여 거리낌 없이 즐거움으로 참여하려는 자가 더러 있을 것이다.

 

(須擇年少聰敏者入學 然後專心鍊業 爲後日大用 若取文行己熟 以不擇年少 則纔習而環 卽至老衰 不可用矣 勿論衣冠子弟及 鄕貢凡民 擇年少以聰敏 者 蓋鄕貢凡民之子弟 欲爲起家者也 或有不憚之 樂爲之者

: 세종 15년 9월 17일)”

 

이 지시에 대해 신하들의 반대 의견이 많았다. 황희는 재주와 행실을 보지 않으면 언행이 예절에 맞지 않을 것이니 당연히 성숙한 재능을 가진 자(成才者)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나이가 들면 아무래도 가족들 생각에 공부에 전념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나이 많은 자들은 계산이 빨라서 반드시 처자를 생각할 것이다.

비록 입학을 명해도 유유히 세월을 보내어 공부를 안 할 것이다.

 

(年多者己成計活 必思其妻子 雖令入學 悠悠度日 廢業而己 : 세종 15년 9월 17일)”

 

 안숭선은 시골평민의 자제를 보낸다는 것에 불만이었다. 중국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지체 높은 집안의 유능한 고관의 자제를 보내야 된다는 것이다. 세종은 안숭선을 이렇게 살짝 꼬집었다. 

 

“내 생각에도 의관자제를 응당 먼저 뽑아야 하겠지만 어찌 시골 보통

백성의 자제라고 취할만한 인재가 없겠는가. 마땅히 같이 선택하라.

 

(予謂衣冠子弟 固當選擇 然鄕貢凡民之子弟 豈無可取者乎 宜竝擇之

: 세종 15년 9월 17일)”

 

세종은 선발인원을 15세 이상 25세 이하 20명으로 정하고 급제한 생원부터 먼저 선택하게 하였으며 그 유학생이 입고 쓸 물건은 물론 그 자제의 집에도 재정적으로 위로해 주도록 명하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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