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5>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IV. 사람 중심의 바른 정치 1. 마음을 다하여 보살피라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2년02월02일 16시40분
  • 최종수정 2022년02월02일 12시36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4

본문

 

세종의 민유방본(民維邦本) 정치철학, 즉 ‘국가의 근본은 백성’이라는 인간존중의 정치철학은 정치지도자가 흔하게 걸던 말로만 내건 구호가 아니다. 32년 긴 치세기간 동안 시종일관 구휼, 농사, 재판, 인재등용, 국방 등 정치의 모든 분야에서 때로는 짙고도 강렬하게 또 때로는 연하고도 은근하게 면면히 묻어나고 있는 정신이 민유방본(民維邦本), 즉 사람 중심의 정치철학이다. 세종의 민유방본의 철학원칙은 어진 정치(시인발정,施仁發政)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 구체적인 모습이 마음을 다하여 진정으로 구제하라는 진정진제(盡情賑齊)와 올바른 사법재판과 제대로 된 인재등용을 통해서 나타난다고 세종은 보았다.    

 

[마음을 다하여 고루 구휼하라(진정진제,盡情賑齊).] 

 

이어지는 가뭄, 홍수, 사고, 및 화재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백성들에 대해 세종은 형언할 수 없는 애통함을 느꼈고 동시에 무능하고 무책임한 관리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 특히 지방관들에 대한 당부나 질책을 보면 백성들에 대한 세종의 사랑과 연민이 얼마나 절실하며 깊은지를 잘 알 수 있다. 감사나 수령이 지방으로 부임할 때마다 일일이 그들을 불러 백성들이 편히 잘 살 수 있게 하라고 간절히 당부하였다. 흉년이 들어 백성이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이 돌거나 혹은 굶어죽는 일이 발생할 때마다 세종은 스스로를 견책했다. 술과 음식을 끊기도 하고 때로는 몸소 제사를 드리면서 백성이 고통을 받지 않기를 하늘에 빌기도 했다. 


[신중하고 신중한 재판]

 

굶는 백성들에 대한 구휼이 인간존중의 바른 정치형태의 한 모습이었다고 한다면  인간존중의 다른 정치모습은 올바른 재판, 즉 사법의 공정성과 사법정의로 나타났다. 세종은 재판에 있어서의 오판가능성과 이로 인해 백성이 고통 받는 것을 매우 염려하고 애통하게 여겼다. 재판이 잘못되어 백성이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면 하늘로부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재판이나 판결이 있으면 재조사를 명하거나 직접 나서서 조사하고 변론하기도 하였다. 재판의 오류로 인해 억울한 일을 당한 역사적 사건들을 조사하라고 하기도 하였다. 억울한 재판이 없도록 세종이 얼마나 치밀하고 논리적으로 접근하는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인재의 중요성]

 

세종의 인간존중의 정치원칙이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구휼과 억울한 재판을 없애는 형태의 소극적인 의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인본정치로 승화한 것은 바로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한 임금이나 리더는 수도 없이 많다. 아마 거의 모든 왕이나 리더들이 입으로는 인재의 중요성을 알고 또 그렇게 강조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인재의 발굴등용과 인재양성 및 인재평가에 관해 시스템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세종의 탁월함이 드러난다. 현안문제가 생길 때마다 세종은 과거 문제를 직접 출제하는(책문,策問) 등의 방식으로 인재의 선발에 직접 간여했다. 또 참다운 인재를 구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과거의 방법 보다 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였으며 나아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 나갔다. 그런 점에서 인재발굴과 평가와 양성에 관한 한 세종은 나라 안팎의 역대 어느 제왕보다도 더 앞선 시스템을 고안한 사람이다.  

 

IV. 1 마음을 다하여 보살피라(진정진제,盡情賑齊). 

 

세종이 즉위한 1418년을 전후하여 나라에는 가뭄과 홍수와 태풍과 우박의 자연재해의 피해가 극심했다. 태종 때에도 자주 재해가 발생했지만 세종 재위기간 동안 수한풍박(水旱風雹,홍수, 가뭄, 태풍, 우박)의 피해는 자주 왕과 백성을 괴롭혔다. 특히 세종 7년의 가뭄이 심했다.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사람고기를 먹는다는 소리까지 들렸다. 자연재해로 인한 고통은 노인이나 홀아비나 과부나 고아와 같은 사람들에게 더욱 심할 것은 당연했다. 백성의 이런 고통은 하늘이 노한 것 때문이며, 하늘이 노한 것은 그 실상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매우 ‘부덕하고’ 무능한 세종 자신 탓이라 생각했다. 덕이 없어 하늘의 꾸지람을 받아 그런 것이라 생각해서 거처(궁)를 옮길 생각까지 하였다. 가뭄이 진행되는 동안 몇 날을 밤을 새워 기도하며 비를 빌었다. 아무도 몰랐다. 열흘 밤을 새우며 비를 기도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아무도 몰랐다. 비서실장(지신사, 후에는 도승지)도 몰랐다고 했다. 나중에 임금이 쓰러지고 혼수상태에 빠지고 나서야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 일로 임금은 50일 동안 거의 죽다시피 하였다. 임금의 관곽까지 준비했다고 했다. 비를 비는 지극한 임금의 정성으로 건강을 해친 때문에 27세 약관의 세종이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긴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비탄에 잠겨 하늘에 기원하는 일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관리를 독려하고 신하를 전국으로 파견하여 굶는 백성을 구제하도록 하였으며 온갖 머리를 짜내어 좋은 대책을 마련하고자 힘썼다. 사방에 탄식의 소리가 그치고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생생한 삶의 낙(生生之樂)을 펼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세종의 정책목표가 되었다.

 

[굶어 죽는 자가 절대 없도록 하라. (무혹기근 이치운명,毋或飢餓 以致殞命)]

 

세종은 굶거나 고통을 당하는 백성이 발생하는 것에 대해 매우 엄격하게 추궁하고 책임을 물었다. 어떤 남자가 굶어서 거의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도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고 보고하자 세종은 매우 노하여 이렇게 지시하였다.

 

    “활인원에 영을 내려 이러한 자들을 치료하게 하라. 이로 생각해 보면        

     넓고 광활한 지방으로 내려가면 집을 잃고 떠돌다 굶어 죽는 자들이 어찌 없겠는가.

     서울은 물론 지방의 감사와 수령들은 굶어 죽는 자가 없도록 마음을 다하여 구제하라.       (京中漢城府 外方守令監司 用心賑濟 毋或飢餓 以致殞命 : 세종 12년 윤12월 10일)”

 

서울에서 한 사람이 거의 굶어 죽는 것을 본 순간 세종은 아사자가 이것이 다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서울이나 지방에서 죽어가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세종의 뛰어남은 바로 이러한 점에 있다. 눈앞에 펼쳐진 현상을 보면 그 현상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더 큰 현상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갖추었던 것이다.


[최선을 다했다면 이렇게 굶어죽지는 않았을 것이다(人事旣盡 卽饑死亡 不至於如此之甚多也).]

 

세종 25년(1443) 큰 수해로 굶어죽는 자가 많이 생겼다. 피해를 조사하러 보낸 예조좌랑 정식이 돌아와서 사망자가 1752명이라 보고했다. 몇 달 동안 발생한 사망인원으로는 큰 숫자였기 때문에 임금은 매우 놀랐다. 

 

   “그러나 이 숫자는 원호적에 들어있는 보고된 사망자 숫자일 뿐이다.

    보고되지 않은 자를 정식이 30여명 더 찾았다고 하는 걸 보면 

    원적에 없거나 누락된 사망자가 얼마인지는 알 수가 없겠구나. ” 

    (然此以 付元籍之人 而錄於物故狀也 且軾因糾察 草食行二三村落之間   

    搜得死不付狀者 三十餘人  以此推之 其他不付元籍 隱漏不現者 

    不知其幾何 : 세종 25년 11월 19일)”

 

최근 몇 년 작황이 비교적 좋다가 작년에만 작황이 나빠졌는데도 곡식이 모자라 굶어죽는 자가 저렇게 많았다면, 올해 같이 작황이 매우 안 좋은 상황에서는 내년은 더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세종은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하물며 금년에 실농하여 창고가 비었으니 내년의 백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매 내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況今年失農 倉廩虛竭 來年民命 將若之何

     念至於此 尤增驚駭 : 세종 25년 11월 19일)” 

 

세종은 아사자가 이렇게 많은 것이 결국 관리들이 임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여겼다. 감사나 고을 수령들이 제대로만 했어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굶어죽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니 임무를 다하였으면 굶어 죽은 자가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予今思之 人事旣盡 卽饑死亡 不至於如此之甚多也 : 세종 25년 11월 19일)”

 

다음해 세종 26년(1444;갑자년), 충청도에 기근이 매우 심했었다. 비축해 둔 곡식이 바닥이 나고 풀뿌리를 먹는 자와 심지어 굶어 죽는 자들이 속출하자 임금은 충청도 관찰사 김조를 보내면서 이렇게 명령한다.

 

   “감사와 수령이 마음을 써서 백성들의 기근을 조치한다면 어찌 이렇게까지 

    되겠는가. 감사와 수령관들은 이런 내 뜻을 잘 알고 먼저 궁벽한 마을과 외딴 부락부터       길을 나누어 순찰하여 지방관들이 환상과 곡식 분배를 나누어 주는 일에 

     열심인지 태만한지, 백성들의 기근실정이 어떠한지, 

     가뭄으로 버려진 땅이 얼마나 되는지를 상세히 살펴보아 한 사람도 

     기근에 빠지지 않도록 하며 한 치의 땅이라도 파종하지 않고 

     버려두지 않도록 하여 농업을 온전히 수행케 하라. 

     (監司守令用心措置 卽民之饑饉奚至如此耶 監司首領官 其體予意 

      先自窮村僻巷 分道巡行 各官守令等 還上分給勤慢 

      人民飢饑饉之狀 田土陳賑荒多小 曲盡考察 毋使一民饑饉 一田不種 以遂農業 : 

      세종 26년 4월 27일)”

 

[하늘의 뜻이 그러하더라도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노라(天數雖如此 人事不可不盡).]

 

세종 5년(1423)에 강원도와 평안도와 황해도에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자가 많이 발생하자 여러 수령들을 문책했지만 감사나 경력 등 고위직 관리는 문책하지 않았다. 이것이 불공평하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옳다고 여긴 세종은 평안도 감사 성달생과 경력 김간, 강원도 감사 이명덕과 경력 고약해를 파면한 일이 있었다. 굶어 죽은 자가 1-2명이었다고 해서 감사(이명덕)의 목이 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세종 19년에는 경기도에서만 23명, 충청도에서도 25명이 굶어 죽는 일이 발생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은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어쩌면 하늘의 뜻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감사나 수령과 같은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 않은가? 

 

세종은 신하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근일 가뭄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가는데 이것은 국가가 제대로 못해서인가 아니면 국가는 제대로 하는데 각 도 감사가 봉행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인가. 아니면 감사는 제대로 하는데 수령이 마음을 쓰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신하들은 그것이 하늘의 뜻이므로 국가나 자신의 잘못은 아니라고 발뺌하고 싶었을 것이다. 세종은 이 문제를 두고 한참 생각에 빠졌다. 천재지변의 책임이 국가에게 있는가, 신하에게 있는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오랜 생각 끝에 세종은 생각을 정리했다. 

 

    “내 생각에는 (가뭄이) 하늘의 운수가 그런 것이라 하더라도 사람은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최선을 다 했는데도 백성이 굶어 죽는다면 그것은 하늘의 뜻이 

     그런 것이고 만약 사람이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굶어 죽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予意以爲天數雖如此 人事不可不盡 若人事暫無虧欠以人 

      之飢死尙爾 卽是天也 倘人事惑有未盡 卽賞罰不可無也 : 세종 19년 1월 22일)”

 

[세금을 깎아 주지 않으면 무엇으로 혜택을 줄 것이냐 (不蠲租稅 復有何事爲民實惠乎)?]

 

세종 즉위해(1418) 강원도 전역에 걸쳐 매우 큰 가뭄피해가 발생했다. 원주, 홍천, 영월, 양구, 금성, 평강, 춘천, 낭천, 이천, 회양, 횡성 등지에 극심한 흉년이 들어 굶는 사람이 729명이나 발생했다. 왕의 특명을 받아 비밀리에 지방관의 행정을 감시하는 행대감찰로 파견된 김종서는 강원도 백성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세금을 탕감해 주기를 왕께 청하였다. 참찬 의정부사 변계량은 불가하다고 했지만 세종은 반박하며 이렇게 말한다.

 

   “임금이 되어서 장차 사람이 굶어 죽는데도 세금을 걷는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이미 모아 둔 작년 곡식은 다 떨어지고 

    구제곡식을 다 주어도 부족할 것이 두려운데 도리어 굶는 사람에게 

    세금을 거둔다니 말이 되는가. 

    더욱이 감찰을 보내어 백성의 기근을 살펴 봐 놓고서도 

    세금을 탕감해주지 않으면 따로 또 무엇으로 백성을 위한 실질적인 혜택을 줄 것인가?

    (爲人君者 聞民且飢死 尙徵租稅誠所不忍 況今舊穀己盡 開倉賑齊 

     猶恐不及 反責租稅於飢民乎 且遣監察視民饑饉 以不蠲租稅 復有何事爲民實惠乎 : 

     세종 1년 1월 6일)” 

 

변계량과 같은 탁월한 신하가 감세를 반대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 이번에 감세를 해주면 선례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국가재정이 매우 위태로워 질 것이라고 반대했을 법하다. 그러나 세종은 감세를 단행했다. 그 이유로는 세 가지를 지적하였다. 첫째는 사람이 굶어 죽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 상황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 비상상태라는 것이다. 둘째로는 비축된 곡식이 바닥이 나고 있으므로 만약 세금을 걷었다가는 더 큰 재앙이 올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 상황보다도 과세 후 닥칠 상황이 훨씬 위태하리라는 생각이다. 셋째로는 감찰을 보낸 이유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살펴보고 대책을 세우라는 것인데, 상황을 뻔히 보고도 실질적으로 혜택이 되는 조치가 없다면 도대체 감찰을 보낸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신하들의 반대는 이해하지만 세금을 거두어야 할 명분도 실질적 이유도 없다는 판단이었다.

 

[세금을 받지 마라(무수전조,毋收田租).]

 

세종 4년(1422)에 크게 기근이 들자 지체하지 않고 농사에 실패한 전국 각도의 영세농민들의 세금을 감면해 주었다. 

 

   “농사를 실패한 농민의 빌린 곡식이 50짐 이하이면 꾸어준 것을 독촉하지 

    말 것이며 강원도 영서지방은 밭 세금이 50짐 이하면 거두지 말라.

    (失農各道人民 悉五十卜下 毋督所貸 江原道嶺西人民 悉五十卜以下 毋收田租 : 

    세종 4년 11월 30일)”

 

농사를 실패한 전국의 농민들은 국가로부터 빌린 곡식이 50짐 미만인 경우  이를 독촉을 하지 말 것이며 특별히 강원도 영서 농민의 경우에는 세금을 완전히 탕감시켜 준 것이다. 결부법에 따르면 1짐은 대략 1/100결이고 1결은 대략 4500평에서 1만 8천평이라고 한다. 따라서 1짐은 작게는 45평에서 많게는 180평에 이르므로 50짐이라 하면 2250평(약 10 마지기)에서 9천 평 정도(45 마지기)의 밭인 되는 셈이다. 이 정도의 땅을 경작하는 사람은 영세농이라 할 수 있으므로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백성의 부역과 형벌을 줄여라(무사체옥, 毋使滯獄).]

 

가뭄과 같은 자연재난을 당하게 되면 백성들은 ‘먹거리’만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다. 부역의 고통도 심해지며 심지어 재판을 받는 죄수나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의 고통도 커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세금만의 감면이 아니라 복합적인 구휼대책을 지시했다. 여러 가지 부역의 고통을 줄이도록 하고 재판도 신속하게 진행하여 부당하게 옥에 갇혀있지 않도록 명령하였다.  

 

   “가뭄 피해를 줄이는 방책은 백성의 부역을 줄여주고 형벌을 가볍게

    해 주는 것에 있다. 도내의 모든 공적인 수리공사는 일체 금지하고

    백성의 범죄는 즉시 방면하도록 하여 옥에 갇혀 지체함이 없도록 하라.

    (救荒之道 在於寬官民力緩刑禁 道內工事營繕 一皆禁斷 凡民所犯 隨卽決放 毋使滯獄 :

    세종 18년 7월 6일)”

 

[당장이 더 급하다(목전구급 심어후계,目前救急 甚於後計).]

 

세종 18년(1436) 강원도 일대에 심각한 가뭄이 발생하여 곡식이 말라 죽고 수없는 유랑민이 발생하였다. 세종 치세 중 가장 극심한 가뭄으로 기록된 병진년 대가뭄의 해였다. 국가비상 상황을 대비한 의창은 비어 있으면 안 되는데 굶어죽는 자들을 위해 곡식을 대어 줘야할 것인가 말 것인가. 세종은 훗날을 위해 비축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급한 것은 목전의 위급함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옛말에 3년 비축된 양식이 없는 나라는 나라도 아니라고 했지만 내년보다는 올해 위기가 더 급했다.

 

     “눈앞의 가뭄 피해가 미래 계획보다 더 위급하니 무슨 형편에 후일을

      염려할 수 있겠는가.(目前救急 甚於後計 何可慮後年之計 

      : 세종 18년 7월 6일)”

 

세종이라고 왜 긴 안목이 중요한 줄 몰랐겠는가. 미래를 생각하면 국가재정도 튼튼해야 하고 따라서 재정지출을 절약해야함이 마땅한 것을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지금 상황은 미래를 생각할 여유가 없는 상황이라는 판단이다. 수없는 사람이 굶어죽어 가는 마당에, 또 온 고을 사람들이 수 백 년 살아오던 고향을 등지고 떠도는 마당에 미래를 생각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근민관리를 신중히 뽑아라(신선근민지관,愼選近民之官).]

 

자연재해로 인한 백성의 고통은 하늘의 노함 때문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임금은 국정을 수행함에 있어서 매우 조심하고 또 조심했으며 특히 백성들과 가까이 마주치는 지방관들을 임명할 때에는 엄정한 규칙에 따라 한 치의 착오 없이 선발하도록 노력했다.

 

   “백성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관리는 신중하게 뽑았고, 관리의 승진과 

    퇴출에도 엄격한 규칙을 따랐으며, 혹 빠뜨리는 부분이 있을지를 항상 

    염려하였다.(愼選近民之官 申嚴黜陟之典 尙慮聞見有所不逮 : 세종 5년 7월 3일)”

 

[직접 시찰하라(친행고찰,親行考察).]

 

세종은 그렇게 뽑은 신하가 백성들에 대한 연민을 자기와 같이 잘 체득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고을 행정을 맡고 지방관들은 더더욱 임금의 그윽한 뜻을 투철하게 깨달아 주기를 바랐다. 밤낮없이 부지런히 구석구석 재해의 현장을 직접 살펴보고, 진정한 마음으로 피해를 입은 이들을 구제하여 한 명의 백성도 굶어 죽지 않거나 집을 버리고 떠도는 이가 없도록 해 주기를 진정으로 원했다.

 

   “감사나 수령과 백성과 가까이 있는 관리는 나의 지극한 뜻을 

    투철하게 깨닫고 밤늦도록 게으름 없이 감독하여 경내의 한 사람도 굶주려 죽거나 처소를 잃어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할 것이며 시골 구석  구석까지 두루 직접 시찰하여 진정으로 구제하라.    

    (監司 守令 近民之官 體予至意 夙夜匪懈 一以境內人民 不至於飢餓 

    失所爲慮 至於荒僻村落 親行考察 盡情賑齊 : 세종 1년 2월 12일)” 

 

지방관들은 먼저 임금의 지극한 뜻을 철저하게 체득해야 한다. 쉬지 않고 구석구석 재해의 현장을 몸소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구제하여 한 명도 굶어 죽거나 떠돌지 않도록 하라는 말이다. 조정에서는 감시관을 파견하여 구제조치를 심사할 것이며 만약 한 사람이라도 굶어 죽는 자가 있으면 그 지역 감사와 수령 모두 왕명을 거역한 죄로 다스릴 것이었다. 

 

[미리 대비하여 후회 없이 하라(급기저비 사무후회,及期儲備 使無後悔).] 

 

만약 관리들이 정신을 차려 작년보다 몇 배 이상 노력하지 않으면 앞으로 사망자는 훨씬 커질 것이 확실했다. 임금은 함길도 도관찰사 정갑손에게 신신 당부한다.

 

    “경이 중앙에 오래있어 관청서무에는 실수가 없지만 지방 직책은 

     해 보지 못해 외방민사가 서투르다보니 금년의 변은 미리 대비해 

     두는 일이 부족해서 발생한 것이 아닌가. 구황할 물건 중에 가을에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은 이미 늦었어도 해물 같은 것은 준비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경은 그 모든 것과 비축할 시간을 파악하여 

     후회가 없도록 하라. (卿於京職庶務 諳鍊詳明 小有差失 至於外方民事

     卿所未曾經歷 今年之事 無乃布置疎虞之致然歟 救荒物件內 秋節可備之物 

     己不及矣 若魚藿等海物 有可及備 卿其知悉 及期儲備 使無後悔

     : 세종 25년 11월 19일)”

 

[불시에 엄격히 감독하라(출기불의 엄가규찰, 出其不意 嚴加糾察).]

 

중앙에서 감시감독관을 자주 파견하여 지방 관리를 감찰하자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관리들은 미리 사방에 사람을 풀어 굶어 죽은 사람을 숨기거나 혹은 거짓으로 입을 맞추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니 고을 백성들이 굶어죽거나 중앙에서 감독관이 내려오더라도 걱정할 것이 없어졌다. 의정부는 이런 작태를 지적하면서 경차관을 몰래 불시에 파견하기로 했다. 세종은 각 지방 수령들이 자기의 잘못을 면하려고 속임수 쓰는 것을 간파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이렇게 지시하였다.

 

      “각관 수령은 작년에 있었던 거짓보고로 작성한 환상을 몰래 보충하려고 

       금년 진제 지급 때에 몰래 깎으려 할지 모른다. 백성이 받은 수량을 

       상세히 물어서 대조하여 조사하라.

       (各官守令 往年還上 虛數載錄 謀慾充數 今賑濟題給時 不無刻減之弊 

        人民所受之數 細問閱實  : 세종 27년 2월 3일)”

 

그리고 제대로 구휼하지 못한 관리는 3품 이상의 경우에는 중앙에 보고를 올려서 재판하고 4품 이하 관리는 공신여부에 상관없이 장 1백대에 처하며 승진고과에 반영토록 하였다.  

  

     “진휼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감독이나 조사하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는 자는 

      범행의 경중에 따라 죄를 따질 것이며 수령은 문초하여 상부에 보고한 뒤 

      죄를 물을 것이다. (凡賑恤事 監考色掌不用心者 

      隨其所犯輕重論決 守令則 推古啓聞科罪 : 세종 27년 2월 3일)”   

 

흉년을 구제하는 데 특별히 크게 기여한 공이 있는 자는 승진시켰다.

 

     “흉년을 구제하는 데에 특이하게 효과 있는 공을 세운 자는 

      승진시키라.(其救荒特異 有盛效者 加資 : 세종 19년 1월 13일)”

 

[편리한 대로 먼저 시행하라(편의시행후계문,便宜施行後啓聞).]   

     

중앙에서 내려 보내는 지시나 조치가 완벽할 수는 없다. 그리고 현장 상황이라는 것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따라서 임금은 지방관이 상황에 따라 신속하게 대처하도록 미흡한 부분에 대해서는 편리한대로 시행하고 보고는 나중에 하도록 지시했다. 

 

    “구황이 절박한 데 내려진 조목이 미진하면 

     편리한대로 시행한 뒤 계를 올려 보고하라. 

     (救荒切迫 未盡條件卽許令 便宜施行後啓聞 : 세종 19년 1월 13일)”


[희망을 주는 요긴한 말을 하라(민심희열 절요지언,民心喜悅 切要之言).]

    

백성의 고통을 뼈저리게 공감했던 세종과는 달리 대부분의 신하들은 그 아픔을 절절히 느끼지 못했다. 백성의 고통을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관리들 입에서 절박하지 않는 엉뚱한 대책이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가뭄피해가 한 창인데 ‘배타는 일이 너무 고될 것이므로 선원들의 직급을 높여주어 위로를 하여야 한다.’는 황당한 정책대안을 내 놓는 것이 관리들의 실정이었다. 그래도 세종은 이들 면전에서 핀잔을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신하인들 왜 가뭄 걱정이 없겠냐고 타이르며 말했다. 

   

      “내일 궐에 들어오거든 그 때에는 각자 백성이 즐거워할 긴요한 

       말들을 아뢰도록 해라.

       (卿等明日詣闕 各以民心喜悅切要之言陳之 : 세종 7년 6월 16일)” 

 

ff5e038a2edb99f6d05f3e51fc73105c_1641956
ff5e038a2edb99f6d05f3e51fc73105c_1641956
ff5e038a2edb99f6d05f3e51fc73105c_1641956
ff5e038a2edb99f6d05f3e51fc73105c_1641956
<ifsPOST>

4
  • 기사입력 2022년02월02일 16시40분
  • 최종수정 2022년02월02일 12시36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