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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22 : 사마염의 서진(西晉) <H>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2년01월14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1년12월07일 16시36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5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30> 유의의 인사제도 중정 폐단지적(AD284)

 

위나라 문제 조비가 즉위하는 해 AD220년 진군이라는 사람이 중정中正이라는 제도를 도입해서 인사선발의 기본으로 삼았다. 즉, 각 봉국과 군에서 중정이라는 부서를 설치하여 그곳에 필요한 사람을 현지에서 채용하는 제도다. 물론 덕이 있고 재주가 있는 사람을 뽑는 것이다. 등급은 아홉 등급으로 매기고 언행이 좋으면 승진시키고 결점이 있으면 강등시켰고 조정에 결원이 생기면 필요한 사람을 지방에서 충원하기도 했다. 이 제도가 60여년 정도 시행되면서 여러 폐단이 발생하자 유의가 그것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 중정이라는 제도를 도입하여

     선비들의 등급을 언행 중심으로 평가하여 

     마음대로 품급을 올리거나 내리다보니 

     선비들의 영광이나 욕됨이 중정의 손에 달려있게 되면서

     위로는 천자의 인사권을 침해하는 것이고

     아래로는 다른 사람의 숨은 행실을 색출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만 가지 이익만 구하는 세태가 고착되고

     염치나 양보하는 기풍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대체로 보면 중정이 설치되어 도에 해를 끼치는 것이 여덟 가지입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강한 사람인가 약한 사람인가 만을 보며

     옳고 그름이 아니라 뜨는 사람인가 가라앉는 사람인가 만을 보고 있습니다.  

     상품은 모두 부자들이고 

     하품은 모두 권세가 없는 자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중정의 책임자인 주도州都의 책임은 무거운데 

    맡은 사람은 가벼우니 경박하고 어긋나는 향리가 주류가 되고

    대신들 사이에서도 중정의 결정에 대해 갑론을박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두 번째입니다.

    원래 중정을 설치한 목적은

    재주와 청렴도와 경륜의 순서를 구분하자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 번 째입니다.

    상은 선한 사람에게 주고 

    벌은 악한 사람에게 주는 것인데

    중정은 상벌을 내린 적도 없고

    중정의 결정에 대해서는 소송을 걸지도 못하게 되어있으니

    제멋대로 인사를 주무르면서 억울하고 편파적인 일을 하여도

    견제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네 번째입니다.

    봉국마다 약 천 여명의 선비가 있는데

    중정이 이들을 모두 제대로 알 수도 없고     

    또 이사 간 사람이나 행방이 불명확한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대부분 흘러 다니는 말로 평가를 하게 되니

    부정확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입니다.

    공로가 없는데도 고위직에 있거나

    공로가 많은 데도 낮은 직에 있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공과 실제가 억눌리고

    헛된 명성과 가짜 평판이 대세로 형성되니

    업적을 꼼꼼히 살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섯 번째입니다.

    재능이나 업적이 아니라    

    정확하지 않은 품급만 보고 사람을 쓰게 되니

    품급의 본래 기능이 아니라

    헛된 가짜 품급이 세상을 지배하게 됩니다.

    이것이 일곱 번째입니다.

    하품에서도 허물을 드러내지 못하고

    상품에서도 공적을 보지도 못하니

    애증관계가 쌓이면서 제도가 흐트러지고

    실력과 덕행을 쌓으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이것이 여덟 번째입니다.

    

    이것은 중정이 아니라 간부姦府입니다. 이것보다 더 국가에 해를 끼치는 것은 없습니다.

    위나라 악습을 버리고 새로운 토단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토단법이란 출생지 중심이 아닌 거주지 중심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제도다. 토단법에 대한 찬성론이 부각되었지만 사마염은 중정법을 바꾸지 않았다. 상서좌복야 유의는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곧바로 죽었다. 그 자리에는 오나라 정벌에서 큰 공을 세운 왕혼이 앉았다.

 

왕혼의 아들 왕제는 시중으로 임명되었는데 아버지 왕혼의 일처리가 잘못된 것을 법대로 밝혀서 아버지를 구속하는 일이 벌어졌다. 왕제의 사촌 형 왕우가 왕제를 비난하였고 사마염은 왕제가 각박한 사람이라고 하여 관직에서 내쫓았다.

 

<31> 간신 순욱의 죽음과 사마염 중병(AD289)

 

상서령 순욱이 AD289년 1월 사망했다. 그는 황제의 속마음을 잘 읽어서 그것으로 총애를 차지할 수가 있었다. 오랫동안 중서성에 있으면서 황제와 긴밀하게 기밀을 다루었다. 상서령으로 승진하자 많은 사람들이 영전을 축하했지만 순욱은 기쁘지 않았다. 

 

   “ 봉황이 노는 연못을 뺏겼는데 

     어찌 경하한다는 말을 하시오? “

 

이 해 56세 사마염이 큰 병을 얻어 눕게 되었다. 정치권력은 사마염의 두번째 부인 양지의 아버지 거기장군 양준이 잡게 되었다. 양준의 주도하에 사마염의 여러 종실 세력가들을 봉국으로 내쫓았다.  

 

  • 여남왕 사마량 : 도독예주제군사(허창)

  • 남양왕 사마간 : 도독관중제군사  

  • 시평왕 사마위 : 도독형주제군사

  • 목양왕 사마윤 : 도독양강제군사

  • 장사왕 사마예 : 

  • 오왕   사마안 : 

  • 예장왕 사마치 : 

  • 대왕  사마연  : 

  • 광릉왕 사마휼 : 태자 사마충의 아들

 

태자 사마충의 아들 사마휼은 사마염이 준 재인 사구가 낳았는데 아버지와는 달리 매우 똑똑하고 총명하였다. 다섯 살이던 해에 불이 났는데 불이 황제에게 닿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할아버지 황제를 끌어당겨 피하도록 하였다. 사마염은 비록 사마충이 좀 모자라기는 해도 손자가 자리를 잘 이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대를 가졌다.

 

 

<32> 유송이 정치의 근본에 대한 상소문을 올리다(AD289)

 

회남국의 재상 유송이 회남왕에게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상소문을 올렸다. 

 

   “ 폐하께서 내린 여러 금법과 자의적인 조치들이 오래 쌓이고 누적되어서

     하루아침에 곧게 시행할 수는 없지만

     세상을 고치고 폐단을 바로잡는 것은 

     배가 방향을 틀 듯이 점진적으로 정숙하게 시행해야 합니다.

     지난 30년간의 업적은

     과거보다 무성하지 못합니다.

     폐하의 성스러움을 가지고 시대의 폐단을 고쳐서

     창업시기의 융성함을 완성하지 않고 다음세대에게 전해준다면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생각하기에 똑똑하고 친한 사람에게 봉건을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리고 역사에 통달한 사람과 더불어 깊이 계획을 짜십시오  

     성스러운 임금의 교화는 자신이 중요한 것만 잡고

     아랫사람들에게 이를 위임하는 것입니다.

     이는 수고로움을 피하고 편안함을 좇는 것이 아니라

     본래 정치의 본질이 그래서입니다.

     일을 시작할 때에는 성패를 살피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매우 쉽습니다.

     폐하께서는 처음에는 매우 깊이 살피시지만

     맨 마지막은 생각하시는 것이 소략합니다.

     이것이 정치적 성과가 아직 훌륭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움직일 때마다 모두 완벽하게 계획을 가지고 시행하시니

     잘못되어도 아래 사람에게 죄를 물을 수고 없고

     해가 다가도록 사업의 공이 없어도

     책임지울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조그만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만

     그것을 가지고 얽어매면 조정에 아무도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커다란 줄거리는 흔들지 못하고

     작은 허물만 파고드는 형국이 되면서

     겉으로는 법을 지키는 것 같지만 

     사실상 속으로는 법을 구부리는 것입니다.

     성스러운 왕은 번쇄한 안건을 좋아하지 않아서

     번쇄한 안건이나 탄핵을 올리는 사람에게

     책임을 엄하게 물리시면

     정치를 해치는 간사한 무리들이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입니다.“

 

 

<33> 사마염의 죽음(AD290) 

 

AD290년 봄에 사마염이 위독했다. 아직 고명을 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여러 훈구들은 이미 사망했고 오직 거기장군 양준 만 사마염 병상을 지키고 있었다. 양준은 이미 여러 종실을 봉국으로 내보낸 데다 조정 곳곳에 자신의 심복을 심어두었다. 사마염의 병세가 조금 회복되었는데 못 보던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것을 보고 양준에게 마음대로 인사를 했다고 추궁하기도 했다. 그리고 삼촌 사마량을 불러서 양준과 함께 정치를 하라는 조서를 몰래 내려 보냈는데 양준은 첩자를 통해 중서성의 그 조서를 훔쳐 가져갔다. 중서감이 조서를 뺏으려 했지만 양준은 내놓지 않았다. 그 사이에 사마염이 다시 혼미해졌고 황후 양지가 들어가서 아버지 양준이 모든 정치를 보정하게 하자고 졸라서 사마염의 승낙을 얻어냈다. 양황후가 중서령 하소와 중서감 화익을 불러서 구두로 황제의 뜻을 받아 적도록 하였다. 받아 적은 황제의 구두 유언에 따르면 양준은 태위, 태자태부, 및 도독중외제군사, 시중 녹상서사로 모든 정치 및 군사권을 가지게 되었다. 조서가 완성되자 양황후가 그것을 황제에게 올리라고 하였고 황제는 그것을 보고 아무 말이 없었다. 간간히 정신을 회복한 사마염은 사마량이 들어왔는지를 물었지만 양준은 사마량에게 서둘러 임지인 여남(허창)으로 가라고 재촉했다. 그 해 3월 20일 사마염은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치통감은 사마량이 흉금이 넓고 두터웠으며 밝고 통달했고 회의하기를 좋아했고 직언을 발 받아들여 다른 사람에게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었다고 칭찬했다. 

 

 

<34> 양준의 실권 장악과 사마량을 놓침(AD290)

 

사마염이 죽고 장자 사마충이 황제가 되었다. 서진 혜제다. 양준의 딸 양지는 황태후가 되었고 가남풍이 황후가 되었다. 정치 실권은 양준에게 있었다. 양준의 한 측근이 사마량이 군사반란을 모의하고 있다고 참소했다. 양준은 딸 양지에게 부탁하여 사마량을 토벌하는 허락을 받아냈다. 양준의 명을 받은 양준의 생질 장손은 즉각 병사를 움직였으나 석감은 사마량이 반란을 일으킬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군사를 발동하지 않았다. 양준이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들은 사마량은 그 대책을 부하 하욱에게 물었다. 하욱은 조야의 모든 신임이 사마량에게 있으니 당연히 맞서서 공격을 하는 것이 좋다고 권했다. 그러나 사마량은 군사를 발동하지 않고 서둘러 허창으로 도망갔다. 

 

사실 실권을 잡게 된 양준으로서는 사마량을 낙양에 가두어 두는 것이 더 유리했다. 사마량을 견제할 수도 있고 동시에 필요하다면 자기편으로 삼아서 새 황제 사마충 측근 세력을 통제하는 것이 더 나았다. 그랬기 때문에 양준의 동생 양제와 생질 이번이 사마량을 억류해 두기를 간청했었다. 그러나 양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번 공격에도 사마량을 놓치는 결과를 만든 것은 사마량에게 허창으로 빨리 돌아가라는 재촉 때문이었다.   

 

우연하게 실권을 잡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한 양준은 모든 관원에게 봉작을 올려줌으로써 환심을 사려고 했다. 모든 신하의 등급을 한 등급 올려주고 2천석 이상의 관직은 관내후 작위를 내려 주었다. 그리고 백성들의 조세도 1년간 면제해 주었다.   

 

양준은 가황후의 성격이 사납고 권모술수가 능한 것을 경계하여 자기 측근들을 여러 요직에 심었다. 생질 단광은 산기상시로 황제의 기밀을 관장하게 했고 생질 장소는 중호군으로 삼아서 금군을 통제하게 했다. 황제의 조서는 반드시 태후에게 보고한 뒤 시행하도록 했다. 

 

양준의 정사처리는 자잘한 것에 매달렸고 엄격하면서도 종잡을 수 없이 갈팡질팡했다. 당연히 조정 안팎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풍기태수 손초가 양준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 공께서는 종실을 만기에 참여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시기와 거리낌을 품게 되고 

     밖으로는 사사로운 파당을 만들고 계십니다. 

     화가 이를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양준이 흉노지역에 살고 있는 왕창을 초빙하였는데 왕창은 벼슬을 받지 않고 숨어버렸다. 친구 장선자가 왜 숨었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 옛부터 한 집안에 두 황후를 내고도 실패하지 않은 적이 없소.

     하물며 양태부는 소인배를 가까이하고 군자를 멀리하며

     권력을 농단하고 있으니

     실패하는 날이 정말로 며칠 남지 않았소.

     바다건너 요새를 빠져나와 피하는 데도

     화가 미칠까 걱정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의 벽소에 내가 응하겠소?

     또한 무제는 사직보전의 큰 계획을 세워놓지 못했고

     태자 또한 큰 짐을 질 수 없는 상황이며

     유명을 받은 이 조차 적당한 사람이 안 되니

     천하의 혼란은 서서 기다릴 지경이오.“

  

   

<35> 가황후 무리의 양준 축출(AD291)

 

황제 사마충의 부인은 가황후로써 대장군 가충의 딸이다. 그러나 가황후는 너무 난폭했고 질투가 심했다. 사마충의 시첩이 아이를 배자 창으로 배를 찔러 낙태시키기까지 한 사람이다. 시아버지 사마염은 한 때 태자비 가남풍의 폐위까지 고려했던 인물이었다. 순욱과 풍담 등 가충의 무리들이 강력하게 옹호해 준 덕분에 살아남았다. 사마염의 부인 양황후도 가비를 지원해 주었다. 그렇지만 가비는 양황후에게 고마움을 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질투하면서 앙심까지 지니고 있었다. 가비의 정치 참여를 막은 양황후의 아버지 양준에 대한 반감 때문일 것이다. 

 

가황후는 심복 환관 동맹과 결탁하여 양준을 제거하기로 모의하였다. 양준의 인사에 불만을 가진 맹관과 이조도 모의에 동참했다. 가황후와 환관 동맹은 형주도독이자 황제의 이복동생인 사마위의 도움을 얻어냈다. 또 이조를 사마량이 있는 허창으로 보내 군사동원을 요청했으나 사마량은 거절했다. 

 

사마위가 이복형제 양주도독 사마윤(황제 사마충의 이복동생)와 함께 황제알현을 요청했고(AD291년 2월 20일) 사마위와 사마윤이 입조하는 것을 계기로 안팎에 계엄조치를 내려 양준을 무고죄로 얽어매고 가택 연금시켜 버린 뒤 사마요와 400군사를 보내 양준의 일족은 물론 장소, 이빈, 단광 무무 등 수 천 명의 양준 무리를 족멸시켰다. 양준이 차지하던 국정 최고자리 태재는 사마황실의 최고 연장자인 사마염의 삼촌인 사마량이 낚아챘다. 양준 축출 쿠테타의 겉에는 사마량과 사마위가 있었지만 그 깊은 배후는 가황후와 동맹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조종한 것이다. (AD291년 3월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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