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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6-2: 전한(前漢) 원제 유석(BC75-BC49-BC33) <C>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11월19일 16시3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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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둘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13> 황제가 옥사를 직접 결재하다(BC67) 

 

그해 2월 황제는 조서를 내렸다.

 

     “ 간혹 관리들이 법을 적용하면서 교묘하게 왜곡하고 

       심히 깊이 파고들었는데

       이는 짐이 부덕한 때문이다.

       대개 재판이 올바르지 못하면 죄 있는 자들이

       날뛰는 법이고 죄도 없이 도륙을 당하게 되어

       부자가 비통함에 빠지게 되니 심히 마음이 아프다.

       지금 옥리를 보내 지방의 옥사를 심리하도록 했으나

       직책은 낮고 봉급이 박하므로

       정위평이라는 자리를 두고 봉급을 연 6백석으로 하며

       각 네 명을 두도록 하라.

       그리하여 직무를 골고루 나누어 하게 하라.

       이것이 나의 뜻을 실행하게 하라.“                    

 

이로부터 매 가을 죄를 논할 때가 되면 황제는 항상 선실로 나아가 재계를 하고 옥사를 다루었으므로 형벌을 내리는 것이 공평하다는 평을 들었다.

   

 

<14> 탁군태수 정창郑昌의 상소(BC67)

 

선제가 몸소 옥사에 참여하여 직접 재결하는 것에 대해 상소가 올라왔다. 탁군태수 정창이 이렇게 말했다. 

 

        “ 지금 밝으신 황제께서 몸소 내려오셔서 옥사를 들으시니

          비록 정평을 두지 않는다하더라도

          감옥은 저절로 바르게 될 것입니다만

          만약 다음 사람이 이것을 계승한다 하더라도

          법령을 정해두는 것 만 못합니다.

          법령이 정해지면 어리석은 자라도 피할 곳을 알게 되며

          간사한 관리들도 농간을 부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 근본이 바르지 못한데도 정위평을 두는 것은 

          이치의 말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정치가 쇠하고 듣는 것이 태만하면

          정평이 장차 권력을 이용하여 

          난을 일으키는 수괴가 될 것입니다. “

 

 

<15> 곽씨들의 반란 음모(BC66) 

 

여름인 5월에 산양과 제음지역에 우박이 내려 계란만한 어름덩이가 떨어졌다. 땅이 2척 5촌이나 패였고 20여 명이 죽고 날아가던 새들도 모두 죽었다. 황제는 두려운 마음에 조서를 내렸다.

 

     “ 지금부터 부모를 은닉하는 아들이나,

       처를 숨겨주는 지아비나,

       조부모를 숨겨주는 손자는 죄로 다스리지 말라.“

 

곽광의 부인 현과 곽우와 곽산과 곽운 등 곽씨 세력들은 하루하루 권력이 쇠퇴하는 것을 보면서 서로 눈물을 흘리거나 스스로를 원망했다. 곽산이 말했다.

 

     “ 지금 승상이 정치를 도맡아하는데 황제의 신임이 두텁소.

       대장군 때의 법과 규정을 죄다 바꾸고 뒤집고 

       대장군의 과실과 허물을 낱낱이 캐내고 있습니다.  

       또 유생들이 대다수 누추한 집안 출신들인데         

       멀리서 온 사람들은 춥고 배고픈데다 

       망측하고 괴상한 말들을 거리낌없이 즐거워하면서

       대장군을 원수처럼 취급하고 있습니다.

       지금 황제는 유생들과 함께 담소하는 것을 즐기고 있으며   

       사람들마다 글로써 보고를 올리고 있는데 다수가 

       우리 집 예기를 하고 있습니다.

       전에도 우리 집안사람들이 교만하고 사치한다는 상서를 올린 적이 있는데         

       그 말투가 절절하고 비참하여 저 곽산이 같이 상주를 못할 지경입니다.

       그 후 상서한 사람이 더욱 교활해져서 봉함하여 상주를 올리면

       곧바로 중서령으로 하여금 나가서 가져가도록 하여 

      상서는 관계도 못하고 있으니

      더욱 사람을 믿지 않게 됩니다.

      또 들으니 곽씨가 허황후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이것이 정녕 사실이란 말입니까? “       

 

곽광의 처 현은 두렵고 급한 마음에 곽우와 곽산과 곽운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곽우 등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 그렇다면 어찌 미리 저희 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현관이 저희를 흩어놓고 여러 사위들을 배척했던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었군요.

        그건 매우 큰일입니다. 주살당하는 벌이 작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일로부터 음흉한 계획을 꾸미게 된다. 

 

곽운의 장인 이경과 친한 장사라는 사람이 곽운의 집안사람들이 초췌한 모습을 보고서 이경에게 말했다.

 

      “ 지금 승상(위상)이 평은후(허광한)와 함께 정치를 주도하는데

        태부인으로 하여금 태후에게 말하도록 하여

        먼저 이 두 사람을 주살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폐하를 옮기고 말고는 태후에게 달려있습니다.“   

 

장안사람 장장이란 자가 그 음모를 고발하여 사건이 정위와 집금오에게로 넘어갔다. 장사는 체포되었으나 나중에 조서가 내려와 체포를 금지시켰다. 곽산 등은 더욱 두려워져 서로 말하였다.

  

      “ 이것은 황제가 태후를 중히 여겨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싫어하는 단서가 이미 드러났으니

        오래되면 드러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족멸될 것이 분명합니다.

        먼저 손을 쓰는 것만 못합니다.“

 

마침내 여러 딸들에게 돌아가 남편에게 그 결정을 말하게 하였다. 모두들 말했다.

 

      “ 어디에 서로 피할 곳이 있겠는가? ” 

  

마침 이경이 제후왕들과 교류한 것이 들통났고 곽씨들도 연루되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렸다.

 

      “ 곽운과 곽산은 숙위하는 것이 옳지 못하니 면직하고 집으로 돌아가라.”

 

곽우와 곽산의 가족에게 요괴한 일들이 일어나서 온 가족이 걱정에 싸였다. 곽산이 말했다.

 

    “ 승상이 마음대로 종묘의 제물을 줄였습니다.

      이 죄를 적용하여 승상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거사 계획은 이랬다. 먼저 태후가 박평군을 위한 잔치를 연 다음 승상과 평은후를 부르고 범명우와 등광한이 태후의 조서를 빌미로 끌고나가 참수함과 동시에 황제를 폐하고 곽광의 아들 곽우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계획을 세우고 아직 실행에 옮기지 않는 동안 곽운이 현도태수로 나가고 태중대부 임선은 대군태수로 임명되었다. 마침내 쿠테타 계획이 발각되자 곽운, 곽산 및 엄명우는 자살하고 현과 곽우와 등광한은 체포되었다. 곽우는 요참되었고 현과여러 여자 형제들은 기시되었다. 곽씨 가문과 연결되어 주멸된 자가 수 십 가문이 되었다. 태복 두연년은 곽씨와 친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면직되었다. 황후 곽씨는 폐위되어 명대궁에 유폐되었다. 곽씨 음모를 고발한 장장과 그 동문 동충, 양휘, 시중 김안상 사고 등은 열후로 책봉되었다. 양휘는 승상 양창의 아들이고 김안상은 거기장군 김일제의 조카며 사고는 사량제의 조카이다. 

 

 

<16> 선제가 아들 없는 왕첩여를 황후로 뽑다.(BC64)

 

황제는 황후를 세우고 싶었다. 당시 관도공주의 어미인 화첩여와 회양헌왕의 어미인 장첩여 그리고 초효왕의 어미 위첩여를 특별히 총애했다. 황제는 장첩여를 세우고 싶었는데 오래 지나 곽씨가 황태자를 해치려 했던 것을 경계삼아서 후궁 중에서 아들이 없고 근신하는 여자를 뽑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2월에 장능 사람인 왕첩여를 황후로 뽑아 양아들을 들여서 기르도록 했다. 그 아비 양봉광을 공성후로 봉했으나 총애가 없었으므로 황제를 뵙는 일은 드물었다.  

 

5월 조서를 내렸다.

 

    “ 옥사란 만인의 명령이다.

      사나 사람에게 억울함이 없고

      죽은 사람에게 한이 없다면 

      제대로 된 옥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법을 적용하는 것이 교묘한 마음으로 가득차고

      법을 여러 갈래로 꺾어서 적용하며    

      깊고 천함이 고르지 못하고

      상주하는 것이 사실과 다르다.

      위에서는 원인을 알 수가 없으니

      사방의 백성들이 어떻게 우러러 보겠는가.

      2천석 관리는 그런 사람을 쓰면 안 될 것이다.

      혹 마음대로 요역을 일으키고 주방이나 사옥을 치장하며

      지나가는 과객을 핑계로 직책을 넘거나 법을 위반하면서 명예를 좇으니

      비유하여 얇은 얼음을 밟으면서 햇볕을 기대하는 것이라.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지금 천하는 역질 가득 차 있어 짐이 몹시 민망하게 여기니

      그 피해가 심한 경우에는 금년의 조세를 부과하지 말라.“

 

그리고 피휘하기 쉽도록 자신의 이름을 쉬운 글자 병이(病已)에서 어려운 글자 '詢'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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