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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6-1 : 전한(前漢)의 창읍왕 유하(BC92-BC52) <G>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09월25일 13시16분
  • 최종수정 2021년09월25일 13시12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5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둘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25> 소무(苏武)의 절개 : 19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다.(BC81)

 

처음 소무는 약 20년 전인 BC100년 흉노에 포로가 되어 북해(바이칼 호)로 유배를 갔었다.그러나 식량이 제 때 공급되지 않아서 풀뿌리와 땅 쥐를 잡아먹으며 생활을 해야만 했다. 한나라가 내려 주었던 부절을 품에 안고서 양을 기르며 살았는데 눕든지 일어나 기동하든지 항상 부절을 붙들고 있었으므로 부절에 달린 털들이 모두 빠지고 없었다. 무제 재위 시절(BC141-BC87) 이릉과 함께 시중이 되어 같이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BC99년 이릉은 흉노에게 투항하여 편하게 살면서도 어려운 소무를 돌아보지 않았다. 오래 지나서 선우는 이릉을 북해로 보내 소무에게 술을 차려주면서 이릉이 말했다.   

 

     “ 선우께서 저 이릉이 경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알고

       나를 사신으로 보내 허심탄회하게 대하라고 하였소.

       끝내 한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스스로 고생을 하고 있구려.   

       도망자들의 변두리 땅에서 어떻게 신의를 기대할 수 있겠소.

       족하의 형제 두 사람(소가와 소현) 

       모두 나쁜 일에 연루되어 자살을 하지 않았소.  

       또 족하의 모친 또한 이미 돌아가시지 않았소.   

       그대의 부인은 나이가 어리니 아마 재가를 했다고 들었소. 

       여동생 둘 만 남았는데 각각 아들이 하나니 

       십 년여 지난 지금 살아있는지도 알 수가 없지요.

       인생은 아침이슬 같다고 하지 않소.

       어찌 이렇게 오랫동안 스스로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요?

       저 이릉이 투항 했을 때 미친 사람 같이 황황하며

       스스로 한나라에 부담을 준 것을 고통스럽게 생각한데다

       노모마저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대께서는 항복할 생각조차 없었으니 

       얼마나 저보다 고통이 크셨겠습니까. 

       폐하 춘추가 높고 법령 또한 자주 바뀌는 상황에

       대신이 죄도 없이 이멸된 것이 수 십 가문이나 되지 않습니까?

       안위란 예측하기가 어려운데 

       경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고난을 자초하시는 것입니까?”

 

소무가 이렇게 대답했다.

 

      “ 저의 아버지와 저는 나라 공덕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하를 위해 일을 성취하기 위해

        장군이 되고 열후로 봉책되었으니

        형제와 근친 모두 항상 간흉으로 땅을 적시고 싶을 뿐(肝脑涂地)입니다. 

        지금 몸을 죽여가며 스스로 뜻에 부응하려 노력하고 있으니

        비록 도끼나 끓는 물로 죽는다 하더라도 즐겁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신하가 군주를 섬기는 일은 마치 아들이 부모를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죽는 것은 죽어도 한이 없는 법입니다.

        바라기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릉은 며칠 더 소무와 술을 마셨다. 이릉이 다시 말을 꺼냈다.

 

     “ 한 번 만이라도 저의 말을 들어주시지요.” 

 

소무가 답했다.

 

     “ 저 스스로 몸을 나누어 죽은 지 오래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왕께서 반드시 제가 항복하기를 바라신다면

       청컨대 오늘 이 술을 마치고 나서 

       그대 앞에서 죽음으로 제 결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릉은 도저히 소무의 결기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 오! 의사로구나. 

       이릉과 위율(같이 흉노에게 투항한 사람)의 죄는 하늘에 가 닿겠구나.”

 

이릉의 눈물이 옷을 적시었는데 소와 양 수십 마리를 소무에게 주고 결별하고 떠났다.  그 후 이릉이 다시 북해로 와서 무제가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줬다. 소무는 남쪽을 향해 피를 토하듯 곡을 하고 몇 달 째 아침저녁으로 곡을 그치지 않았다.  

   

당시 호연제가 선우자리를 계승했는데 어머니 알씨가 사통을 한 관계로 내부가 시끄러웠으므로 그 틈을 타고 언제라도 한나라가 침공할 것이 두려웠다. 한나라에서 항복해 온 위율이 호연제를 위해 꾀를 생각해 냈다. 한나라와 화친하자는 계략이었다. 전에 한나라 사신이 왔을 때에는 소무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다시 한나라 사신이 흉노에게 오자 상혜가 몰래 사람을 한나라 사신에게 보내 이렇게 말하라고 가르쳤다.

 

      “ 천자께서 상림원에서 사냥을 하던 중

        기러기를 잡았는데 그 다리에 헝겊에 싸인 글씨를 읽었습니다.

        거기에 쓰이기를 소무 등이 어떤 습지에 있다고 했습니다.”

 

사신은 크게 기뻐하며 가르쳐 준 그대로 흉노에게 말했다. 그리고 상혜가 가르쳐 준 대로 휸노선우를 크게 나무랐다. 선우가 좌우를 둘러보자 모두들 크게 두려워하며 놀라는 분위기였다. 선우가 말했다.

  

     “ 사실은 소무가 살아있습니다.”  

   

끝까지 흉노에게 항복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며 버티던 소무와 마굉이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9년 만의 귀국이었다. 마굉은 왕충과 함께 서쪽에 사신으로 가다가 차단되면서 붙잡혔는데 왕충은 죽고 마굉만 살아남았는데 끝까지 투항하지 않고 버틴 사람이다. 흉노가 이들을 돌려준 것은 위율의 모략대로 한과의 우호친선 관계를 다시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릉이 소무를 치하하면서 술을 따랐다.

 

     “ 이제 귀하가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흉노에게는 훌륭한 이름을 드높였고

       한 황실에는 큰 공을 세우셨습니다.

       비록 죽백에 기록하고 단청에 그림을 그려 놓는다 한들 

       어찌 경을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이릉은 비록 겁이 많아 이렇게 되었지만  

       한나라 조정이 저의 죄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고

       제 노모를 온전하게 해 주시어

       큰 치욕을 벗어버리겠다는 묵은 의지를 가지고서 

       거의 조가의 맹약과 같은 위업을 이루는 것이야 말로

       저 이릉의 오래 묵은 잊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가족을 이멸시키고 세상의 큰 도륙을 실시하였으니

       어찌 제가 되돌아 볼 수 있었겠습니까.

       다 끝난 일입니다만 귀하께서 제 마음을 알아주기만 해도 좋겠습니다.”   

 

춘추시대 노나라가 제에 세 번 싸워 세 번 지고서  BC681년 노와 제가 가읍에서 맹약을 했다. 이 때 조귀가 제의 환공에게 겁을 주어 전에 뺏은 땅을 노에 되 돌려주게 하였던 고사를 조가의 맹약曹柯之盟이라고 한다. 이릉이 눈물을 여러 번 흘리고 나서 나서면서 무소와 이별하였다.

 

죽었거나 항복하여 머문 사람을 제외하고 무소와 함께 장안으로 돌아온 사람은 아홉 명이었는데 십 구년 만에 돌아온 셈이었다. 출발했을 때에는 강건했었지만 돌아올 때는 머리가 온통 백발이 되었다. 나라에서는 이백만 전과 밭 이경, 그리고 중이천석의 전속국이라는 직책을 내려주었다. 원래 곽광과 상관걸은 이릉과 친분이 깊었으므로 세 명의 사자를 흉노로 보내 이릉을 초대하였다. 이릉이 말했다.

 

    “ 귀환하기야 쉽습니다만

      장부가 어찌 두 번이나 치욕을 당하겠습니까?”

 

이릉은 돌아오기를 포기하고 먼 흉노 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무제 말년에 나라 지출이 너무 많고 호구가 반으로 줄어들었다. 곽광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았으므로 요역은 줄이고 세금을 감면하여 백성들이 숨 쉴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흉노와 화친정책을 추진했으므로 백성들이 편안했고 점점 문제와 경제 시대의 치세(문경지치)에 가까워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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