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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6-1 : 전한(前漢)의 창읍왕 유하(BC92-BC52) <A>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08월13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1년08월30일 11시12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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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1> 전한 무제(BC157-BC141-BC87)와 유불릉 출생

 

전한(前漢BC202-AD8)은 고조 유방이 항우와의 전쟁을 통해서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한 나라다. 고조 유방은 원래 시골 정장(亭長)이었는데 진나라의 폭정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켰고 출신 지역의 이름을 따서 패공(沛公)의 자리에 올랐다. 진나라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거대 세력인 항우에 전략적으로 복속하였지만 한신(韓信), 장량(張良), 소하(蕭何)와 같은 훌륭한 인재를 기용하면서 힘을 길렀고 결국 해하전투에서 항우를 격파하면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고조가 죽고 그 부인 여씨의 횡포로 한동안 나라가 어수선했지만 아들 문제(재위 BC180-BC157)와 손자 경제(재위 BC157-BC141)로 이어지는 약 40여 년 동안 중국은 역사상 가장 훌륭한 통치기간 중의 하나로 평가받는 문경의 치를 누리게 되었으며 그 다음 황제인 증손자 무제(재위 BC141-BC87)의 통치기간 중에는 장건, 위청, 및 곽거병 등을 통하여 중국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영토 확장의 황금기로 이어졌다.   

 

무제의 본처 진씨는 일찍 죽고 효무사황후 위씨가 BC128년 첫 아들 유거를 낳았다. 역사에서 여(戾)태자로 불리는 사람이다. 부인 왕씨는 둘째 아들 제회왕(齊懷王) 유굉(BC123–BC110)을 낳았고, 이씨가 셋째 아들 연자왕 유단(燕剌王 劉旦, ?-BC80)과 넷째 아들 광릉여왕 유서를 낳았으며, 효무황후 이연이 다섯 째 아들 창읍왕 유박(昌邑哀王 劉髆, ?-BC88)을 낳았다. BC94년 당시 무제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던 첩여 조씨가 임신 14개월 만에 여섯 째 아들 유불릉을 낳았다. 무제 나이가 63세였다. 무제는 옛날 요임금이 14개월 임신 끝에 낳았다는 고사에 따라서 조첩여가 기거하던 궁궐의 문을 ‘요모문(堯母門)’이라고 부르도록 고쳤다. 사마광은 무제의 이런 행동을 매우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시 태자(유거)도 나이가 서른네 살로 멀쩡하고 그 어머니 위황후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별안간 첩에 불과한 조첩여의 아들을 두고 요임금을 빗대면서 요모문이라고 까지 궁궐문 이름을 고치는 것은 분명히 간신의 꼬드김이라고 지적했다. 즉, 태자를 무고로 덮어씌워 폐하고 무제가 아끼는 유불릉을 세움으로써 그 공에 기대어 출세를 누리려는 사악한 간신들의 조작이라고 비판했다. 사마광이 격렬히 비판했던 것은 무제의 본처의 적장자 황태자 유거가 원숙한 나이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갈아 치우려는 조정의 간사한 무리 때문이었다.     

 

<2> 무제의 총애를 받는 直指绣衣使者(공직자비리수사처) 강충(江充)(BC94)

 

원래 강청은 경제의 여덟 째 아들 조경숙왕 유팽조(BC1966-BC92)의 빈객이었다. 그러다가 유팽조의 아들 단에게 죄를 지어 장안으로 도망간 다음 조정에 조세자 단의 은밀한 비리를 고해바쳤다. 조세자 단은 폐위되었는데 그 일로 강충을 만나 보게 된 무제는 강충의 장대한 용모와 두드러지게 가벼운 복장에 한 눈에 기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제가 이것저것 국사에 관해서 물어 보았는데 그 대답이 항상 정곡을 찌르는 것이어서 크게 감동을 받은 무제는 강충에게 직지수의사자(直指绣衣使者)라는 직책을 내려주었다. 황족과 고위관료들의 비리사치를 사찰하는 자리였다. 강충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황족이나 고관들의 비리를 가차 없이 고발했기 때문에 무제는 더욱 그를 충직하다고 신뢰하였으며 강충 또한 무제의 속내를 꿰뚫고 있었다.

 

강충이 무제를 좇아 감천궁으로 행차하다가 황태자 유거의 가신이 모는 마차와 마주쳤다. 강충은 태자 가신을 매우 심하게 꾸짖었는데 그 사실을 보고받은 황태자 유거가 사람을 보내 강충에게 신중하게 사과했다.

 

    “ 내가 그 가신을 아껴서가 아닙니다.

      아버님께 소식이 들어가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잘 타이르고 가르칠 테니 

      오직 강군께서 부디 너그러이 봐주시지요. ”            

 

강충은 태자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무제는 황태자의 잘못마저 숨기지 ㅇ낳고 보고하는 강충을 더 크게 신뢰하며 말했다.

 

    “ 신하라면 당연히 이래야 하는 법이다.”

 

장안의 모든 관리들은 강충의 위세에 눌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3> 무구무예 유창에게 조왕의 자리를 내린 무제

 

BC92년 조경숙왕 유팽조가 죽었다. 유팽조는 형 강도왕 유비의 애첩 요희(淖姬)를 취하여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그 이름을 요자(淖子)라고 불렀다. 요희의 오빠가 환관으로 있었으므로 무제가 그 환관에게 요자가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다. 환관이 대답했다.

 

   “ 욕심이 많은 아이입니다.” 

 

무제가 말했다.

 

   “ 욕심이 많다면 한 나라 국민을 이끌기 부족하겠군.”

 

환관에게 유팽조의 다른 아들 무시후 창에 대해 물었다. 환관이 대답했다.

 

   “ 큰 허물고 없고 큰 자랑거리도 없습니다(无咎无誉).” 

 

무제가 말했다.

 

   “ 그렇다면 가능하겠구나.”

 

사자를 보내 죽은 유팽조의 조왕 자리를 무시후 유창에게 주었다.

 

<4> 칼을 들고 용화문을 들어온 정체불명의 괴한과 장안 11일 대수색 (BC92) 

   

당시 황제는 건장궁(建章宫)에 기거하고 있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검을 차고 용화문을 들어섰다. 수상하다고 느낀 수비대장이 체포하라고 명을 내렸는데 재빨리 검을 버리고 달아나는 바람에 잡을 수가 없었다. 무제는 격노하여 용화문 수비대장의 목을 잘랐다. 그리고 수도지역 수비대를 총동원하여 장안 성문을 닫고 열하루 동안이나 수색했지만 끝내 그 괴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자치통감은 이 때 부터 무고가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승상 공손하의 부인 이름은 위군유인데 이 사람은 무제의 부인 위황후와 자매지간이었다. 무제가 그런 공손하를 매우 총애했다. 공손하의 아들 경성이라는 자가 아버지를 이어 받어 태부가 되었는데 교만하고 거만하여 법을 지키지도 않고 군사자금 1900만전을 마음대로 썼다가 발각되어 옥에 갇히고 말았다.    

당시 주안세라는 협객이 양릉지방에서 날뛰고 있었는데 공손하가 자신이 주안세를 잡아서 아들의 죄를 속죄 받겠다고 나섰다. 무제는 이를 허락했는데 과연 공손하가 주안세를 체포하는데 성공했다. 사로 잡힌 주안세가 이렇게 말했다.

 

    “ 승상의 화가 이제 종족 전체에게로 까지 번지겠군.”

 

그리고는 옥중에서 편지를 써서 이렇게 고발했다.

 

   “ 주경성이 양석공주와 사통했습니다.

     그리고 주상께서 감천궁 가실 때 

     무당을 먼저 보내 땅에 허수아비를 묻고서 

     주상을 저주하며 나쁜 욕을 하였습니다.” 

 

양석공주는 위황후가 낳은 무제의 둘째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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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해(BC91) 정월 공손하 부자를 구속하고 조사에 들어갔다. 공손하의 부자와 가족은 모두 족멸되었다. 위황후가 낳은 무제의 두 딸 제읍공주와 양석공주와 위황후의 남동생 아들 위항 또한 무고에 연루되어 주살되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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