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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15 : 3대 인재가 이어진 후진(後秦)을 망가뜨린 요홍(姚泓) (G)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07월02일 16시40분
  • 최종수정 2021년06월04일 13시38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3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41) 모용홍의 서연 건국과 요장의 독립(AD384)

 

모용수가 업 방향으로 달아났다는 소식을 들은 북지(섬서성 빈현)장사 모용홍은 관동 쪽으로 도망가서 이민족 수 천 명을 규합한 다음 장안 동쪽 80KM 지점인 화음(섬서성 화음)에 진을 치고 스스로 도독섬서제군사 및 제북왕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삼촌 모용수를 승상으로 삼는다고 발표했다.(AD384년 3월) 부견은 부희와 부예, 그리고 두충과 요장에게 5만 군사를 배치하여 모용홍을 토벌하게 하였다. 요장은 부예에게 전투를 걸지 말고 그냥 모용홍이 도망가게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거칠고 난폭한 부예는 말을 듣지 않고 모용홍을 공격하다가 패사했다. 요장은 부견에게 부예의 전사 소식을 보고하면서 패전에 대해 사과했다. 부견은 화가 나서 요장이 보낸 전갈을 모두 죽였다. 요장은 겁이 나서 북쪽 천수(감숙성 천수)로 도망쳤다. 천수에 거주하던 강족 주민들은 요장을 열렬히 환영하며 동족을 규합했다. 순식간에 5만여 호가 요장 밑으로 들어왔다. 요장은 스스로 만년진왕 대장군 대선우라고 칭하면서 천수에서 후진을 건국했다.(AD384년 4월)   

 

(42) 모용충의 장안 진출과 요장의 생각(AD384)

  

모용홍의 군대가 장안을 향해 진격하는 동안 모용홍의 부하 고개 등은 모용홍의 덕망과 지략이 동생 모용충에 못 미치는 데다 지나치게 가혹하고 준엄하였으므로 모용홍을 살해하고 모용충을 황태제로 옹립하였다. 고개는 상서령이 되었다. 부견의 공격을 받고 북지(섬서성 빈현)에서 대치하고 있던 요장은 즉각 아들 요숭을 인질로 보내와 화의를 요청했다. 모용충의 대군이 장안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부견은 서둘러 북지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부방을 보내 여산(섬서성 임동)을 지키게 하고 부휘를 도독중외제군사로 삼아 5만 군사로 방어하게 하였다. 모용충은 부휘의 5만 군사를 정서(섬서성 화현)에서 대파하고 장안으로왔다. 

부견은 3만 군사와 함께 강우와 어린 아들 부림을 보내 막았으나 모용충은 그들을 모두 패사시키고 마침내 장안 아방궁에 입성했다.(AD384년7월) 어리 적부터 자신의 남색대상으로 총애를 받아왔던 모용충이 장안성을 압박해오자 부견은 당을 치고 통곡하며 말했다.

 

“ 내가 일찍이 왕경락(왕맹)의 말을 듣지 않고

  저 하얀 선비족놈(白虜, 백노)을 살려 뒀다가 이 수난을 당하는구나! “ 

 

부견과 그 일행은 황망하게 북쪽으로 도망갔다. 모용충이 장안을 공격하는 동안 요장은 군신을 모아 어떻게 해야 할지 전략회의를 열었다. 모두 말하였다.

 

“ 대왕께서 먼저 장안을 빼앗은 다음 

  근본을 갖추어 사방을 경영하셔야 할 것입니다.“

 

요장은 말했다.

 

“ 그렇지 않다.

  연의 무리들은 항상 고향 땅으로 돌아갈 생각에 빠져 있다.

  따라서 관중을 장악하더라도 반드시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영북(섬서성 예천)에 머물러 있으면서 물자를 쌓은 다음에

  전진이 망하고 후연이 장안을 떠날 때를 기다리면 

  마치 팔짱을 끼고서 장안을 차지할 수 잇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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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요장의 부견 체포와 부견 죽음(AD385)

 

약 두 달 뒤인 AD385년 7월 부견은 오장산에 도착했다. 끝까지 따라온 호위기병은 10여기였다. 후진 요장은 오충을 보내 부견을 체포했다. 요장은 부견에게 전국새를 요구했다. 그렇게 하면 은혜를 베풀 수도 있다고 회유했다. 부견은 눈을 부릅뜨고 요장에게 욕했다.

 

“ 어린 강족 놈이 감치 천자를 핍박하느냐?

  옥새는 이미 동진으로 보냈으니 내게는 없다.“  

 

요장은 다시 윤위를 보내 양위하라고 유세했다. 부견이 요장을 꾸짖었다.

 

“ 선양이란 성현의 일이다.

  너 같은 반란 도적에게 어찌 선양할 수가 있겠느냐!“

 

부견은 윤위에게 전에 직책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다. 윤위는 상서령사로 있었다고 대답했다. 부견이 탄식했다.

 

“ 경은 왕경락의 무리이고 재상의 자질을 지녔는데 

  내가 그동안 그것을 몰라 봤으니 망해도 마땅하구나! “

 

평소 부견은 요장을 매우 아끼고 후대한 까닭에 자신의 처지에 더욱 화가 났다. 자신의 딸들이 욕보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부보와 부금을 죽였다. 그리고 요장에게 빨리 죽여 주기를 간청했다. 요장은 사람을 보내 부견을 신평(섬서성 빈현)의 절로 옮겼다. 부견은 절 안에서 목을 졸라 죽였다.(AD385년7월26) 부견의 나이 48세 였다. 부인 장씨와 어린 아들 부선은 자살을 택했다.      

 


(44) 요장의 후진(後秦) 황제즉위(AD386)

 

장안은 텅 비었다. 사람들은 다 죽거나 도망가고 없었으며 건물은 거의 다 파괴되었다. 예전 형양(하남성 형양) 태수였던 조곡이 흉노 4천여 호를 이끌고 장안으로 들어왔다. 후진 요장이 안정으로부터 대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입성했다. 주변의 모든 떼도적들이 요장에게 항복했다. 

요장은 장안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나라 이름을 대진으로 삼았다. 전진이 세운 나라와이름이 같다. 따라서 역사에서는 요장의 대진을 후진이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요장이 축하연을 열면서 이렇게 말했다.

 

“ 얼마 전만 해도 우리가 여기서 북면하여 전진을 섬겼는데 

  이제 우리가 홀연히 군주와 신하가 되었으니

  어찌 좀 부끄럽지 않은가?“

 

조천이라는 자가 말했다.

 

“ 하늘이 폐하를 아들로 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어찌 신들이 부끄러울 수가 있겠습니까?“

 

요장이 흐뭇해하며 크게 웃었다.

 

 

(45) 하북 열국의 분열(AD386-AD399)

 

AD376년 전진 부견에 의해 전량과 대나라가 멸망함으로써 통일된 황하 이북지역은 8년 만에 일어난 비수대전 패배 이후 급격히 분열되어 나갔다. 각 지역의 군웅들이 전진의 허약을 틈타 분리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모용수의 후연(AD384년), 모용홍과 모용충의 서연(AD384년), 탁발규의 북위(AD386년), 걸복국인의 서진(AD385년), 여광의 후량(AD389년), 독발오고의 남량(AD397년), 이고의 서량(AD398년), 그리고 모용덕의 남연(AD398년) 등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국력이 가장 컸던 나라는 물론 후진과 동진이었고 다만 AD386년 건국한 탁발규의 북위가 급격하게 부상하여 AD439년 다시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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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요장 부상과 천수 후퇴 및 부등의 장안 입성(AD386)

 

AD385년 7월 전진의 부견이 죽고 황위를 이어받은 전진황제 부비는 AD386년 6월 도독중외제군사 왕영을 통해 전국에 격문을 뿌렸다. 모용수의 후연과 후진의 요장을 토벌하는 대군을 일으켜 맹동(섬서성 대현)에 결집하자는 선동이었다. 부비의 토벌격문을 보고 곳곳의 토후들이 수백 혹은 수천의 군사를 모아 호응해왔다. 전진 주군 부비는 멀리 남안(감숙성 농서)에 웅거하고 있는 사촌동생 부등과 연락하면서 연대를 모색했다. 전진의 평량(감숙성 화정)태수 금희와 안정도위 몰혁간이 후진의 요방성의 군사를 안정부근에서 격파했다. 화가 난 요장이 손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금희의 군사를 깨부수었다. 

        

산서성 문희에 머물고 있던 서연의 모용영은 전진의 부비에게 동쪽으로 가는 길을 열어 달라고 요청했는데 부비가 거절했다. 모용영이 가고자 하는 곳은 적국 후연 모용수의 땅이다. 만약 모용영을 보내 준다면 모용수의 세력은 더 강해질 뿐이었다. 부비는 열어 줄 수가 없었다. 서연 모용영의 군대와 전진 부비의 군대는 양릉(산서성 임분)에서 결전을 벌였다. 불행하게도 전진이 대패했다. 전진 좌승상 왕연과 위장군 구석자가 전사했다. 부비는 수 천 기병을 이끌고 남쪽으로 도망갔으나 얼마 못가 섬(하남성 삼문협)에서 동진의 양위장군 풍해에게 패하고 전사했다. 부비의 아들 태자 부녕과 장락왕 부수는 체포되어 건강으로 압송하려 하였으나 건강 조정은 조서를 내려 부씨 유족들을 동진 강주(강서성 구강)에 망명와 있던 부굉과 합류시켰다. 모용영은 부비를 물리친 다음 장자(산서성 장치)를 점거하고 황제를 칭했다. 사로잡힌 부비의 처 양씨를 상부인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양씨 부인은 강하게 거부하면서 모용영을 패도로 찔렀다. 모용영은 크게 다치지 않았으나 양씨를 죽이고 말았다.(AD386)  

 

전진의 남안왕 부등은 부비의 사촌 동생으로써 남안(감숙성 농서)에 웅거하고 있었다. 장안의 전진이 무너지고 부씨 황실이 곳곳으로 흩어져 패사하거나 동진으로 망명했지만 유일하게 독자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사람은 부등 뿐 이었다. 전진에 호의적 이었던 유민들은 하나 둘씩 농서로 모여들어 3만호 이상의 큰 세력으로 발전했다. 부비는 천수에 주둔하고 있는 후진의 진주자사 요석덕을 습격했는데 후진 황제 요장이 직접 지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석덕을 격파했으며 요장은 부상까지 입었다. 이 때 죽은 후진군사가 2만을 넘었으니 부등으로써는 보기 드문 대승을 거둔 셈이다.(AD386년 10월)

 

이 때 부비의 어린 아들이자 부등의 5촌 조카인 발해왕 부의와 제북왕 부창이 상서 구유와 함께 난을 피해 농서 부등에게로 찾아왔다. 부등은 부의를 황제로 세울 생각이었으나 요장과 모용수와 모용영이라는 강적을 맡아 처리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주변의 권고를 받아들여 본인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AD386년11월) 부등은 군사 5만을 이끌고 동쪽에 있는 후진을 공격했다. 모든 갑옷과 병기에는 사(死)와 휴(休) 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는데 죽어야 휴식을 취한다는 비장한 각오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엄격한 군율과 매우 과학적인 포진법(네모 형태의 방진형 포진)을 구사하여 전투에 임할 때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부등은 요장이 후하게 부견의 시체를 묻어둔 섬서성 빈현의 보루를 확보하고 그곳을 지키는 후진의 서숭과 호공에게 각각 옹주자사와 경조윤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마침내 부등은 다시 장안에 입성했다.     

    

(47) 전진 부등과 후진 요장의 싸움(AD 387) 

 

부상을 입고 천수로 물러난 후진의 요장과 새로 장안에 입성한 부등의 싸움은 불가피해졌다. 비록 부견이 사망하고 전국이 여러 나라로 쪼개지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부등의 전진은 정통성을 지닌 대국이었다. 게다가 부등이라는 사람의 역량도 훌륭했다. 부등은 두충, 양정, 양벽 및 걸복국인과 같은 맹장을 앞세워 장안에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부등은 익주목 양정과 부찬을 경양(감숙성 평량)으로 보내 후진 요덕석을 공략했다. 요덕석은 대패했다. 요장이 서둘러 지원군을 보내면서 전진과 후진은 경량을 두고 대치상태에 돌입했다.      

 

전진의 혼란은 내부로부터 삐져나왔다. 전진의 풍익태수 난독이 황족 노왕 부찬을 꼬드겨 장안을 공격하는 반란을 모의한 것이다. 게다가 부찬의 동생 부사노는 형님 부찬이 황제자리를 차지해야한다고 졸랐다. 부찬은 거부했다. 부사노가 형 부찬을 죽이고 자신이 황제라고 일컬었다. 그러자 풍익태수 난독은 부사노와의 동맹관계를 끊어버렸다. 전진 조정이 혼란한 틈을 타고 서연의 모용영이 장안을 공격해 들어왔다. 난독은 급하게 요장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요장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니원(섬서성 요현)에 주둔한 뒤 장안의 부사노를 격파했다. 부사노는 북쪽 선비족의 거주지로 도망쳤다.(AD387) 부등도 북쪽으로 나아가 섬서성 빈현에 웅거했는데 이민족 중에서 귀부한 사람이 10만호가 넘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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