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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15 : 3대 인재가 이어진 후진(後秦)을 망가뜨린 요홍(姚泓) (D)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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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06월11일 16시4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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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20) 석민(염민)의 쿠테타(AD349)와 유랑하는 요익중(AD350)

 

석준은 잡혀서 그날로 곤화전에서 참수되었고 정태후, 태자 석연, 맹준, 왕난 장비가 같이 죽었다. 석감이 즉위하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석민은 대장군, 녹상서사 및 무덕왕에 봉해졌다. 사공 이농은 대사마, 낭개는 사공, 노심은 중서감이 되었다. 석감은 불만을 지닌 채 서쪽 고향으로 쫓겨 가는 포홍 세력들을 무마하기 위해 업에 포로로 있던 포홍의 아들 포건을 풀어주면서 포홍에게는 도독관중제군사, 정서대장군 및 옹주목, 영진주자사로 삼았다. 

 

석감은 석민이 결국에는 반란을 일으킬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몰래 낙평왕 석포와 중서령 이송 등에게 야밤을 타고 궁중에 거처하는 석민과 이농을 습격하라고 시켰다. 그러나 거사는 실패하고 궁궐이 소란해지면서 황궁무사와 석민군사 양측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황제 석감은 발뺌을 하기 위해 이송과 석포를 잡아 죽여서 자신과 무관한 일임을 보이려 했다. 석민이 일단 승기를 잡고 석감을 유폐시키면서 일은 그렇게 넘어가는 듯 했다. 그러나 석민 일당에게 반감을 가진 석호의 아들 석지는 요익중과 포홍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자신의 임지인 양국에서 군대를 몰아 남쪽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석민은 이농과 7만 군사로 석지를 대응했다. 석감을 지지하고 석민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궁성 내에서도 여러 번 일어났다. 중령군 석성과 하동태수 석휘가 석민과 이농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했고 손복도도 황제 석감의 밀지를 받고 석민을 공격하려다가 성공하지 못했다. 손복도는 석민의 칼에 죽고 석감은 유폐되었으며 궁궐 안에서 무기를 들고 잇는 자는 모두 참수되었다. 한족인 석민은 명령을 내려서 호족과 갈족과 같은 이민족의 목을 베어 오는 한족에게는 문관의 경우 3등급을 올려주고 무관은 모두 아문을 제수한다고 했다. 하루에 수만 명, 전체적으로 20여 만 명 이민족 목이 날아갔다. (AD349년)   

 

황제 석준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석민은 ‘계조이(繼趙李)’ 라는 도참설, 즉 ‘조씨를 잇는 사람은 이씨‘를 신봉하여 성을 이씨로 바꾸고 나라도 위(衛)로 고쳤다. 석준 밑에 있던 신료들은 뿔뿔이 지방으로 흩어져 할거하였다. 예를 들어 요익중은 섭두(하북성 조강현), 단감은 진류(하남성 진류현), 포홍은 반두(하남성 준현), 장침은 부구(하북성 자현) 등지를 장악하고 웅거하였다. 결국 후조는 석민이 장악하고 있는 업성 부근과 석지가 장악하고 있는 형태 부근, 그리고 군웅이 할거하고 있는 여러 지방으로 갈기갈기 찢긴 셈이었다.

 

기주로 달아났던 여음왕 석곤은 7만 무리를 이끌고 석민을 공격하다가 참패당했다. 갇혀있던 석감은 몰래 환관을 바깥으로 장침에게 보내 석민을 습격하도록 종용했다. 그러나 교활한 환관은 그 사실을 석민과 이농에게 고해 바쳤다. 석민과 이농은 결국 석감과 그 식솔들을 모두 죽이고 남아있는 석호의 손자 28명을 죽였다. 석씨 성을 가지고 살아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석민은 주변의 강권에 따라 국호를 다시 대위(大魏)라고 고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역사에서는 이 나라를 염씨의 위나라 즉 염위(冉魏)라고 부른다.   

 

 

(21) 석지가 후조를 계승(AD350)

 

양국의 신흥왕 석지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연호를 영녕이라고 하면서 여음왕 석곤을 상국으로 삼았다. 주변에 흩어져 웅거하는 모든 이민족은 석지에게 지지를 표명하엿다. 석지는 요익중에게 우승상, 친조왕이라고 칭하면서 특별히 우대하였다. 요익중의 아들 요양이 배포도 크고 용감하며 지략이 뛰어났으므로 주변 모두가 그를 세자로 책봉하라고 권했지만 요익중은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석지는 요양을 예주자사 신창공에 책봉했고 부건에게는 도독하남제군사 및 연주목과 약양군공에 봉하였다. 

 

AD350년 4월 석지는 10만 군사를 석곤에게 붙여서 왕랑과 장거 등과 함께 남쪽 염민의 위나라를 공격했다. 6월에 석곤의 군사는 한단을 점거하고 번양(하남성 내황현)에서 유국과 협공하기로 했다. 그러나 염위의 장군 왕태가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석곤의 군대는 크게 깨졌다. 유국은 군대를 돌려 돌아가고 말았다.

  

 

(22) 부건의 관중 장악과 장안 입성(AD350)

 

석지의 거기장군 왕랑이 석곤과 함께 업을 공격하러 떠난 사이 왕랑의 사마 두홍은 장안을 점거하고서 스스로 동진의 정북장군 및 옹주자사라고 부르면서 장거를 자신의 사마로 삼았는EK. 부홍의 아들 부건은 두홍의 장안을 탐내어 뺏을 생각이었다. 따라서 두홍이 그 생각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겉으로는 석지가 내린 후조의 관작(도독하남제군사 및 연주목과 약양군공)을 받는 척하면서 부하들을 하남 요지에 임명하여 서쪽(즉 장안)에 뜻이 전혀 없는 것 같이 위장했다. 이렇게 위장하여 두홍을 안심시킨 뒤 부홍은 스스로 동진이 내린 직책, 즉 정서대장군 및 도독관중제군사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전격적으로 군대를 몰아서 두홍을 쳐들어갔다. 동생 부웅은 5천 군사로 동관으로 들어가고, 부청은 7천 무리로 지관(하남성 제원)으로 들어갔다.

 

부웅이 동생 부청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 성공하지 못한다면

  너는 하북에서 죽을 것이고 

  나는 하남에서 죽을 것이다.“  

 

두홍은 장수 장선과 1만 3천의 군사를 보내 동관의 북쪽에서 부웅과 부청의 군사를 맞아 싸웠으나 장선은 참패하고 말았다. 두홍은 관중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장안에서 부웅 부청의 군사를 대적했으나 두홍의 아우 두욱이 부건에게 항복함으로써 모든 전투에서 지고 말았다. 주변 모든 성읍들은 부건에게 귀부하였지만 두홍은 장안성을 닫아걸고 대치하면서 항복하지 않고 버티었다.(AD350년8월)

부청은 위수 북쪽에서 장선의 나머지 군사를 격파하고 그를 사로잡았다. 장선이 잡히자 삼보(장안을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눈 지역)의 모든 성과 보루들이 부청에게 항복했다. 10월 부건이 장안으로 급히 들어오자 석 달간이나 버티던 두홍과 장거도 성을 버리고 서쪽의 사죽(섬서성 주지)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부건은 11월 27일 장안성에 입성했다. 당시 백성들은 진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살아있었으므로 부건은 참군 두산백을 동진 건강에 보내 형식적으로 장안이 진나라 소유의 땅이 된 것처럼 승리를 바쳤다. 다음해(AD351년 1월) 부건은 장안에서 대진(大秦:역사에서는 전진前秦)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천왕자리에 오른다. 

 


(23) 요익중의 석지 원조(AD351)

 

염위 주군 염민은 석지가 장악하고 있는 양국(하북성 형태)을 포위하고 100여일이나 공격하였다. 다급해진 석지는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태위장거를 급히 전연의 모용준에게 보내 전국새를 주면서 구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하북성 조강에 있는 요익중에게도 손을 벌렸다. 요익중은 아들 요양에게 2만 8천 정예기병을 파견하면서 말했다.

 

“ 너의 재주가 염민의 열 배이니 

  잡아서 효수하지 못하면 날 볼 생각을 말아라.“

 

요익중은 동시에 전연의 모용준에게 편지를 보내 지원군의 필요함을 역설했다. 모용준은 3만 군사를 열관과 함께 파병했다. 염민은 모용준이 석지를 지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대사마부 종사중랑 상위를 전연에 사신으로 보냈다. 모용준은 길러준 석씨를 배반한 염씨를 극렬하게 힐난했다. 상위가 항변했지만 모용준은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염민은 양국을 포위한 채 석지의 지원군 요양, 여음왕 석곤 및 모용황이 보낸 열관과 치열한 전투를 펼쳤다. 그러나 수십만 석지-요익중-모용황 연합군을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염민은 수만의 군사를 잃은 채로 10명의 기병과 함께 겨우 숨어서 업성으로 돌아왔다.  염민의 군사 중에서 사로잡힌 대선우 염윤과 좌복야 유기는 물론 포로 약 10만을 모두 죽였다. 요익중은 염민을 생포해 오지 못한 요양을 곤장100대를 때려 질책했다.(AD351년 3월)

 

(24) 유현의 석지 살해와 후조 멸망(AD351)

  

양국을 무난히 방어한 조왕 석지는 장수 유현과 7만 군사를 일으켜 업성의 염민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석지의 군대가 업성 부근까지 도달하자 겁이 난 염민은 위장군 왕태와 상의하려고 했지만 왕태는 병을 핑계로 의논하기를 거부했다. 할 수 없이 염민은 홀로 전쟁에 나섰고 유현을 대파하고 3만여 명을 참살했다. 유현은 염민에게 항복하면서 자신이 돌아가서 석지를 암살하여 보답하겠다고 하자 염민은 그를 믿고 회군하여 돌아갔다. 

 

양국으로 돌아온 유현은 석지와 승상 석병, 그리고 태재 조서 등 10여명을 시해하고 그 머리를 업으로 보냈다. 이로써 마지막 남은 후조의 뿌리가 완전히 절멸된 셈이다. AD319년 석륵이 후조를 세운지 꼭 32년 만에 망한 것이다. 염민은 석지의 머리를 사거리에서 태워버리고 유현에게 상대장군 및 대선우 기주목의 직책을 내렸다.(AD351년3-4월) 그러나  몇 달 뒤 유현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염민의 업을 공격했으나 패해서 돌아온 뒤 스스로 양국에서 황제를 칭다. 유현은 그 다음해(AD352년) 염민의 공격을 받고 사로잡혀 죽었고 염민 또한 그 해 전연 모용준의 장수 모용각의 공격을 받고 사로잡혀 계성(북경) 처형되었다(AD352년 5월3일). 염민의 아들 염지가 업성에서 버티었으나 7월 명위의 장수 마원이 성문을 열고 항복함으로써 염위는 건국 2년 만에 멸망했다. 모용준은 염지를 죽이지 않고 해빈후라는 작위를 주어 생계를 이어가게 하였다. 그러나 2년 뒤 반역을 모의했다는 무고로 결국 모용준에게 죽었다.    

 

후조가 멸망하자 요익중은 사신을 동진의 수도 건강으로 보내 항복을 받아 달라고 해왔다. 동진에서는 AD351년 5월 사지절 육이대도독, 독강북제군사,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대선우 고릉군공으로 봉하고 그의아들 요양에게도 지절, 평북대장군 및 도독병주제군사,병주자사, 평양현공라는 직책을 내렸다.  

 

 

(25) 요익중의 사망과 요양(AD330-AD357)의 계승(AD352)

 

요익중은 AD352년 깊은 병에 들었다. 이 때 나이가 72세였으니 병이라기보다 노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42명의 아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  석씨(석륵과 석호의 후조 왕조)가 나를 매우 후하게 대해 줬으니

   나는 평생 그들을 위해 힘을 다하려고 애썼다.

   지금 석씨가 없어졌으니 중원에 주인이 없어진 셈이다.

   내가 죽거든 너희들은 서둘러 진(동진)으로 가서

   마땅히 신하로써의 절개를 지키며 

   옳지 않은 일(반란)은 도모하지 말아라.“

   

요익중이 죽자 요양은 죽음을 비밀에 부친 다음 6만호를 인솔하고 남쪽으로 가서 양평(산동성 관도), 원성(하북성 대명), 발간( 산동성 당읍) 등을 함락시킨 다음 확오(산동성 사평)에 주둔하였다.  

 

요양은 그 전 해 장안에서 건국한 전진의 군사와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했고 남쪽 형양(하남성 형양)으로 옮겨가고 나서야 요익중의 장례를 선포하였다. 얼마 후 요양이 군사를 일으켜 낙양부근을 공격하다가 자신의 말이 화살에 맞아 죽었다. 한 살 아래 동생 요장이 자신의 말을 주었다. 요양이 물었다.

 

“너는 어떻게 할 참이냐?“   

 

요장이 말했다.

 

“ 다만 형님이 사시면 되는 것입니다.

  저들은 저 요장을 건드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침 구원병이 도착하여 요양과 요장 형제는 모두 구출되었다. 요양은 다섯 동생을 동진에 인질로 보내 귀부하였다. 동진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요양에게 초성(안휘성 박현)에 주둔하라고 명령했다. 요양은 혼자 말을 타고 회하를 건너 수현으로 가 수현주둔장군 사상(謝尙)을 만나 보았다. 사상은 주변을 모두 물리고 예를 다하여 요양을 만나 보았는데 처음 만났으나 마치 평생의 친구처럼 반가이 맞았다. 요양은 박학하고 담론을 잘하였으므로 강동사람들이 그를 매우 중요시 하였다.   

 

 

(26) 동진에 대한 믿음 상실(AD352)

 

수춘에 주둔한 동진 장군 사상과 귀순한 요양은 함께 전진의 장수 장우가 주둔한 허창을 공격하였다(AD352). 동진의 군대가 허창을 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부건은 동생 부웅, 부청 등을 보내 장우를 지원했다. 사상은 전진에 대패하고 모든 것을 요양에게 부탁했다. 요양은 이 때 동진의 무능력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 부건은 장우를 대신해서 양군을 예주자사로 임명하여 허창르 맡겼다.

 

북진정책을 주창하던 은호는 이번 수춘의 패전으로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북벌에 대한 생각을 접지는 않았다. 왕희지가 음호에게 편지를 보내 북벌전쟁을 포기해야 한다고 간곡히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 은호는 학교마저 폐지하고 학생들을 군대에 동원하였다. 지난번 패전했던 사상이 다시 허창에서 이겨 전진의 예주자사 양군을 물리쳤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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