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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15 : 3대 인재가 이어진 후진(後秦)을 망가뜨린 요홍(姚泓) (F)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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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06월25일 16시4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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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34) 부견의 전량 멸망과 요장(AD376) 

 

전량의 장천석은 전진에 대해 칭번을 했다가 뒤집었다가 하면서 변덕이 심했다. 전진이 위태롭다고 생각되면 독립을 선언했다가 전진이 강해지면 머리를 숙이고 칭번한다고 번복했다. 게다가 장천석은 아버지 장준이 죽고 형 장중화가 집권하면서 조정이 내분에 빠졌을 때 장옹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으면서(AD363) 공을 세운 유숙과 경을 자로 삼고 모든 권력을 맡기고 주색에 빠져 살았다. 세자 장대회를 폐립하고 첩 소생 장대예를 세웠다.(AD376) 부견은 황음무도한 장천석에게 장안으로 직접 오라는 최후통첩을 내렸다. 만약 거부한다면 즉각 토벌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했다.(AD376년6월) 

 

부견은 13만의 대군을 서쪽으로 보냈다. 사지절 무위장군 구장과 좌장군 모성, 중서령 희그리고 보병교위 요장이 군사를 거느렸다. 그 뒤를 진주자사 구지, 하주자사 이변, 그리고 주자사 왕통이 받혀주었다. 상서랑 수와 염부는 장천석 소환장을 갖고 고장(감숙성 무위)에 도착했다.(AD376년7월) 

 

장천석은 측근들을 모아 놓고 대책을 숙의했다. 부르는 대로 가면 죽을 것이요 안가면 전쟁이었다. 석륵이라는 측근은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큰 뇌물을 주어 사죄하자고 제안했다. 다른 관속들은 동진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하자고 하면서 험난한 지형의 이점을 잘 활용하면서 서쪽으로 서역인을 동원하고 북으로 흉노를 끌어 들이면서 남쪽으로 동진의 지원군이 온다면 못 막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솔깃해진 장천석은 이렇게 외쳤다.

 

“ 짐의 계책은 이제 결정되었다.

  항복을 운운하는 자는 즉시 목을 벨 것이다.“

 

생모 엄씨가 울면서 말렸지만 장천석은 전진의 사신 염부와 수를 활의 과녁으로 삼고 화살로 쏘아 죽였다. 구장의 13만 보병과 기병은 청석진(감숙성 난주 북쪽)에서 황하를 건너 서쪽으로 밀고 들어갔다. 장천석이 마건에게 2만 군사로 최전선을 방어했지만 쉽게 뚫려 항복하고 말았다. 구장의 군대가 가까이 가기도 전에 전량의 자사들은 모두 항복해 버리고 만 것이다. 화가 난 장천석이 정동장군 장거에게 3만 군사를 주어 홍지(난주 북쪽)를 방어하게하고 자신은 5만 군사로 금창성(홍지 북쪽)을 방어했다. 장천석 장군들은 승리 가망이 없다고 보고 서둘러 항복하자고 졸랐다. 전쟁이 될 리가 없었다. 요장의 3천 갑사들이 선봉에 서서 번개처럼 장천석 진영을 찢고 들어왔다. 전량의 군사들은 모두 혼비백산 도망치고 없었다. 장거는 패전하여 전사했다. 장천석은 수천의 패잔기병을 이끌고 서둘러 수도 무위로 돌아갔고 전진의 추격대는 순식간에 쫓아왔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 선 장천석은 8월 27일 흰 수레에 면박여친(손을 등 뒤로 묶은 채 관을 수레에 싣고 나옴. 군주의 전형적 항복표시)하고 군영의 문에서 항복했다. 구장은 면박을 풀어주고 관을 불 태웠으며 장천석을 장안으로 압송했다. 전량의 모든 군현이 항복했다.(ADD376년8월27일) 부견은 장천석을 죽이지 않고 북부상서 귀의후라는 작위를 내렸다. 그리고 장천석의 관리들을 대거 등용하여 조정에 배치했다. 팽화정은 황문시랑이 되었고 소음과 장열은 상서랑이 되었다.       

 

 

(35) 부견의 변경정책 철학(AD377)

 

지난 해 전진이 전량을 멸망시키고 나서 조정에서는 승세를 타고 군사를 몰아 서쪽 변경의저족과 강족으로 토벌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부견은 토벌이 능사가 아니고 교화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그 유목 종족들은 본성이 하나로 통일할 수가 없는 종족이니

  중국에 큰 염려가 될 수가 없다.

  마땅히 잘 어루만지고 타일러야 할 것이다.   

  조세를 잘 걷되 만일 명령을 잘 따르지 않을 때에만 군사로 다스려라.“

 

이런 부견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정중장군 위갈비는 공손하지 않은 저족과 강족 주민들을 죽이고 약탈하면서 위협을 가하였다. 부견은 격노했다. 위갈비를 잡아들이고 채찍 200대를 직접 내려쳤다. 그리고 그 선봉에 있던 지휘관 저안의 목을 베어 저족과 강족 주민들에 보여주면서 잘못을 사과했다. 저족과 강족 주민들은 크게 기뻐하여 공물을 바친 부락이 8만3천 이나 되었다. 전진의 국력이 북중국 전역을 떨치게 되자 AD377년 봄부터 고구려와 신라와 백제가 모두 전진에 사신을 파견하고 공물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갈비 처벌 사건을 보면 당시 부견의 군대에는 이민족에 대한 의심 혹은 홀대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부견이 AD376년 탁발십익건의 대나라를 멸망시킬 때 유주자사 부락과 함께 20만 병주자사 구난과 진군장군 등강과 상서 조천, 그리고 전장군 주융 등을 데리고 갔는데 이 때 요장을 쓰지 않은 이유도 이민족이라서 그런 것인지 모른다.

 

 

(36) 전진의 남침과 요장(AD378-AD379)

 

부견은 동진 조정이 어수선한 틈을 타고 남정을 결정했다.(AD378년2월) 목표는 (호북성 번)이었다. 은 한수를 장악하는 요충지다. 을 장악하면 물길로 내려가 무한을 거쳐 건강(남경)까지 직행 할 수 있다. 부견의 대군은 세 갈래로 나누어 남하했다. 남쪽의 을 향하는 부견의 중군 선봉에는 아들 정남대장군 부비가 섰다. 구장과 모용위가 동행했다. 총 군사는 7만 이었다. 부견의 동군은 모용수와 요장이 이끄는 5만군으로 남향(하남성 석천)에서 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부견의 서군은 구지와 모당과 왕현이 이끄는 4만 대군으로 장강을 끼고 무당(호북성 단강구)에서 을 향해 나아갔다. 총 16만 대군이다. 동진에서는 환충의 7만 군이 송자에 주둔하고 있었고 시평이 1만 뿐이었다. 수적으로 동진은 확실한 열세였다. 환충이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부비도 구장의 권고에 따라 서두르지 않고 장기전으로 갈 생각이었다.

 

전진 조정에서는 부비가 대군을 가지고도 속히 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탄핵해야 한다고 난리였다. 부견조차 전투를 서두르며 말했다.

 

“ 봄까지 함락시키지 못하거든 

  목숨을 끊고 나타나지 마라 !“

 

부비도 당황했다. 부비는 마침내 공격을 개시했다. 부견은 스스로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융에게 군사를 수춘에 모으라고 지시했다. 부융이 부견을 말리며 나섰다.

 

“ 형님, 강남을 얻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넓고 깊게 생각하셔야지

  어찌 그리 조급하게 덤벼드십니까? 

  만약 만 얻을 것이라면 대가가 움직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수후가 구슬로 천길 참새를 쏜다면(隨珠彈雀) 세상이 웃을 일 아니겠습니까?“

 

희도 말리며 나섰다.

 

“ 한광무제가 공손술을 죽였고

  진무(사마염)제가 손호를 사로잡았지만

  두 황제가 손수 6사를 이끌고

  친히 북과 북치는 막대기를 잡고

  돌과 화살을 무릅썼다는 예기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마침내 부견이 친정의 생각을 버렸다. 부비가 훌륭하게 을 함락시켰으니 그럴 필요도 없었다.(AD379년1월-2월) 


(37) 비수대전 패배와 요장(AD382)

 

반란사건이 마무리되자 부견은 부융을 정남대장군으로 내세워 동진 정벌에 착수했다.  부견이 이렇게 말했다.

 

“ 내 30여 년 왕업을 이어받고도 아직

  저 동남쪽 귀퉁이(동진을 폄하하며 지칭)를 교화하지 못하였다.

  대략 계산해보니 전국에서 약 97만을 동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저 귀퉁이를 토벌할까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시오?“

 

비서감 주융이 손뼉치며 호응했다. 

 

“ 만약 동진 주군(효무제 사마요)이 

  손을 뒤로 묶고 옥을 입에 물고 항복해오지 않는다면  

  저들은 모두들 수장되어 물고기 밥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부견이 흡족해 하며 말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바이다.”

 

상서좌복야 권익은 반대하고 나섰다. 부견은 모든 신들에게 의견을 분명하게 말해 보라고 지시했다. 석월은 아직 정벌할 때가 아니라고 말했다 부융도 전쟁이 불가한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하늘의 도에 순응하지 못하는 것,(정당성이 없다는 것)

  둘째, 동진에 아무런 틈새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셋째, 그동안 전쟁이 너무 잦았고 병사들이 적을 두려워 한다는 것.

 

부견의 처 장부인도, 평소에 존경하던 도안스님도 반대했다. 찬반 논란이 끝없이 길어지는 가운데 모용수가 부견에게 조용히 다가가서 말했다.

 

“ 성스러운 마음으로 폐하께서 결정하시면 그것으로 끝나는 일입니다.

  널리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진무제(사마염)가 오나라를 멸망시킬 때 

  오직 장화와 두예 두 사람만 찬성했었습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좇았다면 어느 틈에 출병할 수 있었겠습니까?“ 

 

부견이 크게 기분이 좋아졌다.

 

“ 나와 더불어 세상을 도모할 사람은

  오직 경뿐인 것 같소.“

 

부융이 나서서 말했다.

 

“ 만족할 줄 알면 욕을 입는 일이 없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로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동진은 작지만 우리 융적과는 다른 

  중화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는 나라입니다.

  하늘이 그들의 대통을 절대로 끊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AD383년 정월 전진의 효기장군 여광(3년 뒤 후량을 세움)은 장안을 출발해 황하를 끼고 동쪽으로 내려왔다. 지난 해 서역을 정벌할 때 항복받은 선선왕 휴밀타와 미전도 향도로 자원 동참했다. 5월 동진의 거기장군이자 군사 실권자인 환충은 10만 군사를 이끌고 호북성 송자에서 북으로 올라왔다. 4년 전(AD379년, 위(62) 참조) 빼앗긴 지역을 수복하자는 생각이었다. 유파는 정북진 하여 으로 나아갔고 곽전은 의 배후 단강구를 습격했다. 량은 장강을 거슬러 서쪽 방면으로 부성(사천성 면)을 향했는데 촉지역 전진 군사를 묶어두기 위한 전략이었다. 

 

부견은 8월 2일 부융과 부굉과 모용수에게 25만 군사를 나누어 주고 선봉에 서게 하였다. 요장에게는 용장군의 직책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 옛날 짐이 용장군으로 대업을 이루었소.

  일찍이 남에게 내린 적이 없는 직책이니 분발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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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견은 즉각 정남장군 부예와 관군장군 모용수에게 보기병 5만을 주어 환충의 방면 군사를 막게 하고 사천성 방면에는 요장과 장자를 보내 막았다. 환충의 군대는 면수(한수) 남쪽으로 퇴각했다. 오래 전부터 동진정벌을 꿈꾸며 공격개시 시점을 저울질하던 부견으로서는 환충의 역습이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즉각적으로 전국에 동원령을 발표하였다. 전국 동네마다 장정 10명에 1명을 강제로 차출하였다. 그 중에 20세 이하로 재능과 용맹을 갖춘 자는 황실호위 우림랑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AD383년7월)

 

“ 동진의 사마창명(현재 황제 효무제)은 상서좌복야, 

  사안은 이부상서,

  환충은 시중으로 임명할 것이며

  이들에게 새 저택을 하사할 것이다.“

 

엿새 뒤인 8월 8일 부견도 스스로 60만 보병과 27만 기병을 이끌고 부견이 장안을 출발했다. 전국 각국의 차출군사 수 십 만 또한 동진을 향해 남으로 혹은 동으로 내려왔다. 부융의 30여만 선봉이 9월 제일 먼저 영구(안휘성 영상현)에 도착했다.

 

10월 부융의 군대가 수(안휘성 수현)을 먼저 공격해서 함락시켰다. 모용수는 운성(호북성 안륙)을 함락시켰다. 전진은 동진 대도독 사석에게 서한을 보내 순순한 항복을 권했다. 그 사이에 사현은 유뢰지에게 정예 5천을 보내 부융의 전진 선봉의 오른쪽 배후인 낙간을 기습 공격하고 전진 장군 성을 잡아서 참수하고 전진의 자사 왕현을 생포했다. 이번 전투에서 동진군이 올린 최초의 전과였다.

 

전진의 100만 대군은 비수(안휘성 수현을 오른쪽으로 끼고 도는 강) 서쪽 강변에 진을 쳤다. 동진군은 비수 동쪽에 대치했다. 부견과부융이 수성루에 올라가 동진군대를 보니 대오가 엄격히 정렬되어있고 팔공산 수풀 또한 동진군대로 보였다. 부견이 말했다.

 

“누가 동진군이 약하다고 했느냐?”

 

부견이 낙심하여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쪽 군대 모두 먼저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사현이 부융에게 제안해 왔다. 지구전으로 갈 생각이 아니고 한 판 결전을 붙을 생각이라면 전진군대를 약간 뒤로 물려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렇게 해주면 동진군이 물을 건너서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제안이었다. 많은 전진 장군들은 반대했다. 수적으로 압도적으로 이쪽이 많으므로 저들이야말로 전쟁의 생각이 없을 것인데 물려주면 전쟁하겠다는 것은 반드시 무슨 계략이 숨어있는 증거라는 것이었다. 부견은 생각이 달랐다. 오히려 물을 건너는 그들을 역습하자는 생각이었다. 이 생각 또한 그럴 듯했다. 부융도 동의했다. 마침내 전진의 대군이 약간 뒤로 

로 물러나야 하므로 엄청난 혼란이 수반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라서 모두가 매우 긴장된 상태에서 몸과 무기를 이동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적군이 도착하기 전에 다시 전투태세를 갖추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전진 대군이 혼돈 속에 물러나는 틈을 노리고 동진군이 습격해 왔다. 뒤쪽 어디선가 전진 군대가 패했다는 외침도 들려왔다. 전진군은 더욱 큰 혼란에 빠졌다.     

 

이렇게 외친 사람은 주서(周序)였다. 주서는 동진의 훌륭한 장수요 행정가였다. AD379년 전진이 을 함락시킬 때 어머니 한씨와 함께 끝까지 항거하다가 부비에게 사로 잡혔던 인물이다. 절조를 지킨 것에 감탄한 부견이 전진 조정에서 탁지상서의 직을 수행하다가 이번 동진정벌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동진 쪽에 사신으로 가서 항복을 설득한 사람이 주서였다. 

 

전진의 100만 대군은 참혹하게 붕괴되었다. 넘어진 전우를 수백, 수천의 동료들이 밟고 넘어가면서 전사자는 열에 일곱, 여덟에 달했다. 전진의 모든 병기는 물론 부견이 타던 운모거마저 포획되었다. 부융이 전사했고 부견은 떠도는 화살에 맞아 부상당해 회수 이북을 떠돌다가 주민에게 더운 물에 말은 밥을 얻어먹게 되었다.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비단 열 필과 솜 열 근을 주었으나 그 노인은 사하면서 말했다.

 

“ 폐하께서는 안락함이 싫증나셔서 전쟁을 일으키셨지만

  저희들은 그런 폐하를 아버지처럼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밥을 드리는 데 무슨 보답이 필요합니까?“

   

노인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부견은 통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부인 장씨에게 말했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천하를 다스린단 말인가?”


(38) 모용수의 도망(AD383)

 

전진의 100만 대군은 8할 이상 깨졌지만 3만의 모용수 군대는 거의 다치지 않았다. 먼저 운성(호북성 안륙)을 함락시키느라 직접 비수대전에 참여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 모용보가 모용수에게 간청했다.

 

“ 아직 때가 이르지는 않았으니 뜻을 감추어야 합니다. 

  전진 주군이 패배하여 우리에게 몸을 의탁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우리 연에게 주는 호기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십시오.“

 

모용수는 머뭇거렸다.

 

“ 네 말이 옳다.

  그러나 전진의 주군은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풀지 않았느냐.

  지금 어린 아이 같은 위태로움에 빠져 있는데 어찌 그를 해치겠느냐.

  하늘이 이미 부견을 버린 것 같으니 그가 망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그의 위험을 보호해주어 은덕을 덕으로 보답한 뒤

  틈이 생기는 것을 기다렸다가 도모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묵은 마음을 지니면서 동시에 의로움으로 천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모용수의 모든 부장들은 하나같이 이 기회에 부견을 처치하자고 했지만 모용수는 그에게 입은 깊은 은혜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휘하 3만 군사를 모두 부견에게 돌려보냈다.

 

부견은 흩어 진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장안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모용수는 부견에게 북쪽 유주지역의 흉흉한 인심을 거두기 위해 자신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부견은 좋다고 허락했다. 권익은 기르는 매를 날려 보내는 것과 같으니 안 된다고 했다. 부견이 말했다.

 

“필부도 말을 뒤집지 않는 법이요.

 천명에 흥하고 망하는 뜻이 있다면

 내가 허락하고 안 하고 상관없이 되는 것이요.“  

 

상서좌복야 권익이 말했다.

 

“ 폐하는 사소한 신용을 중히 여기시지만

 사직을 가벼이 여기시는 것입니다.

 신이 보건대 이번에 그가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관동의 혼란이 바로 그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부견은 끝내 3천 군사를 주어 모용수를 가게 했다. 권익은 모용수를 제거하기 위해 하교라는 다리 곁 창고로 몰래 모용수를 불렀다. 모용수는 정동이라는 측근에게 자신의 옷을 입혀 보내고는 그 길로 대나무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다. 정동이 다가오자 권익이 숨겨둔 자객들이 나타났는데 정동은 잽싸게 도망쳐 나왔다. 



(39) 전진의 해체와 열국의 분열(AD384-AD385) 

 

모용수는 안(하남성 안)에 도착했다. 그곳은 부견의 아들 부비가 지키고 있었다. 부비는 모용수를 직접 맞았다. 모용수 참모들은 부비를 잡고 군사를 일으키라고 독촉했으나 모용수는 따르지 않았다. 부비도 모용수를 제거할까 했는데 강이 엄중하게 호위해서 견제하면 될 것을 죽일 것까지는 없다고 말렸다. 모용수는 업성 부근에 사실상 가택 연금되었다.    

 

이 때 적빈이라는 흉노족 잔당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낙을 점령하려 하였다. 부견은 즉시 모용수에게 편지를 보내 적빈을 토벌할 것을 명령하였다. 석월은 부비에게 모용수를 놓아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부비는 모용수가 가까이 있는 것보다는 멀리 있는 것이 더 안전하고 또 모용수나 적빈이나 모두 오랑캐이니 서로 싸움을 붙이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병든 병사 2천과 낡은 갑옷을 주어 모용수를 떠나보냈다. 그리고 부비룡이라는 자를 첩자로 모용수 군대에 심어 두었다. 모용수의 막료 민량과 이비가 부비룡이 자객임을 몰래 알려 주었다. 모용수는 병사의 수가 너무 적어 낙으로 가는 도중에 자원군사를 모집했는데 열흘 동안 8천을 모았다. 그리고 행군 도중에 자객 부비룡을 제거했다. 모용수가 업에서 모용농을 남겨두고 낙을 향해 다시 황하를 건널 때 이미 병력은 3만을 넘었다. 모용농에게 사람을 보내 서로 호응해야 한다고 알려줬다. 모용농은 업을 빠져 나와 도망쳤다.(AD383년12월)

장락공 부비는 모용농이 사라진 것을 알고 나서야 모용수 무리들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40) 모용수의 후연 건국(AD384)

 

을 공격하고 있는 적빈 무리들 안에는 옛 전연의 유민들이 많았다. 모용봉, 왕등, 단연 등과 같은 전연의 유민들은 적빈을 설득하여 모용수 휘하에 들어가기를 종용했다. 적빈도 수락했다. 모용수도 적빈의 무리를 환영했다. AD384년 1월 2일 모용수의 대군이 낙에 당도했다. 그러나 낙을 지키던 부휘는 부비룡을 죽인 모용수를 믿을 수가 없었다. 문을 닫아 걸고 열어주지 않았다. 적빈 무리는 낙을 공격하자고 재촉했다. 모용수는 낙의 지세가 사방으로 트인 곳이라서 함락을 시키더라도 공격을 받기 매우 쉬운 땅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모용수와 적빈의 대군은 다시 머리를 돌려 업으로 향했다. 모용수가 형에 도착했을 때 온 무리들이 모용수를 대도독 연왕으로 추대했다. 후연(AD384-AD409)이 건국된 것이다.

 

모용수의 둘째 아들 모용농은 업을 빠져나와 동생 모용해와 모용소와 함께 주변 지역을 돌면서 군사를 규합했다. 오환의 장, 필홍, 장연, 이백, 곽호 등의  흉노족과 여화 칙발이라는 동이 등 여러 이민족을 모았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전진의 맹장 석월을 격파하고 죽였다. 석월이 죽자 도처에 전진 조정에 대한 반란이 불처럼 일어났다.    

 

연왕 모용수는 정령과 오환의 혼합군 20만 대군으로 업을 공격했으나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업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이었다. 그러나 포위 상태가 8개월에 가까워오자 말먹이와 군량미가 다 떨어져 소나무 껍질로 연명했다. 연왕 모용수가 포위를 풀고 적들이 달아날 공간을 주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용수가 군사를 물려 포위를 풀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비는 성을 버리지 않고 버티었다. 밀사를 보낸 동진 사현의 지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현은 2만 군사와 함께 군량미 2천곡(곡=1석, 열 말)을 장군 유뢰지를 통해 수송해 보내 줬다. 모용수는 다시 업을 포위하고 다만 서쪽을 터줘 도망갈 틈만 만들어 주었다. 모용수는 부견이 AD385년 죽자 AD386년 정월 61세의 나이에 황제에 올랐다. 후연의 창시자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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