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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15 : 3대 인재가 이어진 후진(後秦)을 망가뜨린 요홍(姚泓) (E)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06월18일 16시30분
  • 최종수정 2021년06월04일 13시36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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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27) 요양과 은호의 갈등(AD353)과 전연에 투항(AD354)

 

요양은 이 즈음 역양(안휘성 화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북쪽의 전진과 전연의 세력이 너무 강하여 북벌의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군대를 동원해 농사와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수춘에 주둔하던 은호는 그런 요양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요양의 동생들을 가두고 또 자객을 보내 여런 번 요양을 암살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자객들은 모두 요양을 존경하였으므로 자객을 보낸 사실을 요양에게 알려주고 말았다. 전진에서 투항한 안북장군 위통이 죽고 그의 동생 위경이 우두머리가 되자 은호는 그를 이용하여 요양을 습격하게 했다. 요양은 5천명이나 되는 위통-은호의 무리를 격파하고 군대를 모두 자신의휘하로 흡수해버렸다. (AD353) 은호는 화가 나서 요양을 역양에서 여대(하남의 수양현)로 옮기도록 명령을 내렸다. 두려움을 느낀 요양은 참군 권익을 은호에게 사신으로 보냈다. 

 

은호는 권익에게 이렇게 투덜거렸다.

 

“ 요평북 장군(요양)께서 

  매번 거동하시는 것이 제멋대로라서

  보필하는 도리를 잃은 것 같습니다.“

  

권익이 이렇게 은호를 설득했다.

 

“ 평북장군께서는 영웅의 자태를 가지고 뛰어난 군사력을 지녔지만

  동진황실에 귀부한 것은 바로 조정에 법칙이 서 있고

  훌륭한 재보들이 조정을 떠받들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참소하는 가벼운 말에 흔들려 

  평북장군을 의심하고 계시니 문제의 발단은 평북장군이 아니라 

  이 쪽에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은호가 이렇게 되물었다.

 

“ 그렇다면 어찌 평북장군이 

  내 부하들을 죽이고 

  내 말까지 빼앗을 생각까지 하였단 말이오?”    

 

권익이 답했다.

 

“ 성스러운 동진 조정에 귀부한

  평북장군이 어찌 죄없는 사람을 죽였겠습니까?

  당연히 죽을죄를 지었으니 죽인 것입니다.“

  

은호가 다시 물었다.

 

“ 말을 약탈한 것은 무어라 대답하겠소?”

 

권익이 답변했다.

 

“ 이유 없이 평북장군을 죽이려는 

  장군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을 뿐이니

  진정으로 장군께서 평북장군을 해할 생각이 없다면

  그까짓 말 몇 필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권익의 설득에 은호는 혀를 내둘렀다.

 

“ 어찌하여 오해가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소?”

 

은호와 요양의 오해는 적어도 표면적으로 여기서부터 가라앉았다. 은호는 전진의 중신 양안과 뇌약아에게 사람을 몰래 보내 주군 부건을 암살할 계획을 실행에 옮겼었다. 뇌약아 또한 그리하기로 거짓 약속하였으므로 은호는 은근히 기대를 걸고 있었다.

마침 장우가 부건에 대해 여러 불만이 쌓이자 장안에서 반란을 일으켰고(AD353년 7월) 은호는 자신의 암살계획도 성공했으리라고 믿고 수춘에서 북벌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면서 요양을 선봉으로 삼았다.(AD353년10월) 요양은 은호의 군대가 뒤를 따를 것을 알고 거짓으로 군사를 도망가게 한 다음 매복시켜 두었다. 은호는 요양의 군사가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뒤쫓아 왔다가 매복된 요양군에게 대패하였다. 포로 또는 사상자만 1만 명이 넘었다. 요양은 모든 물자를 수거한 뒤 형 요익에게 산상(안휘성 몽성현)을 지키게 했다. 은호는 초성(안휘성 박현)까지 물러나 주둔했다.

 

 (28) 요양이 전연에 투항

 

은호의 북벌군이 요양에게 패하고 산상지역이 요양에게 떨어지자 동진 조정은 크게 술렁거렸다. 사상을 다시 불러 수도 건강을 방어하게 하고 수비력을 크게 강화했다. 그러나 요양은 동진을 공략할 전혀 생각이 없었다. 동진에게 반란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훈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요양은 영토확장을 위한 침략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군자였다.

 

계속되는 북진전쟁이 성공하지 못하자 동진 조정은 은호에게 책임을 물려 서인으로 실각시킨 뒤 귀양을 보냈다. 그 배후에는 은호와 경쟁하던 환온이 있었다. 환온과 은호는 젊어서부터 서로 치열하게 경쟁해오던 사이였지만 환온은 은호의 군사능력만은 가볍게 보아왔다. 은호가 폐출된 뒤 한참 지나 환온이 측근 치초에게 이렇게 말했다.

 

“ 은호는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사람이니

  상서령이나 복야를 맡았으면

  조정백관들의 모범이 되었을 것인데

  조정이 그의 재능을 잘못 알아 군사를 맡긴 것이 잘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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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온은 은호에게 편지를 보내 상서령 자리를 맡아 줄 것을 부탁했다. 은호는 기쁜 마음으로 답장을 쓰려했으나 혹시 실수라도 할까봐 몇 번이나 고쳐 쓰기를 수십 차례 반복하다가 엉뚱한 실수로 빈 봉투를 보냈다. 환온이 크게 화가 나 둘 사이의 관계는 끊어졌다. 은호는 귀양지에서 죽었다. 은호가 실각 한 다음 동진의 실권은 완전히 환온이 장악한다. 

 

요양은 AD354년 사자를 보내 전연 모용준에게 투항한다고 했다. 동진 최고의 군권을 쥐고 있는 은호나 환온이 자신에게 나쁜 감정을 갖고 있는 한 동진에서의 요양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양은 부하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북쪽으로 옮겨 허창을 접수한 뒤 낙양부근까지 갔다.(AD355년5월) 낙양은 동진을 배반한 주성(周成)이 장악하고 있었다.  

 

 

(29) 요양의 낙양 공격 실패와 병주(태원) 장악(AD356)

 

요양은 낙양을 포위하고 집요하게 공격해 들어갔지만 좀체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이 때 환온은 강릉으로부터 4만 대군을 이끌고 수륙 양면으로 장안을 향해 북진해 들어오고 있었다. 2년 전 남전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한 전투였다. AD356년 8월 환온의 동진군이 한수를 타고 낙양부근 까지 북상하자 요양은 낙양 포위를 풀고 환온을 막아서면서 말했다.

 

“ 동진의 명령을 엎드려 받고자 하니 

  조금 공간을 물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환온이 대답했다.

 

“ 내가 중원(장안 부근) 땅을 회복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니

  그대 일과는 상관이 없소.

  나에게 할 말이 있으면 직접 오면 되는 일인 것을

  군사를 뒤로 물리고 말고 할 것이 무엇이요?“

 

요양과 환온 군대는 이수(伊水,낙양남부를 북동쪽으로 흘러 황하로 유입되는 강)를 두고 전투를 벌였다. 요양은 대패했다. 요양은 평소 군사들을 매우 잘 대접했으므로 그가 패주하자 처자를 버리고 따라 나선 사람이 5천명이나 되었다고 했다. 환온 군대 안에서는 요양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포로 둥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도 했다.환온에게 투항한 사람은 이렇게 요양을 평가했다.

 

“ 요양의 정신이 맑고 큰 것은

  손책과 비교할 만하고

  영웅적 무예는 그를 뛰어 넘습니다.“ 

 

환온이 다가오자 주성은 낙양성을 들어서 항복했다. 환온은 진서장군 사상을 낙양에 주둔시키고 주성을 잡아가지고 강릉으로 돌아왔다. 요양은 평양(산서성 임분)으로 도망갔다가 전진의 병주자사 윤적이 투항해 옴에 따라 병주(산서성 태원)를 기반으로 삼았다.   

 

 

(30) 요양의 죽음과 요장(AD331-AD393)의 전진 투항(AD357)

 

요양이 관중을 장악하기 위하여 여러 인근 지역 군사를 불러 모았다. 요양을 따르는 가호가 약 5만 이었다. 요양이 태원 방면에서 내려와 황락(섬서성 동천)을 점거하자 전진 주군 부생은 부황미, 부견, 등강 등을 파견하여 1만 5천 보기병으로 맞섰다. 영리한 등강이 성에 웅크리고 나오지 않는 요양을 심리전으로 유인했다. 요양은 환온과 장평에게 거듭 패배했으므로 매우 예민해 있었다. 등강은 그런 심정을 역이용하여 자존심을 건드리면서 약을 올려 전쟁으로 유인했다. 화가 치밀어 오른 요양이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황락 성문을 열고 나왔다. 그럴 줄 알고 있었던 등강은 첫 교전에서 짐짓 패한 척 퇴각하기 시작했다. 요양은 기세를 몰아 삼원(섬서성 삼원)까지 추격했지만 매복된 등강의 보병과 부황미의 지원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요양의 애마 여미과가 쓰러지는 바람에 요양은 사로 잡혀 죽었다. 동생 요장은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부생에게 항복했다.        

 

(31) 부생의 피살과 부견의 등장(AD357년)

 

전진 창업자 부건의 아들 부생은 난폭하여 너무 많은 신하들을 죽였다. 공포에 질린 조정 대신들이 전전긍긍하는 동안 부생의 사촌동생인 부견이 형님 부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부생을 처단하고 정권을 잡았다. 부견이 나이를 들어 양보했지만 결국 부견은 황위에 오르는 대신 정치와 군사권한은 친형 부법이 쥐는 걸로 서로 타협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부견 보다는 부법에게 더 쏠리자 부견의 어머니 구태호가 이위와 함께 부법을 제거해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부견은 전진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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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부견 밑에서의 요장의 무공(AD357-AD384)

 

AD357년 전진의 부견 밑으로 들어간 요장은 약 10여년 자치통감 기록에 나타나지 않다가 AD367년 2월 보국장군이자 부견의 최고참모인 왕맹과 함께 염기를 토벌하는 양무장군으로 다시 역사에 등장한다. 사실 왕맹이 여파루의 추천을 받아 부견에게 등용된 것도 AD357년 이므로 요장이 부견의 수하에 들어간 것과 거의 같은 시점이다. 염기토벌군에 왕맹과 요장이 함께 출정한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사이는 매우 좋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AD367년 이후 부견이 비수대전(AD384)에서 대패할 때까지 17여년 동안 요장은 부견을 위하여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전연이 혼란한 동진조정의 틈을 타 남쪽의 낙양과 허창을 점령하자 전진의 부견도 AD366년 2만 군사를 왕맹과 양안과 요장에게 주어 석천과 남양 방면을 경략하도록 했다. 동진이 전량 장천석에게 사신을 보내 연대를 모색하면서 배후를 공격하도록 공작을 꾸미자 전진의 부견은 한가하게 남쪽을 공략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군사를 되돌려 돌아갔다. 그런 뒤 부견은 서북방 지역을 먼저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그 첫째 목표가 염기였다. 왕맹과 요장과 강형과 소강 등 전진 장수들은 1만 7천의 군사를 이끌고 염기가 있는 약양(감숙성 진안현)으로 진격했다. 원래 염기는 요익중의 휘하였으므로 그의 아들 요장이 온다고 하자 염기의 군사들은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요장에게 투항해버렸다. 염기는 감숙성 남쪽으로 도망갔다. 큰 싸움 없이 전진은 염기군대를 수습했다. 부견은 요장을 농동(섬서성 농현) 태수로 삼았다.

 

부견의 다음 목표는 전연이었다. 동진이 허약한 틈을 타고 야금야금 남침하는 전연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전연은 망할 징조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황제 모용위는 무능하고 정치는 가족혼태후가 농단하고 있었다. 군사를 장악한 대사마 모용평은 겁 많고 용렬하며 허풍에만 익숙해 있었다. 모용위가 전쟁을 독촉하자 노천(산서성 여성현) 방어에만 힘쓰던 모용평이 사신을 왕맹에게 보내 한 판 전쟁을 벌이자고 독촉해 왔다. 왕맹은 등강에 전투를 부탁했다. 등강은 전쟁 조건으로 사예교위를 달라고 했다. 사예교위란 황실과 대신들의 비위를 감찰하는 책임자 자리다.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공직자 비리수사처 같은 자리인 셈이다. 왕맹은 자기 능력 밖의 일이기는 하나 안정태수에 만호후 정도는 최선을 다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시큰둥해진 등강은 물러나 자리에 눕고 일어나지 않았다. 왕맹이 마침내 사예교위를 허락하자 등강은 즉각 군사를 일으켜 전연을 대파시키고 약 5만군사의 목을 베었고 10만 군사의 항복을 받아냈다. 모용평은 노천전투에서 크게 패하자 업성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전진 군사는 노천에서 동쪽으로 100여KM 떨어진 수도 업성을 포위했다. 부견은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함락을 미루고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AD370년 11월 전진의 10만 대군이 업을 둘러싸고 포진했다. 이미 황제 모용위, 태부 모용평, 모용장, 모용연 등 전연의 최고 지도부는 업성을 빠져 나간 뒤였다. 업성을 지키던 전연 산기시랑 여울은 업의 북문을 몰래 열고 전진의 군사를 받아들였다. 11월 10일 부견은 전연의 궁궐로 무혈 입성했다. 부견을 수행한 모용수가 남아있는 전연의 공경대부를 심하게 질책했다. 모용수와 함께 전진으로 망명했던 측근 고필이 다가가 화를 내실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연나라를 시작하는 계기를 준비해야 한다고 몰래 귀띔했다. 십 여년 뒤 전진이 쇠약해지자 모용수는 후연을 건국하는 사람이 된다.

 

전진의 유격장군 곽경은 번개처럼 말을 몰아 도망가던 전연 황제 모용위를 체포해서 업성으로 압송했다. 모용위가 모든 전연 관원을 대동하고 전진에게 무릎 꿇고 항복했다. 전연의 157개 군과 246만호, 그리고 인구 999만이 전진에 항복했다. 북중국의 절반 이상이 전진의영토가 된 것이다. 장천석의 전량이 고장(감숙성 무위)에 있기는 했으나 칭번국이었으므로 사실상의 북중국 통일이나 마찬가지다. 왕맹에게는 사지절, 도독관중육주제군사,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기주목으로 삼아 업에 주둔시키고 모용평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주었다. 등강에게는 사지절, 정로대장군,진정군후 및 안정태수, 양안에게는 박평현후, 그리고 곽경에게는 도독유주제군사를 주었다. 

 

부견은 전연의 관료들을 후히 중용했다. 황제 모용위에게 신흥후라는 작위를 주었고 황보진은 봉거도위, 이홍은 부마도위라는 직책을 주어 등용했다. 모용위는 전연이 멸망하고도 한참 뒤인 AD385년 동생 모용충의 반란에 연루되어 부견에게 죽었다. 전연 지도부를 추격하던 곽경이 용성에 다다랐을 때 모용평은 고구려로 달아났지만 고구려 고국원왕은 모용평을 업성으로 압송시켜 버렸다. 업성에서 장안으로 끌려 온 모용평에게 부견은 급사중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전연 조정에서 간첩으로 오인되어 갇혔던 양침에게는 중서저작랑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부견은 새로 점령한 전연의 국토에 6개 주를 설치하고 통치를 모두 왕맹에게 맡겼다. 서주(안휘성 북부), 청주(산동성), 동주(하북성 중부), 예주(하남성 북부), 연주(산동성 남부) 및 형주(호북성 북부)가 그곳이다. 왕맹은 6주를 총괄하는 것이 거북스러웠다. 권력이 너무 커지면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 중 한 주만 관할하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 달라고 간청했다. 그의 진심이었다. 부견은 이렇게 말했다.

 

“ 무릇 인주는 인재를 구하는데 노력하고

  알맞은 인사를 얻고 나서야 편한 법이요.

  이미 6주를 그대에게 맡겼으니 

  짐은 더 이상 동쪽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소,

  그대를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편하자고 하는 일이요.

  무릇 그대와 같은 사람을 얻는 것이 쉽지도 않고 

  이 땅을 지키는 일 또한 어렵기 그지없소,

  걸맞지 않은 사람이 맡아서 염려거리가 생기면

  어찌 나 혼자만의 걱정이겠소.

  경의 책임 또한 없지 않소.

  상서대와 삼공의 자리를 비워서라도 

  섬성(하남성 섬현. 삼문협 부근)을 기준으로 동과 서로 국토를 나눌 것이요.

  경이 아직 내 뜻을 모르는 것 같은데

  평소의 그대 같지 않은 것이요.

  동방지역이 훌륭히 교화되고 나면 

  마땅히 곤의(제왕의 옷)를 입고 서둘러 서쪽(장안)으로 와야 할 것이요.“

 

부견은 왕맹의 군사 및 행정 능력을 진실로 높이 평가하고 있음이 여기에 잘 드러난다. 

 

 

(33) 부견의 남정과 요장 : 양주(梁州) 익주(益州) 점령(AD373년11월)

 

동쪽 전연이 전진에 함락되자 부견은 남서쪽 익주(사천성)와 량주(섬서성 남서부 한중)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이 땅은 모두 동진의 영토였지만 동진 조정에서는 간문제가 사망하고(AD372) 막강한 실력자 환온이 정권을 휘두르면서 조정 내분이 극도에 달하고 있었다. 부견은 왕통과 주융에게 2만 군사를 주어 양주로 보냈고 모당과 서성에게 3만 군대를 주어 사천성 검각 방면으로 보냈다. 동진의 양주자사 양량이 1만 군사로 대항했지만 청곡(선서성 양현)에서 대패하였다. 한중과 검각이 쉽게 함락되자 전진 조정은 양안을 익주목으로 성도(사천성 성도)에 진수시키고 모당은 양주자사로 한중에 진수시켰으며 요장은 영주자사로 임명하여 점강(사천성 합천)에 주둔 시켰다. 이로써 전진의 영토는 지금의 사천성 북부 일대와 섬서성 남부까지 확장된 셈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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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06월18일 16시30분
  • 최종수정 2021년06월04일 13시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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