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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3 : 능력없이 쿠테타 일으켰다 망한 후량(後涼)의 여륭 여초 형제(H,끝)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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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03월05일 16시5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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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47) 후진-북위의 전투 : 시벽(柴壁)의 전투(AD402)

 

 AD402년 봄 요흥은 의양공 요평과 상서우복야 적백지를 보기병 군사 4만과 함께 보내 북위 정벌하도록 했다. 요흥 자신 또한 군사를 이끌고 선봉장의 뒤를 이었다. 몰혁간 군사는 천수에 주둔하고 요흠은 낙양에 진을 치며 만일에 대비했고 태자 요홍과 상서령 요황은 수도 장안을 지켰다. 북위 또한 전쟁을 꾸준히 준비해 온 터라 즉각적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북위의 선봉에는 비릉왕 탁발순과 예주자사 장손비가 6만 기병을 앞세워 진격했고 주군 탁발규는 더 많은 대군을 거느리고 탁발순의 뒤를 받쳐 주었다.

 

북위의 대군이 영안(산서성 곽주)에 도착할 무렵 후진의 선봉장 요평은 2백 기병을 보내 북위군을 직접 염탐하다가 전원이 사로잡혔다. 요평은 물러나 시벽(산서성 임분 서남)에 웅거하였다. 탁발규는 곧바로 추격하여 시벽의 요평 후진군을 포위했다.(AD402년8월9일) 요흥은 요평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4만 7천의 군사를 급히 보내왔다. 요흥의 계획은 임분의 동쪽 천도를 먼저 장악하므로써 포위를 펼친 북위군의 배후를 위협하자는 전략이었다.     

북위군은 이미 그 곳의 지형을 철저히 파악하여 요흥 군이 어디로 어떻게 올지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요흥 또한 북위군의 위세에 눌려 주춤주춤하면서 느릿느릿 북상했으므로 그만큼 북위군에게 대비할 시간을 벌어 주었다. 8월 28일 북위 탁발규는 3만 기병을 직접 인솔하고 좁은 협곡을 북상하는 후진군을 기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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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 지형은 양쪽으로 길게 산맥이 뻗어 있어서 매복습격에 매우 취약한 지형이었다. 후진군은 몽갱(산서성 양분) 남쪽에서 북위군에게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요흥은 후퇴했고 요평은 시벽에 갇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 두 달이나 갇혀 양식과 화살이 다 떨어진 요평은 10월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뚫으려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전 장수들이 분수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탁발규는 수영을 잘하는 사람을 시켜 쇠갈고리로 자살하려는 장수를 건지려 했으나 대부분 익사하고 말았다. 탁발규가 사로잡은 후진군 포로만 2만여 명 이었다. 요평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은 요흥과 그 군사들의 통곡 소리가 산과 골짜기를 흔들 정도였다. 요흥은 탁발규에게 화친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다른 일이 없었다면 탁발규는 군사를 몰아 장안으로 들어 왔을 것이다. 그러나 북위의 배후에 있던 유연이 북위를 공격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위험을 느낀 탁발규는 서둘러 군사를 수습하여 돌아갔다. 

 

(48) 후량의 마지막 항거 투쟁(AD401)

 

여륭이 인질을 보내 후진에게 항복하자 후진 주력부대는 뒤로 물러났다. 후진의 장수 강기의 2천 군대가 무위를 지키고 있었다. 여초가 강기를 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여초는 다시 후진 장수 초랑을 공격하자 초랑은 조카 초숭을 독발이록고에게 인질로 보내고 항복의 뜻을 전달했다. 독발이록고는 독발녹단을 보냈는데 그 즈음에 이미 여초는 퇴각하였고 초랑 또한 변심하여 독발녹단을 영접하지 않았다. 화가 난 독발녹단이 초랑을 공격하려하자 측근  독발구연이 말렸다, 조금 있으면 양식이 떨어진 초랑이 저절로 성을 버리고 나올 것이니 서두를 것 없다는 것이었다. 독발녹단이 그의 예기에 수긍하고 초랑과 연대하기로 했다.

 

여초가 다시 공격해 올 것을 짐작한 독발녹단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습격을 기다렸다가 반격하여 여초의 장수 왕집 군사를 격멸시켰다. 여륭은 여초가 곳곳에서 패하자 독발녹단에게 화평의 뜻을 전달해왔다. 독발녹단은 독발구연을 화평 맹약의 사자로 보냈다. 독발구연은 매복군사가 있을 것으로 의심하고 여륭의 궁성으로 들어가자마자 담벼락을 부수고 들어갔는데 정말로 복병들이 매복하고 있었다. 복병의 습격을 받고 독발구연이 자신의 말과 수하들을 많이 잃었지만 심복부하 곽조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구할 수가 있었다. 

 

독발녹단이 화가 나서 곳곳의 후량의 거점 현미(감숙성 영창현 동쪽)을 공격하여 태수 맹의를 체포했다. 독발녹단이 맹의를 심하게 꾸짖자 맹의가 이렇게 답했다.

 

 “ 저 맹의는 여씨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밝으신 공께서 군사를 일으켜 횃불을 들고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퇴각하고 말았다면 돌아가서 죄를 얻을 것이 두려워 끝까지 싸웠습니다.“

 

독발녹단이 그의 충성심을 보고 예우하여 2천호를 붙여 주고 좌사마에 임명하려 하자 사양하며 말했다.

 

 “ 여씨가 장차 멸망하면 

   독발씨가 조정의 황하 우측(하서지역)을 점령할 것입니다.

   저같이 능력 없는 자가 현미성을 감당하지도 못했는데

   다시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된다면 마음히 편치 않을 것입니다.

   만약 밝으신 공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서 

   고장(감숙성 무위, 후량의 도읍)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거기서 주륙되더라도 깨끗한 명예는 썩지 않을 것입니다.“ 

 

독발녹단은 그의 충성심과 공명심에 크게 감동을 받아 그의 소망대로 고장으로 돌려보냈다.

 

 

(49) 후량 수도 고장의 최후(AD402)

 

비록 후진 군사들은 물러갔지만 고장의 형편은 극도로 나빴다. 큰 기근이 들어서 쌀 한말 가격이 5천전이었고 사람이 서로 잡아먹었으며 굶어 죽은 사람만도 10여만 명이나 되었다. 성문을 낮에도 닫았으므로 나무하는 길이 끊겼고 굶다 못해 몰래 성 밖으로 도망가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백 명이나 되었다. 여륭은 그런 사람 도망자들을 잡아서는 파묻어 죽였는데 길에는 버려진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북량의 저거몽손이 군사를 이끌고 고장을 공격하니 여륭은 급히 독발이록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독발이록고는 기병 1만 명을 동생 독발녹단에게 주어 파견했는데 여륭이 지원군이 오기도 전에 저거몽손의 군대를 이길 수가 있었다. 패전한 저거몽손이 여륭에게 쌀 1만 여곡을 주고 화해를 요청했으므로 여륭은 얼른 그 제의를 받고 화전했다. 여륭이 이미 전쟁을 끝냈다고 하자 독발녹단은 중산기상시 장융의 제안을 받아들여 위안을 점거하고서 후진과 내통하는 초랑을 토벌했다. 초랑은 독발녹단의 대군에 항거할 기력이 없자 면박하고 투항했다. 독발녹단은 그를 용서하고 수도 서녕으로 송환했다.  

 

 

(50) 독발이록고 죽음과 동생 독발녹단에게 위임(AD402)

 

남량의 2대 군주 독발이록고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국가의 모든 권세를 동생 독발녹단에게 위임했다. 원래 그들의 아버지 남량의 창업주 독발사복건이 독발녹단을 매우 아껴서 이렇게 말했다.

 

 “ 독발녹단의 식견과 지략은 너희들이 따라갈 바가 아니다.” 

  

이 말을 깊이 새긴 독발이록고의 여러 형제들은 큰 형 독발이록고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도 이미 팔짱만 낀 채 모든 국사를 독발녹단에게 맡겼었다. 이제 독발이록고가 죽자 아무런 이의 없이 독발녹단을 후계자로 옹립하고 남량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서진이 AD400년 1차로 멸망하고(걸복건귀 아들 걸복치반이 AD409년 다시 서진을 건국했다가 AD431년 그의 아들 걸복모말 때 2차로 멸망함) 서녕에 인질로 와있던 걸복치반이 도망가자 독발녹단은 그의 처자를 모두 돌려보내주었다. 걸복건귀는 돌아온 아들 걸복치반을 후진에게 보냈다. 주군 요흥은 그를 흥진(감숙성 임하현)태수로 삼았다.(AD402) 독발녹단은 끊임없이 여륭의 고장을 공략했지만 떨어뜨리지는 못했다.

 

 

(51) 여륭이 후진에 항복 후량멸망(AD403)

 

다음해 AD403년 남량의 독발녹단과 북량의 주군 저거몽손이 고장의 여륭을 집요하게 공격해 들어왔다. 북량이나 후진이나 남량 모두에게 고장은 전략적 요충지였으므로 먼저 점령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곳이다. 여륭은 걱정에 가득찼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던 후진의 한 지략가가 요흥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 여륭은 조상들의 덕을 입어서 전략적 요충지 고장을 겨우 지키고 있습니다.

    곡식이 크게 부족하여 백성들이 거의 굶고 있지만 

    스스로 지켜내는 것을 보면 앞으로 다시 풍요로워지고 부흥하게 되면 

    결코 우리 땅이라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여기서 가는 길이 멀어도 

    비옥한 양주 땅을 지금 빼앗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요흥이 사신을 보내 여초를 조정에 들어오라고 했다. 여륭은 끝내 강토를 지키지 못할 것으로 여겨 후진조정이 자신을 영접하게 해 줄 것을 들어가는 동생 여초에게 부탁하도록 했다. 요흥이 그 제안을 수락했다. 상서좌복야 제난과 진서장군 요힐과 좌현왕 걸복건귀와 진원장군 조요를 보내 보기병 4만 명을 이끌고 하서에서 여륭을 맞이했다. 남량왕 독발녹단은 창송(감숙성 무위시 남쪽)과 위안(감숙성 고랑현 동쪽)에 수비대를 보내 후진의 군대를 경계하도록 했다.

 

8월 여름 후진의 제난이 고장에 도착하자 여륭은 소거백마(素車白馬)로 길옆에서 이들을 맞이했다. 항복하는 여륭이 강하게 독촉하자 상서좌복야 제난이 고장을 괴롭히던 저거몽손을 공격했다. 저거몽손은 장막해를 보내 후진군을 방어했다. 마침내 북량의 저거몽손과 후진의 제난이 화해맹약을 맺고 저거몽손은 아우 저거나를 후진 조정에 보내 조공을 약속하도록 했다. 제난은 군사 3천명을 사마 왕상에게 배속시켜 고장에 주둔시키고 염송은 창송태수, 곽장은 반화태수로 임명한 다음 여륭의 온가족과 100만 호의 후량 주민을 이끌고 장안으로 들어왔다. 이로써 AD386년 여광에 의해 건국된 후량은 17년 만에 후진에 흡수되면서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요흥은 여륭에게 산기상시, 여초에게 안정태수를 임명하고 여륭의 신하들을 재주에 따라 발탁하여 선임했다.    

 

 

(52) 후량의 건국과 멸망원인

 

저(氐)족의 나라 후량(AD389-AD403)은 여광(AD337-AD400)이 세운 나라다. 여광의 아버지 여파루는 전진의 충신이고 또 부견의 오른팔 왕맹을 추천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여파루와 왕맹이 없었으면 전진의 북중국 통일(AD376)은 불가능하다 할 정도로 전진에 기여를 많이 한 사람이 여파루다. 그러나 여광은 아버지 여파루에게 신뢰를 받지 못했다. 아마도 자신처럼 학문과 덕행을 좋아하기보다는 전쟁놀이만 좋아한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여광은 확실히 무재가 뛰어났다. AD358년 장평과 그 양아들 장자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무적의 장자를 생포한 인물이 여광이었다. 그리고 그의 무재는 부견 때의 여러 부씨들의 반란을 차례로 진압하면서 여실히 드러났다. AD368년의 부씨 형제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AD378년 부중의 반란을 진압한 것이 모두 여광이었다. 반란군에 뺏긴 성도를 AD378년 탈환한 것도 여광이었고 2년 뒤 AD380년 부락의 반란을 진압한 것도 여광이었다. 아마 전진의 부견에게 있어서 여광만큼 많은 공적으로 세우고 또 믿을만한 장수는 따로 없을 것이다. 

 

여광이 후량을 세우게 되는 것은 거의 우연에 가깝다. 북중국을 통일한 전진 부견에게 동진을 공격하는 것은 필생의 대업과제였는데 부견이 동쪽의 동진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후미, 즉 서쪽지역을 틀어막는 일이 필요했다. 부견은 그 일을 여광에게 맡겼다. 여광은 AD383년 도독서역정토제군사가 되어 지금의 감숙성과 청해성과 신강위구르자치구역을 정벌하는 과업을 떠맡게 되었다. 여광이 부견의 명을 받아 AD383년 1월 서역대장정에 나서는 사이에 부견은 동진을 공격할 100만 대군을 비축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양동작전인 셈이었다. 여광이 서쪽을 경략하는 동안 스스로는 동쪽으로 동시에 공격한다는 전략이었다. 그 해 10월 부견은 비수대전에서 처참히 패배했고 그 후유증으로 후진 요장에게 피살되면서 전진의 제국은 급속히 무너져갔다. 

 

당시 서역에 있던 여광은 군사를 이끌고 신속하게 장안으로 들어가 흔들리는 전진을 다시 세울 것인가 아니면 따로 독립할 것인가 망설였다. 성공적으로 서역을 장악한 여광이 사명을 다한 군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돌아가는 동안 전진이 장악했던 일대의 군웅들이 거의 모두 독립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들은 물론 전진에 충성을 바치던 지역 수장들도 돌아오는  여광을 의심에 찬 눈으로 보는 것은 당연했다. 원래 여광이 전진에게 반란을 일으킬 의도는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된다. 다만 충성을 바치던 맹주 부견이 사망하고 종주국 전진이 산산이 부서지자 쓰러지는 국가를 다시 세우기보다는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하여 다른 대안, 즉 독자적인 건국을 하는 것이 더 현명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부견의 밑에 있으면서 호시탐탐 국가재건을 노리던 모용수의 후연(AD384년 건국)이나 요익중의 후진(AD384년 건국)이나 걸복국인의 서진(AD385년) 보다는 늦은 AD386년에야 후량을 건국하는 것을 보면 전진에 대한 충성심이 다른 사람들보다는 깊다고 봐야 할 것이다.      

        

후량왕으로 즉위한 여광은 탁월한 무재를 발휘하여 독립을 노리는 주변 세력들을 착실히 장악해 나갔다. AD386년의 강녕, AD387년의 팽황과 왕목의 반란을 확실히 제압하면서 권력을 공고히 했고 AD394년 남량 독발이록고와 AD395년 걸복건귀를 억누르는데 성공했다.

AD386년 건국하고서 이 때 까지 10년이 아마도 후량의 전성기일 것이다. 서역 전역이 후량의 복속국가로 조공을 바쳤고 영향력 아래에 놓여있게 되므로 후진과 북위에 버금가는 북중국 3대 강국지위를 유지하게 된다.

 

이런 막강한 후량이 무너지는 단초를 제공한 여광이 참소를 믿고서 충신 저거라구 형제를 죽인 일이다(AD397). 충성을 아끼지 않던 저거라구 형제를 죽이게 되자 그의 조카 저거몽손이 분노한 흉노족을 부추겨 강력한 반발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거몽손이 장액지역을 장악하자 그의 사촌 저거남성도 주천에서 군사를 일으키면서 봉기했다. 하서회랑 일대가 후량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후량 몰락의 두 번째 이유는 흉노족 중심으로 후량에 대한 반기가 일어나자 순식간에 다른 지역도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중심에 곽논, 왕상, 양통 양궤와 같은 한족들의 반란이 가세한 것(모두 AD397년)이다. AD398년에는 저거몽손과 단업의 북량, 독발오고의 남량이 급격히 세력을 확장해 가면서 후량의 영토를 침략해 들어 왔다.

 

세 번째 몰락 이유는 여광의 아들들의 반란과 무능력 때문이다.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와중에 여광이 AD400년 죽으면서 세운 여소를 친형 여찬과 여홍이 쿠테타로 죽였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내분에 휩싸이면서 여찬이 여홍을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은 외부 반란을 장악할 생각도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 여찬이 여홍의 반란을 제압하고 혼미한 정치를 거듭하자 사촌동생 여초와 여륭이 반란을 일으켜 여찬을 제거했다. 집권한 여륭은 무능하면서 잔혹하기도 했다. 밖으로는 남량, 북량, 서량이 떨어져 나가는 형국에 안으로는 왕실간의 내분이 격화되는 틈을 강력한 후진이 공격해 들어오자 후량의 여륭은 건국 14년 만에 전 가족과 국민을 들어서 후진 요흥에 투항하고 만 것이다. 여광이 세웠다가 여광이 죽자 흔적 없이 사라진 국가가 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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