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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제정세] ⑫ 유럽 정세와 한-유럽관계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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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01월14일 16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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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세종연구소가 발간하는 [정세와 정책 2020-특집호 제46호]에 실린 것으로 연구소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편집자>

 

코로나 위기의 제2막

 

유럽은 2020년 코로나 위기의 타격을 가장 심각하게 받은 지역 가운데 하나다. 시기적으로 중국에서 발생한 코로나19가 연초부터 제일 먼저 확산된 지역이었으며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봄과 가을의 두 차례 봉쇄 정책으로 결정적인 피해를 입게 된 지역이다. 2020년 유로권의 국내총생산은 7.8% 마이너스 성장할 것으로 유럽연합은 예상하고 있다. 유럽은 서비스업 중심의 경제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나 동아시아에 비해 정보화는 뒤처지기 때문에 봉쇄 정책의 영향이 더욱 심각하게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2021년을 유럽연합은 영국의 공식적 탈퇴가 이뤄졌다. 유럽과 영국의 분열과정을 일단락 하는 가운데 닥친 코로나 위기는 유럽을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뜨린 셈이다. 그럼에도 유럽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지난 7월 대규모 공동 경제회복대책을 도출해 냄으로써 상당한 저력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이 올해 보여준 아이러니는 코로나 위기의 경제적 타격이 전시(戰時)를 방불케 할 정도로 심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통합의 커다란 진전을 이룩했다는 사실이다.

 

2020년 12월 현재 영국과 미국은 이미 코로나 백신 접종을 시작했고 유럽 또한 곧 뒤따를 예정이다. 새해는 이런 점에서 코로나 위기가 제2막에 돌입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마스크와 거리두기와 같은 사회적 미봉책과 질병을 단지 관찰하고 관리하는 수준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역 수단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새해 유럽 정세는 여전히 코로나라는 보건 위기의 포괄적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유럽의 국내정치와 국제정치를 차례로 살펴 본 뒤, 한국과의 관계를 조망해 본다.

 

메르켈의 퇴장과 마크롱의 미래

 

2020년 EU가 공동의 경제회복대책 도출이라는 통합의 커다란 진보를 이룩한 데는 유럽정치의 대모(代母)인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적극적 통합론자인 프랑스 엠마누엘 마크롱 대통령의 지도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유럽 남부를 대변하여 EU가 획기적인 공동 전선을 이룩하지 못한다면 분열이 심화되어 유럽이 해체될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메르켈 총리는 기존 독일의 입장을 획기적으로 전환했다. 그 동안 반대해 왔던 유럽 차원의 공동 채권을 수용함으로서 유럽 재정통합의 초석을 다지는 ‘통 큰’ 양보를 결정했던 것이다.

 

2021년 유럽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일정은 9월에 예정된 독일의 총선이다. 2005년부터 독일을 이끌며 유럽의 대모로 부상한 메르켈 총리는 선거를 계기로 정계에서 물러날 예정이다.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세력은 기독교 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이며, 유럽의회나 독일의회 모두 두 세력이 제일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메르켈이 이끄는 독일의 연정 또한 제1, 2당인 기민당(CDU/CSU)과 사민당(SPD)으로 구성되었다. 문제는 제3당인 극우의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2010년대 급속히 부상하며 정치 체제에 지속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독일을 위한 대안’이 당장 집권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들의 영향력이 커지면 연정 구성 자체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유럽의 핵심 국가 독일의 정치 불안을 초래할 수 있다.

 

프랑스는 독일에 이어 2022년 봄에 대선과 총선을 치르는 일정이라 조금 더 여유를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정치 주기 상 2021년은 마크롱 정부가 장기 목표를 추진하기보다는 코앞에 닥친 선거를 염두에 둔 행보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마크롱 정부는 취임 이후 노란 조끼 사태를 비롯하여 연금개혁이나 치안 관련법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대로 취약해진 상태다. 따라서 새해에 얼마나 강한 의지를 갖고 적극적인 개혁이나 유럽 통합의 정책을 추진할지는 알 수 없다. 물론 국내 정치의 취약성을 유럽이나 국제 차원의 이니셔티브를 통해 보충해 보려는 마크롱의 전략도 예상 가능하다.

 

12월 말 현재까지 진행 중인 유럽연합과 영국의 협상은 여전히 ‘합의 없는 브렉시트’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영국은 2020년 초 유럽연합에서 공식적으로 탈퇴했지만 그 구체적 방안에 대해서는 협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측이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면 2021년 1월 1일부터 유럽과 영국의 관계는 갑작스레 단절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 셈이다. 이 같은 ‘외교적 사고’(事故)는 국제무대에서 유럽의 위상을 격하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규모 경제회복대책 또한 유럽 안에서 지속적인 긴장과 대립을 초래할 것이다. 이미 헝가리나 폴란드와 같은 권위주의적 성향의 비자유적(Illiberal) 회원국들은 비토권을 내세우며 어렵게 마련한 공동대책을 파기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반대편에 선 네덜란드나 스칸디나비아 회원국들 또한 법치주의를 제대로 존중하지 않는 회원국은 지원할 수 없다는 입장을 더욱 강화할 수도 있다. 따라서 새해의 유럽은 여전히 아슬아슬한 균형을 어렵게 유지하며 조금씩 진보하는 모습을 보일 예정이다.


미국과 관계를 복원하고 중국 견제하기

 

2020년 11월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함으로써 유럽은 4년간의 외교적 비상시기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의 입장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70년 이상 미국과 유지해 온 대서양 동맹의 기반을 깨뜨리는 기이한 경험이었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새로운 외교 정책은 두고 봐야겠지만 유럽 같은 전통 동맹과의 관계를 복원하고 강화할 것이라는 예측이 일반적이다.

 

물론 트럼프 행정부의 경험이 연기처럼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과 유럽은 대서양 군사동맹을 복원하겠지만 미국은 예전에 비해 유럽의 재정 기여를 더욱 촉구할 것이고, 유럽은 나름 독자적 군사력의 확보라는 장기적 목표를 잊지 않을 것이다. 또 미국과 유럽은 세계무역기구(WTO)를 재건하는 다자주의적 접근을 중시하겠지만 그렇다고 경제와 금융에서 두 세력의 경쟁 관계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유럽과 미국은 전통적 협력관계의 복원에 힘쓰면서도 트럼프 시기가 부각시킨 경쟁의 차원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유럽과 미국이 협력을 강화할 또 다른 분야는 중국이다. 미국에서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미·중 경쟁 구도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측과 마찬가지로 유럽에서도 중국에 대한 경각심은 2020년대 계속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유럽은 2019년 코로나 사태 이전에 이미 중국을 ‘체계적 경쟁자’(Systemic rival)로 규정한 바 있다. 중국은 여전히 이익의 대립이 미국보다는 덜 가시적인 유럽을 활용하여 서방의 연대를 깨뜨리려 할 것이고, 유럽연합의 다양한 회원국을 이용하여 분열을 초래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중국의 패권적 외교는 오히려 미국과 유럽의 연합전선을 자연스럽게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중국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서방국가는 영국처럼 유럽에서 탈퇴하여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태에 있는 ‘외톨이’일 수 있다.

 

유럽연합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와 터키는 2021년에도 여전히 유럽외교에서 중요한 쟁점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러시아는 전통적 안보의 관점에서 유럽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국가이며 중국과의 연합을 통해 가시적으로 유럽에 위협을 증폭시킬 수 있다. 또한 2020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카라바흐 분쟁이나 시리아 내전에서 볼 수 있듯이 러시아와 터키가 서남아시아 및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유럽을 소외시키는 공동의 영향권을 형성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트럼프 행정부가 파기한 이란의 핵합의의 국제적 재건은 당장 새해의 중요한 쟁점이 될 것이다.

 

한국과 유럽 관계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세계 구도의 핵심 축을 형성하면서 각각 동맹국들을 동원하려는 노력이 2021년의 트렌드라면, 유럽연합은 미국 쪽의 가장 우선적인 동원 대상일 것이다. 한국과 유럽의 관계 또한 이러한 틀 속에서 전망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바이든 행정부 하에서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여기에 유럽이라는 또 다른 행위자를 첨가하면 한국에 가해지는 압력을 한층 심해진다고 볼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대등한 강대국 사이의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서방과 중국’ 사이의 선택으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자유주의 세계질서를 공유하는 서방이냐, 아니면 권위주의와 민족주의의 중국이냐 라는 배타적 선택의 기로에 놓일 가능성이 높다.

 

미국과 유럽이 정치나 사회의 가치를 중심으로 한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한다면 중국은 지정학과 경제를 활용하여 한국을 자신의 슬하에 두려 할 것이다. 한국의 경제는 중국 시장에 이미 심각할 정도로 의존적이며, 지정학적으로 중국은 북한 문제를 활용하여 한국을 움직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유럽의 존재는 한국에서 유용한 외교적 자원이 될 수도 있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 속에서 한국이 한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유럽이라는 비교적 객관적인 제3자에 ‘편승’하여 자율적 목소리를 드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유럽과 기존에 갖고 있는 다양한 채널은 물론 추가로 많은 공동의 제도적 발판을 확보하는 것이 유리하다. 특정 쟁점이 부각될 때 갑자기 입장을 선택하기보다는 기존에 유럽과 탄탄한 공동의 입장이나 원칙을 다져놓을 필요가 있다. 또 공동의 기구나 제도를 통해 입장을 도출해 낸다면 중국의 앞마당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유럽을 지렛대로 이용해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리더로서 앞장서 나가려는 미국과 중국의 경쟁 구도에서 유럽은 한국과 유사한 측면도 많아 활용의 가치가 높다. 유럽의 프랑스와 독일 등의 국가들은 21세기 세계무대에서 한국과 비슷한 규모의 중진국들이다. 과거에 세계 제국을 가졌던 국가들이고 유럽연합이라는 정책 공동체 구성에 성공했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한국보다 강한 목소리를 갖고 있지만 현재의 입장은 매우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특히 영역 별로 협력과 대립의 선택을 조절하면서 복합적 관계를 추구하는데 능란하다. 예를 들어 경제적으로 긴밀하게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인권 문제에 대해 강력하게 지적하고 비판하는 식으로 말이다. 성숙한 국제 관계란 복합적인 영역의 차이와 뉘앙스를 살리면서 유연하고 세밀하게 접근하는 관계일 것이다. 하나의 쟁점을 갖고 모든 사안을 연계하여 전체를 들고 놓거나 감정적 접근을 일삼는 ‘21세기의 중국이라는 과제’를 푸는데 유럽은 한국의 요긴한 모델이자 동반자일 수밖에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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