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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20 : 잔학한 황제로 이어진 북제北齊(H)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02월12일 17시0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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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47> 동위와 서위의 전투 : 제1차 동서위 전쟁(AD537년 1월)

 

고환은 먼저 양나라와 화친을 구축하여 배후걱정을 덜도록 한 다음 고오조를 상락(섬서성 상주시), 두태를 동관으로 보냈다. 자신은 포판(산서성 영제)에 진을 쳤다. 우문태는 광양(섬서성 임동, 장안 동쪽)에 진을 쳤다. 우문태가 제장을 모아놓고 말했다.

 

  ” 고환의 전략은 우리를 삼면으로 묶어 둔 다음에 

    두태가 동관방면으로 강을 건너는 전략이요. 

    선봉 두태군은 강병이지만 연전 승리하여 교만에 빠져 있소.

    지금 저들을 깨부수면 고환의 나머지는 그대로 무너질 것이오.“ 

 

제장들이 걱정하며 말했다.

 

  ” 고환이나 고오조는 가까이 있는데

    멀리 있는 두태를 공격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곤란합니다.

    군사를 나누어 방어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우문태가 자신 있게 말했다.

 

  ” 고환이 공격한다고 한들 우리는 두태를 격파한 뒤 

    패상(장안시 동쪽 패하부근)으로 돌아올 것이므로 문제가 없다.

    그리고 그들은 패상으로 돌아 온 우리를 가볍게 여길 것이므로

    그 틈을 타서 습격하면 반드시 이긴다. 무엇을 걱정하는가.

    5일 안으로 내가 두태를 잡는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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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승 소작이나 중병참군 달해무나 친척 조카 우문심도 같은 생각이었다. 

 

우문태는 군사를 출동하여 두태를 공격했다. 두태는 갑자기 군사가 도착하였다는 소식에 군사를 몰아 강을 건너다가 우문태의 습격을 받고 대패했다. 두태도 자살했다. 고환은 군사를 몰아서 퇴각했다. 고오조는 큰 부상을 입으면서도 상락을 함락시켰지만 고환이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으므로 부상한 몸을 이끌고 업으로 돌아왔다.    

 


<48> 독고신과 양충의 서위 귀환(AD537)

 

독고신(내몽고 출신이므로 흉노계통이거나 선비계통)과 양충은 북위의 하발승 밑에 있던 장수였다. AD534년 황제 원수가 낙양에서 장안으로 몽진 갈 때 단기로 황제를 보필하여 황제를 놀라게 한 사람이다. 하발승 밑에서 형주자사 및 도독삼형주제군사로 형주지역을 장악하는데 큰 공을 세우며 활약하였다. 그러나 동위의 고오조와 후경이 대대적으로 밀려오자 형주를 버리고 양나라로 피신했었다.(AD534년 12월) 독고신은 양나라 황제 소연에게 북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황제가 어디로 갈 것이냐고 묻자 부모님이 산동지방(동위 영역)에 있지만 그래도 신하가 주군을 배반할 수 없다고 장안(서위)으로 가겠다고 했다.  

 

  ” 임금을 섬기는 사람은 부모를 핑계로 

    두 주군을 모실 수는 없습니다.“

 

황제가 의롭게 여기고 예의로 후대하여 보냈다. 서위조정에서는 돌아온 독고신에게 삼형을 토벌한 공로를 인정하여 표기대장군으로 승진시키고 시중 개부의동삼사를 내렸다. 우문태는 양충의 뛰어난 무공을 아껴서 자신의 장하에 남겨두었다. 양충은 수나라 창업자 양견의 아버지다. 

 


<49> 동위와 서위의 전투 : 제2차 동서위 전쟁(AD537년 윤9-11월)

 

연초 서위를 공격했다가 실패한 고환은 AD537년 겨울 20만 대군으로 호구(산서성 길현)로부터 포진(영제)로 직진 남하해 내려왔다. 당시 1만 군사로 항농(삼문협)에 있던 우문태는 일단 관중으로 군사를 물렸다. 고오조는 3만 군사로 하남(낙양 서쪽)을 출발하여 황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나왔다. 그리고 우문태가 떠난 삼문협을 포위했다. 

 

고환의 우장사 설숙은 서위가 가뭄으로 피폐해 있으니 가만 놔둬도 무너질 것이므로 서둘러 황하를 건널 필요가 없다고 했다. 후경 또한 군사를 앞뒤로 나누어 천천히 진군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지난 번 패배를 급히 설욕하고 싶은 고환은 황황히 포진(영제)을 건너 장안 동북쪽 풍익성까지 다가갔지만 함락을 시키지 못하고 낙수를 건너 허원(대려 남쪽)에 진을 쳤다. 서위의 장수들은 겁을 먹고 싸움을 걸기보다는 수비에 치중하자고 건의했다. 

 

우문태는 장안까지 들어오면 민심이 크게 흔들릴 것이고, 그들이 먼 곳을 서둘러 왔으니 분명히 피로에 지쳤을 것이므로 선수를 칠만하다고 판단했다. 군사를 이끌고 사원(대려)부근까지 접근했다. 고환의 군대와는 60여리 거리였다.  다들 공포에 질려있었지만 우문태 조카 우문심은 경축하는 분위기였다. 우문태가 그 이유를 묻자, 출병을 별로 원하지 않는 적들이 너무 깊이 들어왔고, 고환이 지난번 패배에 대해 분개심으로 평정심을 잃고 있으니 한 번 싸움으로 사로잡을 수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우문태는 달해무를 몰래 적진 안으로 들여보내 상황을 염탐하게 했다. 

 

고환은 우문태의 군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앞으로 나갔다.(10월 2일) 우문태는 이필의 권고에 따라 싸우기가 편한 동쪽 10여리의 위곡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위수를 등지고 동서로 대열을 만든 다음 오른쪽은 이필, 왼쪽은 조귀에게 맡겼다. 이들은 강가 갈대숲에 매복하고 동위군이 접근하기를 기다렸다.

 

동위의 장수 곡률강거는 서위의 매복 작전을 알아차리고 우문태와 붙지 말고 정예군을 나누어 먼저 장안을 치자고 건의했지만 고환은 듣지 않고 갈대숲을 태우는 작전을 펼치자고 했다. 곡률강거는 우문태를 사로잡아야 사람들이 믿을 것이므로 화공은 적절치 않다고 반대했다. 고환은 숫자상의 우위를 믿고 강공하기로 결정했다. 

 

동위군이 대오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밀려들자 숨어서 기다리던 서위군은 북소리에 때를 맞추어 분발하여 동위군대를 둘로 가른 다음에 서위 좌우군이 협공하여 대파했다. 이 전쟁을 하곡(河曲)의 전투라고 부른다. 곡률금이 고환에게 후퇴하자고 했지만 고환은 말안장에 앉아 꼼짝 않고 서있었다. 곡률금이 채찍을 들어 고환의 말을 후려치자 말이 움직였으며 밤을 타고 황하를 다시 건너 돌아갔다. 동위군은 8만을 잃었고 무기와 갑옷 18만 점을 버리고 도망갔다. 우문태는 주국대장군을 덧붙여 주었고 승리한 장수 12명에게 작위와 식읍을 늘려주었다.    

 

동위의 장수 후경이 고환에게 2만을 요구하여 승리에 도취된 우문태를 치겠다고 했으나 고환은 우문태를 잡았다 하더라도 후경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부인 누비의 말을 듣고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 고오조도 포위했던 항농을 풀고 낙양으로 돌아갔다.

 

하곡의 전투를 승리한 서위는 독고신에게 2만을 주어 낙양을 점령하게 하고 낙주자사 이현으로 하여금 형주(하남 등주)와 동형주(하남 필양) 방면을 확보하게 했으며 하발승과 이필은 황하를 지키는 보루인 포판을 확보하게 했다. 동진주(포판) 자사 설숭례는 도망가고 그 집안동생 설선주도하여 서위에 항복하였고 영주(하남성 장갈)자사 전흘은 부하 하약통에게 붙잡혀 서위에 인계되었다. 고환이 요웅 등을 보내 영주를 찾고자 했지만 우문태는 대도독 우문귀를 보내 요웅을 격퇴하였다. 이로써 서위의 영토는 낙양과 남양을 잇는 황하 이남지역을 모두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50> 제3차 동서위 전쟁 : 낙양대전 (AD538년 8월)

 

AD538년 7월 동위의 고환은 후경과 고오조에게 대군을 붙여서 독고신이 지키고 있는 낙양을 포위 공격하였다. 급보를 전해들은 우문태는 황제 원보거와 함께 이필을 선봉에 세워 동쪽으로 향했다. 장안은 태자 원흠을 보좌하는 상서좌복야 주혜달에게 맡겼다. 후경이 지휘하는 동위군은 성질이 급한 막다루대문의 어설픈 선공으로 서위의 이필과 달해무에게 크게 패했다. 후경이 달아나던 중에 황하대교에서 우문태와 교전이 일어났다. 우문태의 말이 화살에 맞아 놀라서 도망가는 바람에 우문태가 낙마했다. 동위 군사들이 몰려들자 도독 이목은 우문태를 회초리로 때리면서 두목이 어느 것에 숨었냐고 소리쳤다. 동위군사들은 회초리를 맞는 사람이 우문태라고 생각도 못하고 지나쳤는데 이 때문에 우문태가 살아났다. 도독 이목은 곧바로 자신의 말을 우문태에게 주어 빠져나왔다. 서위군사가 다시 공세를 펼치자 동위군사들은 황하 북쪽으로 도망갔다. 동위의 장수 고오조는 우문태를 가볍게 보고 깊이 들어왔다가 크게 패하여 도망가던 중 남성(하남성 맹현)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평소 고오조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던 장수 고영락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문 밖에서 서성거리다가 서위군사에게 고오조의 목이 날아갔다.

        

몇 몇 전투에서는 서위군이 이겼지만 다른 전투에서는 밀리기도 하면서 전투가 끝이 나지 않았다. 특히 동위의 묵기수락간이 용감하게 황하를 지켰다. 우문태는 군사를 돌려서 서쪽으로 향했다. 항농(삼문협)을 왕사정에 맡기고 장안으로 향했다. 장안에서는 서위군이 패배했다는 헛소문이 돌면서 포로로 잡혀있던 동위 도독 조청작과 우복덕이 사졸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서위 주군과 우문태는 문향(하남성 영보)까지 왔지만 장안의 반란 무리를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통직 산기상시 육통이 장안의 반란 상황을 가볍게 보면 안 되니 서둘러 전진해서 진압하라고 재촉했다. 우문태는 육통의 말을 듣고 곧바로 진군하여 장안으로 나아갔다. 화주자사 우문도가 군사를 이끌고 함양(섬서 경양)으로 들어가 반란괴수 모용사경의 목을 베고 우복덕을 사로잡았다. 우문태는 우문도와 함께 위수를 건너 조청작 무리를 깨뜨렸다. 장안에서 반란 무리와 내통한 태보 양경예도 조청작과 함께 죽였다.

 

고환은 7천 기병을 이끌고 금용성(낙양 궁성) 으로 들어왔다. 성을 지키던 동위의 장손자언은 도망가고 없었다. 고환은 낙양성을 완전히 불 지르고 폐허로 만들었다.(AD538년 8월) 서위에서는 동위 장수 고오조와 두태와 막다루대문의 목을 싸서 업으로 돌려보냈다.(AD538년10월) 그 해 12월 서위에서는 시운보를 보내 낙양을 차지하고 도독 조강은 광주(하남성 노산현)을 뽑았다. 이로써 광주와 양주(하남성 방성현)의 서쪽은 서위의 영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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