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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20: 잔학한 황제로 이어진 북제(北齊)(A)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12월25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12월23일 11시2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4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북제(北齊)는 선비족계통인 문선무제 고양에 의해 AD550년 건국되어 AD577년 멸망한 나라다. 지금의 하북성과 산동성과 요녕성 일대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양의 부친은 고환(AD497-AD547)으로써 북위 말기에 이주영 휘하에서 무공을 드러내어 건국의 뿌리와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북제의 역사는 고환이 활동하던 북위시절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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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위 황제 원각 사망과 태자 원후의 계승(AD515)

 

AD515년 정월 초 10일 북위황제 세종 선무제 원각이 갑자기 발병한지 사흘 만에 죽었다. 나이가 서른 세 살이었다. 시중 최광, 연장군 우충, 첨사 왕현, 중서자 후강 이 네 사람이 여섯 살 태자 원후를 부축하여 황궁으로 들어왔다. 왕현이 날이 밝기를 기다려 즉위식을 올리자고 하자 천자의 자리를 잠시라도 비워 둘 수 없다며 시중 최광이 반대했다. 왕현은 중궁(원각의 부인 고영)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받자고 했다. 최광이 그럴 필요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즉위식을 즉시 올렸다. 당시 조정에서는 황후 고씨가 고구려 계통이라서 무시하고 있었으므로 패싱하자는 것이다. 고황후는 원래 원후의 모후 호씨를 죽일 생각이었는데 그 의도를 알아차린 환관 유등이 급히 후강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후강은 우충에게 보고했다. 우충은 최광과 상의한 끝에 호귀빈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안치하고 삼엄하게 방비하도록 시켰다. 호귀빈은 그 네 사람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2> 고조 피살과 우충의 집권(AD515)

 

당시 사도 고조는 익주정벌을 위해 15만 대군을 이끌고 나갔다가 돌아오고 있었다. 고조라는 사람은 직전 황제 원굉의 부인 고태후의 오빠였고 죽은 황제 원각의 부인 고황후의 삼촌이었으므로 막강한 외척이었다. 그런 고조가 조정으로 들어와 고태후에게 알리지도 않고 원후를 황제로 세웠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난리가 날 것은 분명하고도 남았다.

  

사태를 미리 수습하기 위해 우충은 황족인 고양왕 원옹을 부르고 또 임성왕 원징을 상서령으로 삼아 고조를 견제하는 계획을 세워 고황후에게 칙서를 내리도록 했다. 고양왕 원옹은 탁발굉의 동생이므로 새로 황제가 된 원후에게는 작은 할아버지였고, 원징은 증조할아버지뻘이었다. 시어사 왕현은 죽은 황제 원각에게 총애를 받았으므로 원후가 새 황제가 되어 원옹과 원징과 같은 원로 황족이 입조하면 권력을 잃을 것이 두려웠다. 따라서 우충세력의 뜻대로 고황후의 명령을 고쳐서 고조를 녹상서사, 왕현과 고맹을 시중으로 하는 가짜 인사 조서를 내려 보냈다. 

 

그러나 우충은 황제의 병을 제대로 못 고친 것을 빌미로 시어사 왕현을 가두고 작위와 관직을 박탈하였다. 실컷 우충하자는 대로 해 주었지만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된 것이다. 당시 조정에는 왕현이라는 사람이 또 한 명 더 있었는데 그 사람은 황제를 곁에서 보필하는 어사중위 및 첨사 왕현이었다. 우충은 이름이 비슷한 것을 이용하여 교활한 시어사 왕현을 엮어서 가둔 것이다. 이름이 비슷한 것을 이용하여 왕현을 토사구팽시켜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한 것이다. 사실 왕현은 고조가 돌아오면 마음이 변할 여지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왕현은 억울하다고 외쳤지만 직합장군이 내리 친 칼자루를 맞고 하루 뒤에 감옥에서 죽었다. 

    

위의 새 주군 원후는 고조를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고조는 세상이 뒤바뀐 것을 알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어서 끝없이 눈물만 흘렸다. 2월 8일 상복을 입고 대궐에 들어와 원각의사망에 대해 조의를 표했다. 원옹은 우충과 사전에 짜고서 10여 명의 건장한 무사를 보내 곡을 마친 고조를 끌고 가 목 졸라 죽였다. 그런 다음에 형리를 시켜 고조의 죄상을 고발하도록 하고 고조가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모든 작위를 박탈하여 서인으로 내린 다음 변문을 통해 시체를 꺼내 집으로 돌려보내었다. 우충 일파들은 호귀빈을 황태비로 승격시키고 고황후 고영을 비구니로 만들어 요광사에 거주하도록 했다.(AD515)

 

<3> 호태후의 임조청정과 삼인방

 

AD515년 8월 6일 조정에서는 황제의 생모 호태비를 올려서 황태후로 삼고 우충은 영숭훈위위라는 보안책임자 및 상서령이 되어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유등은 시중 및 승훈태복, 후강은 시중 및 무군장군이 되어 궁중을 실질적으로 장악하였다. 이 세 사람은 유폐된 고태후가 호태후를 죽이려 할 때 호태후를 보호하여 살려 준 사람들이었다. 최광은 거기대장군이 되었다. 청하왕 원역은 태부 및 영태위, 광평왕 원회는 태보 및 영사도, 임성왕 원징은 사공으로 임명했다. 

 

여러 사람들이 어린 황제 대신에 호태후가 임조청정하기를 요청하므로 9월 5일 조정에 직접 나와서 정치를 보살폈다. 우충을 시중 및 영군장군에서 해임하고 상서령직만 주었다. 그런 뒤 며칠 있다가 문하성 시관들을 모두 불러 우충의 능력과 평판을 물었다. 모두가 능력이 모자라 직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자 우충을 기주자사로 내보내고 상서령 자리에 원징을 앉혔다. 원징이 호태후에게 아버지 호국진을 불러서 업무에 참여하도록 권하자 호태후는 그것을 따랐다. 상서 원소와 태부 원역이 우충의 과거 전횡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그해 10월 호태후는 우충을 태사 및 녹상서사로 다시 불러 등용시켰다.

 

<4> 우충의 실각(AD516)

 

북위 감찰총장격인 어사중위 원광이 주문을 올려서 상서령 우충을 탄핵했다. 선무제 원굉이 죽었을 때 그 틈을 타고서 배식과 곽조를 몰아내고 또 여러 황족을 높은 자리에서 쫓아내었으며 조서를 고쳐서 스스로 의동삼사 및 상서령이 되어서 인사를 제멋대로 농단했다는 혐의였다. 호태후는 과거의 공적을 생각하여 더 이상 죄는 묻지 말되 모든 관직을 빼앗으라고 지시했다.      

 

원광은 우림군 사병을 격살한 것을 들추어내 시중 후강도 대벽에 처해야 한다고 했지만 평소에 요리 솜씨가 좋아서 오랫동안 호태후에게 음식을 제공한 공도 있었고 또 호태후를 위기에서 구해 준 공로도 컸으므로 식읍만 300호 깎고 또 황실의 음식 전담직을 해촉하는 것으로 끝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호태후는 우충의 공훈을 살려서 영수현공으로 책봉했고 최광에게는 평은현후라는 작위를 내렸다. 우충은 얼마 있다가 병으로 죽었다.  

 

<5> 환관 유등과 양자 원침(AD518)

 

호태후의 측근 삼인방, 즉 유등, 후강, 우충 중에서 가장 우두머리 격인 우충이 AD518년 3월에 죽자 유등이 그 자리를 메웠다. 유등은 환관으로 글자는 못 읽었지만 머리가 좋아서 교묘한 수법을 잘 만들어냈고 또 호태후의 마음을 잘 읽었다. 호태후가 그의 공을 깊이 인정하였기 때문에 시중 및 우광록대부라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서 돈을 쓰면 그가 하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었다. 

 

하간왕 원침은 원간의 아들로 정주자사로 있으면서 탐욕하고 폭정을 거듭하다가 쫓겨나게 되었다. 원침은 유등의 양자가 되기 위해 거만의 금은보화를 뇌물로 주었다. 유등은 호태후를 설득하여 겸도관상서를 거쳐 원침에게 진주자사가 되게 하였다. 유등이 병이 들자 죽기 전에 원침을 귀하게 만들기 위해 위장군 및 의동삼사를 덧붙여주었다.

 

 

<6> 북위 인재선발의 난맥상(AD519)

 

당시 북위 관원들의 숫자는 이미 넘치도록 많아서 새로 뽑는 자리는 적고 응시하는 사람들은 매우 많았다. 그러나 이부상서 이소가 인재선발을 등한시하여 원성과 물의를 일으키자 최량으로 교체했는데 최량은 인사개혁을 주장하면서도 현명함이나 우매함을 가지고 뽑지 않고 오직 근무연한이나 연공서열로 사람을 뽑았기 때문에 적체되어있던 사람들은 최량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최량의 조카 유경안이 능력과 품성이 아니라 연공서열만으로 사람을 뽑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자 최량은 이렇게 대답했다.

 

  ” 네가 말한 것은 진실로 깊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내가 이번에 내린 서공서열 기준 방침은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즉, 옛 적과 지금은 다른 것이고 

    시대가 바뀌었으니 적절히 시대에 부응해야 하는 법이다. 

    네가 한 말은 옛 법을 가지고 

    적절히 다스리려 하는 것을 비난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설숙도 연공서열로 인재를 선발하는 것을 비판하고 능력과 인품으로 새로운 인재를 뽑자고 건의했지만 다 묵살되었다. 최량에서 이침으로 이부상서가 교체되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사마광은 북위가 사람 뽑는 것을 실패한 것이 최량부터라고 지적하였다.(魏之選擧失人自亮始也) 

 

 

<7> 천문변고가 일어나자 고태후를 독살한 호태후(AD518)

 

그 때 북위 하늘에 천문변고가 나타났다. 호태후는 요광사에 유폐된 고태후(고영, 원각의 부인)가 저주를 내뱉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고태후는 작년(AD515) 호태후를 독살하려다가 들켜서 요광사에 유폐되었었다. 고태후가 갑자기 죽었는데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르지만 그 대 사람들은 호태후가 독살했을 것으로 생각했다.

호태후의 집정이 6년이 되자 황제 원후(당시 열 살)는 호태후의 명령을 령(令)이라하지 말고 격을 높여서 황제 급인 조(詔)라고 하도록 했다. 

 

호태후는 불교에 깊이 심취되었으므로 끝없이 많은 사찰을 지었다. 호태후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고관대작들도 불사를 일으키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므로 전국은 불사로 분주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그로 말미암아 백성의 힘은 고갈되었고 원성은 하늘 높이 찔렀다. 국가의 재정이 점차 고갈되기 시작했고 관리들의 봉록은 다시 줄어들고 백성들의 세금은 높아만 갔다.

임성왕 원징이 표문을 올렸다.  

 

  ”남쪽의 송연이 항상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마땅히 국가가 강성하고 군사가 힘에 넘쳐서 통일의 위업을 달성해야 할 텐데

   최근처럼 공사가 빈번하고 씀씀이가 헤퍼서는 안 됩니다.

   비용을 줄이시고 급한 일에 대비해야 합니다.“

 

당시 학교나 황족회당을 건설하던 인력들은 전부 사찰 건설에 동원되었으므로 학교나 회당건축은 모두 중단된 채로 방치되었다. (AD519)

 

 

<8> 원씨 황족들의 분열대립(AD519) 

 

중위(군사책임자) 원광은 강단 있는 황족이었다. AD507년 탁지상서로 있으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최고 실세 고조를 지록위마의 간신이라고 비판했던 사람이다. 원광은 임성왕 원징과 의견 충돌이 잦아서 원징을 공격하는 주청을 올릴 계획을 짰다. 원징 또한 원광의 잘못을 30여개 들추어서 황제께 주청하여 사형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AD519년 8월 조정에서는 중위 원광에게 사형만은 면제시키고 삭탈 관직하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중위의 업무는 후강이 맡았다. 신웅이 전 황제들이 황족을 용납한 예를 여럿 들면서 사면해 주기를 간청하자 원광을 사면하여 평주자사로 임명해 내보냈다. 호태후는 겸중서사인 양욱을 조용히 불러서 이렇게 부탁했다.

 

  ” 외직에 있는 여러 황족들이 민심에 부합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으면

    경은 그것을 듣고 숨기거나 감추지 마시고 보고 하시오.“

 

양욱은 상주자사 양균이 은식기를 만들고 양주자사 이숭이 수레에 실어서 영군장군 원차에게 보냈다고 말했다. 호태후는 원차 부부를 궁으로 불러서 울면서 질책했다. 원차는 이 일로 양욱을 심히 미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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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유선화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키자 원차는 양욱에게 원한이 있는 친척을 시켜 양욱이 유선화 무리를 숨겨 주었다고 무고하였다. 밤에 군사를 보내 양욱을 잡아 들였는데 양욱은 무고를 한 자신의 친척이 원한을 품은 이유를 낱낱이 호태후에게 말했다. 호태후가 결박을 풀어주고 무고한 친척에게 사형을 내렸다.     

 

 

<9> 원차와 유등의 쿠테타와 호태후 실각(AD519)

 

위의 태부 시중 청하왕 원역은 고조 효문제 원굉의 아들로 풍채가 좋아서 호태후가 가까이 하던 인물이었다. 정무에도 밝고 재주도 많아서 정치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영군장군 원차는 금병을 총괄하는 사람으로 호태후의 신임을 바탕으로 매우 교만하고 방자하였으므로 원역이 어렵게 법으로 제재하고 단속하였다. 원차가 사사건건 개입하고 제지하는 원역을 싫어하는 것이 당연했다. 위장군이며 실세인 유등이 동생을 등용시키려하자 원역이 그것을 막고 주청을 올리지 않자 유등 또한 원역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었다.

 

원차는 원역이 추천한 경박하고 허영심 많은 송유라는 사람을 꾀어서 원역에 대해 무고하도록 사주했다. 즉, 한문수 부자가 반란을 일으켜 원역을 세우려고 했다는 거짓 모의였다. 수사 끝에 원역은 증거가 없어서 풀려났는데 송유는 무고죄에 걸려들었다. 원차가 호태후에게 송유를 죽이지 말자며 이렇게 말했다.

                                                   

   ” 지금 송유를 죽이면 

     앞으로 모반을 고발할 사람이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원차는 이 일 이후로 원역을 더욱 껄끄럽게 생각하고 유등과 손을 잡았다. 중황문 호정을 통하여 황제 원후에게 이렇게 자백하도록 했다.

 

  ” 원역이 저 호정에게 뇌물을 주면서 

    주군을 독살하라 했습니다.

    자기가 황제가 된다면 무슨 소원이든 다 들어준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제 열한 살 황제는 그 말을 믿었다. 원차는 황제와 함께 가면서 유등에게 호태후가 있는 궁(가복전)의 문을 폐쇄하도록 시켰다. 원역이 원차와 마주치자 소리쳤다.

 

  ” 당신이 반역을 하고자 하는 것인가?“

 

원차가 대꾸했다.

 

  ” 반역한 사람을 포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원차가 사람을 시켜서 원역을 붙잡고 가두었다. 유등은 조서를 내려서 백관을 불러 모은 다음에 원역을 대역부도로 몰아갔다. 모든 사람들이 원차를 두려워하여 서명했지만 오직 복야 유조만이 항거하는 말로 옳지 않은 판단이라고 말하고 서명하지 않았다. 유등과 원차는 대신들이 의결한 것을 들고 황제에게 들고 가 결재를 얻었다. 원역을 죽였다. (AD519년 7월 4일) 그리고 자신에게 병이 있어서 모든 정사를 황제에게로 돌린다는 호태후의 조서를 거짓으로 만들어 내렸다. 호태후의 시대가 끝나고 원차와 유등이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호태후는 북궁 선광전에 유폐되었고 열쇠는 오직 유등이 가지고서 최소한의 음식만 허락하였다. 굶주리고 추위를 면하지 못하는 호태후가 말했다.

 

  ” 호랑이를 기르면 씹혀 먹힐 수가 있다더니

    내가 그런 꼴이구나.“ 

 

유등은 황실 원로격인 태사 고양왕 원옹을 앞세워 정사를 오로지 하였지만 실권은 원차와 유등에게 있었다. 원차는 군권을 가지고 밖을 맡고 유등은 황실 안을 장악하였다.  

 

 

<10> 유등의 죽음

 

유등과 원차의 정권장악은 오래가지 않았다. AD523년 3월 유등이 노환으로 죽었다. 61세였다. 양자가 40여 명이었는데 상복을 입고 참여한 자는 100명이 넘었다.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장송에 참여하여 길을 메웠다. 호태후를 유폐시키고 나서 영군장군 원차는 항상 황제의 곁에서 시중을 들었는데 아첨과 교언영색으로 황제의 비위를 잘 맞추었으므로 황제가 그를 깊이 믿게 되었다. 정권을 잡자 그동안의 신중함과 겸손함을 던져 버리고 술과 호색을 즐기면서 탐욕했고 또 뇌물을 받고 인사를 전횡하면서 국가의 기강이 크게 무너졌다. 원차의 아버지 경조왕 원계 또한 아들의 권세를 업고 청탁을 하고 뇌물을 받아 재산을 불렸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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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12월25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12월23일 11시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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