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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2 : 전조(前趙)의 유요(F)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01월08일 16시30분
  • 최종수정 2020년12월04일 15시47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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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유요의 황위 회복(AD318년 12월)

 

상국 유요가 근준의 반란 소식을 듣고 장안에서 수도 임분으로 달려왔다. 석륵도 근준을 토벌하겠다고 5만 명의 군사를 끌고 임분을 향해 동쪽에서 들어왔다. 유요는 적벽(산서성 영제)에 진을 쳤고 석륵은 양릉(하북성 형태) 주둔했다. 태보 호연안이 평양에서 몰래 빠져나와 유요에게 귀부하면서 미리 도망나온 주기와 함께 유요에게 존호(황제칭호)하라고 설득했다. 유요는 황위에 오르면서 근준 일가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 대해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호연안을 사공, 주기를 사도에 임명하고 모든 관원들의 직책을 종전과 같이 회복시켜 주었다. 유요는 정북장군 유아, 진북장군 유책을 분음(산서 영하현) 주둔시켜 장차 있을 토벌을 준비하도록 했다. 

 

석륵이 먼저 근준의 평양(임분)을 공격하고 항복한 주민을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근준은 사람을 석륵에게 보내 화의를 요청했다. 석륵은 근준의 사신 복태를 잡아 유요에게 보냈다.  유요는 복태에게 이렇게 말을 전해달라고 하면서 근준에게 돌려보냈다.  

 

“ 돌아가신 선제(유찬)은 실로 정치를 많이 어지럽혔소.

  사공 근준이 실로 이윤과 곽광과 같은 자리에 있었소.

  그러나 진작에 나를 받아들였으면

   죽기는커녕 모든 국사를 그에게 맡겼을 것이요.

   경은 돌아가서 짐의 이런 뜻을 잘 전해주시오.“

 

복태가 평양으로 돌아 와 이 말을 전했으나 근준은 듣지 않고 오히려 유요의 생모(호씨)와 형을 죽여 버렸다. 근준의 부하들은 전세가 이미 되돌릴 수 없을 정도가 된 것을 알았다. 좌우거기장군 교태와 왕등, 그리고 위장군 근강이 나서서 근준을 죽이고 상서령 근명을 주군으로 삼고서 전국옥새를 복태에게 들려 전조 유요에게 항복했다.(AD318년12월)

 

자신에게 항복하지 않고 유요에게 항복한 것을 알게 된 석륵은 전 군사를 동원해 임분을 공격했다. 석륵의 동생(양형제) 석호도 유주(북경지역), 기주(하북성 형수지역) 군사를 끌고 임분 공격에 동참했다. 다급한 근명은 유요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유요가 지우너군을 임분에 파견했다. 근명은 임분의 군사와 주민 1만 5천을 이끌고 성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달아났다.

 

평양(임분)에 들어 간 석륵 군대는 궁성을 파괴하고 근준이 훼손한 영광릉과 선광릉을 다시 수축하도록 했다. 한의주군 유찬과 죽은 100여 명 신하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른 뒤 수비군을 두고 퇴각했다. (AD318년 12월)    

     

  

<26> 유요가 석륵의 사신 왕수를 죽임(AD319년 3월)

 

석륵은 그 다음해 초(AD319년 2월) 좌장사 왕수를 유요에게 보내 임분성이 완전히 함락되었음을 알렸다. 유요는 석륵의 공을 높이 사서 그에게 태재, 영대장군의 칭호를 내리고 조왕이라는 봉작을 수여하였다. 조(趙)왕을 내린 이유는 석륵이 장악하고 있는 하북성 남부 형태 지역이 옛날 조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수를 따라 온 조평락이라는 사람은 돌아가지 않고 작은 지역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유요에게 이렇게 말했다. 

 

“ 석륵이 왕수를 보낸 진정한 이유는

  전조의 군사와 민심을 몰래 엿보는 것과 

  때를 보아 유요를 암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유요가 그 말을 듣고 격분하여 석륵에게 보내려던 사신 곽사를 도중에서 소환하고 왕수를 저자에서 목을 베었다. 석륵이 그 소식을 듣고 화가 나서 말했다.

 

“ 고(孤)는 유씨를 섬기면서 신하로써의 직분 이상으로 봉사했었다.

  저 사람의 기초는 모두 내가 닦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돌이켜 나를 도모하려 하는구나.

  조의 왕이든 조의 황제든  

  모두 내가 하는 것이지 어찌 남이 시켜줄 것을 기다리겠는가?“

 

본거지 양국(하북성 형태)으로 돌아 온 석륵은 배반한 조평락의 삼족을 이멸시켰다.

 

 

<27> 유요의 전조(前趙) 건국과 칭제(AD319년)

 

장안으로 돌아 온 유요는 곧바로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전조(前趙)를 건국하였다. 신하들의 건의에 다라 국호를 조(趙)라고 했지만 선우족을 조상으로 분명하게 선언했으며 흉노제국의 제1대 가한(황제) 난제묵돌을 하늘에 배향하고 광문황제(유연)을 상제로 배향했다. 유요는 낙양 점령 때 첩으로 삼았던 양헌용을 AD319년 유요가 유찬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자 황후로 승격시켰고 그가 나은 아들 유희(熙)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유연이 AD304년 이석(산서성 여양시 이석구)에서 나라를 건국했을 때에는 나라 이름을 한(漢)이라고 불렀고. 그리고 유요 또한 유연의 먼 친척일 뿐 직계 혈통은 아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유연의 한나라는 유요가 세운 나라 전조와는 다른 나라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유연의 한나라를 유요의 전조와 구분하여 한조(漢趙)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혼란을 줄이기 위해 일관되게 전조라고 불렀다.

 

 

<28> 석륵이 후조(後趙)를 세우다(AD319년11월)

 

하북성 형태를 본거지로 한 석륵은 선비족 추장 일육연을 보내 삭방(산서성 삭주)을 점령시켰고 공장을 보내 유주(하북성 북경지역)의 여러 성을 빼앗았다.  석륵의 군세가 강해지자 동쪽 청주(산동성 청주)지방을 장악하고 있는 조억이 사신을 보내 연대를 제안하므로 이를 수락했다.  

 

국력이 강해지고 또 유요마저 황제를 칭하기로 하자 석륵의 부하들이 황위에 오를 것을 여러 번 재촉했다. 석륵은 매 번 거부했다. 그러나 그 해 겨울이 되면서 수하 장수들의 독촉이 거세지자 석륵은 마침내 대장군, 대선우, 영기주목 및 조왕이라고 호칭할 것을 허락하고 자신의 영역을 조나라(趙國)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같은 해 유요가 세운 조나라, 즉 전조(前趙)와 구분하기 위해 석륵의 조나라를 후조(後趙)라고 부른다. 후조의 도읍지는 양국(襄國, 하북성 형태)이었다.                                                    


<29> 충신 유자원의 설득에 귀 기우린 유요(AD320년)

 

전조의 지방장수 해호와 윤차가 파(파,지금의 중경)지역 토호 구서와 사팽 등과 연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사건이 발각되어 해호와 윤차는 모두 죽었고 구서 등 연루자 50여 명을 옥에 가두었다. 이들을 장차 죽일 참이었는데 광록대부 유자원이 나서서 번대했다.

 

“ 성스러운 왕은 형벌을 내릴 때

  오직 으뜸가는 악한사람을 죽일 뿐입니다.

  많이 죽여서는 안 됩니다.“

   

머리를 땅에 대고 간곡하게 청원을 하는 바람에 유자원의 이마에는 피가 흘렀다. 유요는 유자원이 반란 세력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유자원을 투옥했다. 계획대로 구서와 사팽 무리를 효수하고 10일 동안 내버려 둔 다음에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유요의 잔학함에 분노한 파(巴)지역 사람들이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 추장 구거지를 옹립하여 주군으로 삼고 국호를 대진(大秦)이라 했으며 유요의 조를 평정한다는 뜻에서 연호마저 평조(平趙)라고 불렀다. 

 

유요는 반항하는 파지역에 대해 강공책을 쓸 생각이었다. 감옥에 있던 유자원은 황제에게 편지를 썼다.  

 

“ 폐하께서 진실로 제 계책을 쓰시면 

  한 달이면 안정됩니다.

  대가(황제)게서 손수 군대를 이끌고 정벌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요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그를 불러내어 그 계책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유자원의 계책은 이러했다.

 

“ 저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큰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페하께서 잔혹하게 죽음을 내리시니 겁이 나서 반항하는 것입니다.

  일단 대사면령을 내리셔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과거 생업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장해 주십시오.

  그러고도 수그러들지 않고 반항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제가 5천의 군사를 가지고 발본색원하겠습니다.

  만약 군사의 힘만으로 산골짜기를 까맣게 덮고 있는 저들을 굴복시키려고 하신다면

  아마 하늘같은 위력을 가지고도 오랫동안

  정복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

 

유요가 그의 말을 믿고 대사면령을 내리고 유자원을 거기장군 및 도독옹진정토제군사로 임명하였다. 유자원이 옹성(섬서성 봉상현)에 도착할 즈음 항복한 자들은 10만 명을 넘어섰고 안정에 진을 칠 때가 되자 거의 모든 반란군이 유자원에게 항복했다. 유요는 유자원의 능력을 감탄했다.  

 

<30> 유요의 충신 교예와 화포(AD320)

 

시중 교예와 화포가 상소문을 올려 간언했다.

 

“ 지금 조서를 받들고 풍명관을 짓고 있는데 들으니

  모든 백성들이 그것의 사치함을 비난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이 건물 하나 짓는 돈이면 양주(凉州)를 전부 평정하고도 남을 돈이다.’

  또 지금 아방궁을 모방하여 서궁을 짓고

  경대를 흉내 내 능소대를 짓고 있으니

  그 비용은 풍명대 보다 더 들것이므로

  그 돈이면 오와 촉을 병합할 수 있고 

  제와 위를 합칠 수가 있는 돈입니다.

  또 수릉(壽陵)을 건축하는데 주위를 40리로 만들고 

  깊이를 35장이나 판다는데

  이 비용이라면 아마 국내 돈으로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

  진시황 무덤을 건축하느라고 삼천을 막았지만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진이 망하고 능리 파헤쳐지지 않았습니까.

  예로부터 망하지 않은 나라와 파헤쳐지지 않은 무덤이란 없습니다.

  그래서 성스러운 임금은 검소하게 장사를 치러 

  먼 장래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몸소 행동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중흥하는 나라를 다시 망하는 길로 인도하시려 합니까? “

 

유요는 감격했다. 조서를 내려서 이렇게 명령했다.

 

“ 두 분 시중의 말이 이토록 간곡하니

  옛 충신의 기풍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사직을 지키는 정신이 살아있구나.

  궁실 건축을 즉각 중단하고

  수릉건축도 최대한 축소하여 한문제 유항의 패릉과 같이 검소하게 하라.

  교예는 안창자, 화포는 평여자로 책봉하여 

  나란히 간의대부의 직책을 수여하니  

  천하에 선포하여 우리 전조 조정은 

  허물을 즐거이 듣는 다는 것을 알게 하라.“ 

 

 

<31> 유요의 태자 책봉(AD323)

 

유요의 큰 아들은 유검(儉)이고 둘째는 유윤(胤)이다. 유윤은 열 살 때 이미 키가 7척이 넘었다고 했다. 그런 그가 비상하다고 생각한 유총은 예전에 유요의 후계 자리를 유윤에게 물려주라고 했다. 그 때 유요가 유총에게 말했다.

 

“ 번국의 후계란 제사만 잘 지내면 됩니다.

  장유유서의 질서를 어지럽힐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유총은 유윤에게 유요의 나라를 계승하도록 명령했다. 근준의 반란(AD318년)이 일어났을 때 유윤은 흉노족에 인질로 사로잡혀 있었는데 유요가 황위에 오르게 되자 풀려나오게 되었다. 이미 태자로 책봉된 유희와 아버지에게 돌아온 유윤을 두고 태자계승의 문제가 불거졌다. 유요는 유윤으로 바꾸고 싶었다. 유윤이 장성하기도 했고 무예도 깊었던 반면 유희는 나이도 어리고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태부 호연안 등 모두가 유윤으로의 교체에 찬성이었다. 좌광록대부 복태와 태자태보 한광이 반대했다. 태자가 효성스럽고 우애가 깊고 어질므로 폐위할 명분이 없다는 것이 요지였다. 유요가 어찌 할 바를 몰라 우물거리고 잇을 때 당사자 유윤이 나서서 말했다. 

 

“ 아버지께서 여러 아들을 사랑하심은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갑자기 유희를 폐출하고 신을 세우신다면

  신이 어찌 마음 편하겠습니까.

  폐하께서 생각하시기에 신이 국사를 감내할 수 있다고 판단하신다면

  어찌 저로 하여금 유희를 도와서 대업을 충실히 계승하도록 해 주지 않으십니까?  

  반드시 저로 대통을 이으라고 하시면

  여기서 목숨을 바칠지언정 폐하의 명령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유윤은 목을 놓아 울었다. 유요는 물론 온 조정이 유윤의 충성과 우애에 감동했다. 유요는 유윤의 생모인 죽은 복씨의 시호를 원도황후로 올리고 유윤에게는 영안왕, 시중 및 도독이궁금위제군사의 직책을 수여했다. 유요와 유희의 두 궁을 호위하는 최고 책임자 자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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