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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2 : 전조(前趙)의 유요(E)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01월01일 16시30분
  • 최종수정 2020년12월04일 15시47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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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서진을 멸망시킨 유요 멸망(AD316)

 

AD316년 서진의 국토는 장안 중심지역으로 쪼그라 들어있었다. 그 북쪽 경계가 북지(지금의 섬서성 동천시 요주구) 였는데 전조의 대사마 유요가 북지를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했다.서진 조정에서는 대도독 국윤과 3만 군사를 보내 북지를 구원하도록 했다. 유요는 첩자를 국윤에게 몰래 침투시켜 이렇게 말하도록 했다.

 

“이미 북지는 함락되었습니다.

 가 보셔야 가시기도 전에 유요의 대군에게 패퇴할 것입니다.“

 

국윤과 그의 군사는 싸워보기도 전에 사기를 잃고 말았다. 비록 국윤이 후한 대우와 높은 관작으로 서진 영역의 태수와 지방 군사지도자를 회유했지만 그럴수록 그들은 교만하고 방자하게 굴 뿐 민심과는 동떨어진 행동으로 민심을 잃게 만들었다. 장안지역(이를 관중지역이라고 부름)의 군사사기가 떨어지자 국윤은 조정에 추가적인 지원을 요청했지만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초숭은 국윤을 질시하여 더 곤궁한 상태로 빠진 다음에 지원군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는 사이에 유요의 군대는 재빨리 남하하여 위수 이북의 모든 성을 함락시키고 드디어 위수까지 내려왔다. 위수는 장안 바로 북쪽을 흐르는 강이다. 유요는 서진의 장수 노충, 양위, 보양을 사로잡았다. 건위장군 노충은 똑똑하고 용기가 뛰어나다는 소문이 있어서 산 채로 잡아오라고 명을 내렸던 사람이다. 유요가 노충에게 말했다.

 

“ 내가 그대를 얻었으니 

  이제 천하를 평정한다는 말을 할 것도 없겠소.“

 

노충이 진지하게 말했다.

 

“ 내 자신은 서진의 장수입니다.  

  나라가 패망해 가는데 감히 살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공께서 제게 은덕을 베풀어 주실 수 있다면

  빨리 죽음으로써 나라와 선조에게 은혜를 갚도록 해 주십시오.“

 

유요는 크게 감명을 받고 자신의 보검을 내려 스스로 선택하도록 해 주었다. 포로로 잡힌 산기상시 양위의 처 신(辛)씨는 미모가 매우 뛰어났다. 유요가 신씨를 불러 처로 삼으려 하자 신씨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첩의 지아비는 이미 죽었습니다.

  의로 보아서 혼자 살수는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 여자가 두 지아비를 섬긴다면 

  밝으신 공께서 어찌 그런 여자를 곁에 두실 수 있겠습니까?“

        

유요는 신씨의 말을 고상히 여겨 조용히 자결하도록 허락했다. 유요는 장안을 포위하고 압박하였다.(AD316년 8월) 안팎으로 단절된 장안 성안에서 국윤과 삭침이 필사적으로 방어하였다. 식량이 모자라 서로 사람을 잡아먹어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고 쌀 한말은 금2냥으로 값이 올랐다. 석 달을 버티어 11월이 되었다. 서진 황제 사마업이 국윤에게 말했다.

 

“ 지금 어려움이 저러니

  수치를 무릅쓰고 나가 항복하여

  병사들과 백성의 목숨을 살려야겠소.“   

 

울면서 사마요가 탄식했다.

 

“내 일을 저렇게 그르친 것은 국윤과 삭침 두 사람이다.”

 

사마업은 시중 종창에게 항복하는 편지를 써서 유요에게 보냈다. 삭침은 중도에서 종창편지를 가로채고 대신 자신의 아들을 유요에게 보내 말하도록 했다.

 

“ 지금 성 안에는 일 년치 양식이 있소.

  만약 삭침에게 의동삼사 및 만호군공이라는 직책을 주신다면

  바로 항복하겠습니다.“

 

유요가 삭침 아들의 목을 베고 말했다.

 

“ 군대는 의(義)를 가지고 말해야 한다.

  본인이 군사를 거느린 지 15년이 되었지만

  아직 속이는 계책으로 다른 사람을 이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반드시 적을 궁색한 지경까지 몰고 가 최후의 형세가 되게 한 뒤 함락시킬 것이다.  

  천하의 죄악이란 삭침이 하는 짓과 같이 속이는 것이다. 

  사자의 말대로 식량이 버틸 수 있다면 끝까지 버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천명을 받으면 될 것이다.“

 

서진 시중 종창이 유요의 진영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인 11월 10일이었다. 다음 날 황제 사마업은 입에 구슬을 물고(전통적인 항복의식) 양이 끄는 수레를 타고 어깨의 반을 맨살로 드러낸 뒤 장안 동문을 나와 항복했다. 여러 서진 신료들은  자살을 택했다. 유요는 수레를 불에 태우고 구슬을 받으며 (항복을 받아들인다는 의식) 종창에게 사마업을 모시고 궁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틀 뒤 유요는 사마업과 모든 서진 신료들을 자신의 군영으로 불러들인 뒤(13일) 모두 수도 평양으로 압송하였다.(17일) 이로써 AD265년 사마염에 의해 세워진 서진은 정확히 51년 만인 AD316년 11월 손자 사마업에 와서 전조의 유요에게 멸망당했다. 유총은 압송된 사마업에게 광록대부 및 회안후라는 작위를 수여했지만 2년 뒤 유찬의 권고에 의해 유총은 사마업을 죽였다. 죽을 당시 그의 나이 18살이었다. 역사에서는 그를 서진의 마지막 황제 민(愍)제라고 부른다.                          

 


<22> 유총의 왕침의 양녀 간택과 왕감의 충간과 죽음(AD318년 4월)

 

유총의 정비 황후는 상황후 번씨, 좌황후 유씨, 그리고 우황후 근씨의 세 명이었다. 그 외에도 귀인, 귀빈, 부인 등 황후의 인새를 지닌 여인은 7명이나 더 있었다. 근씨가 죽자 유총은 생모 장태후의 시녀였던 번씨 성을 가진 여자를 근화후 대신 들였다. 대장군 유부가 나서서 반대했지만 소용없었다. 유부는 걱정과 화를 못 이기고 죽었다.(AD316년) 당시 최고실력자 중상시 왕침에게 매우 미모가 뛰어난 양녀가 있었다. 유총은 왕침의 양녀를 좌황후로 들였다.(AD318년 4월)

 

상서령 왕감과 중서감 최의지 중서령 조순 등 조정대신들이 유총의 조치를 말리고 나섰다.

 

“ 신이 듣기로 제왕의 황후란

  덕행이 건곤에 비할 정도여서 

  살아서는 종묘를 잇고 죽은 다음에는 후토에 배향되는 것이니

  반드시 대대로 덕과 명망이 있는 집안에서 자란 요조숙녀를 선택하는 법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해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하고

  하늘의 기운에 화답하는 것입니다.

  효성제(전한 유오 재위 : BC33-BC7)의 조비연 때문에 

  후계가 끊어지고 사직이 빈 터로 남지 않았습니까.

  왕침의 조카딸이라고는 하지만

  보잘 것 없는 환관 가족의 딸이고

  또 태후 장씨의 몸종 출신인데   

  황후의 초방(椒房, 황후가 사는 향기나는 방)을 더럽힐 것은 분명하고

  다른 비빈들은 모두 공경대신의 가족이니

  어찌 하루아침에 비녀를 비빈의 윗자리에 두신단 말입니까?  

  신들은 아마도 국가의 복이 되지 않을까 매우 두렵습니다.“

 

유총은 격노했다. 중상시 선회를 유찬에게 보내 명령했다.

 

“ 왕감 등 보잘 것 없는 놈들이

  미친 말로 거칠게 내게 항의를 하여 나를 모욕하여

  군신의 예를 벗어났으니

  당장 군사를 보내 수사하여 보고하라.“

황제의 명령에 다라 왕감 등을 모두 가두었다가 저자에서 효시하였다. 왕침이 죽음을 앞둔 왕감 등에게 다가가서 지팡이로 그들을 치면서 말했다.

 

“ 이 어리석은 녀석들아.

  다시 못 된 짓을 해 보거라.

  도대체 황제의 중궁의 일이 너희들 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왕감이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 위대한 전조를 망가뜨릴 놈들이 바로 너희 왕침과 근준같은 쥐새끼 들이다.

  내 먼저 돌아가신 선조들께 가서

  너희 죄상을 낱낱이 고할 것이니

  곧 지하에 불려와 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근준이 화를 내며 왕감에게 물었다.

 

“ 나는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형을 집행할 뿐이요.

  어찌 나더러 전조 사직을 망가뜨린다고 하시오?“

 

왕감이 말했다.

 

“ 너야말로 황태제(유예)를 죽임으로

  황제가 우애가 없는 잔혹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게 한 놈이다.

  국가가 너 같은 놈을 기르고 양육하니 어찌 사직이 망하지 않겠느냐?“ 

 

같이 붙잡혀 온 중서감 최의지는 중호군 근준에게 이렇게 말했다.

 

“ 너의 마음은 효조(梟鳥, 어미를 잡아먹는 흉측한 전설 속의 새)나 

 파경(破獍, 애비를 잡아먹는 흉악한 동물) 같으니 

 반드시 나라의 근심이 될 것이다.

 네가 이미 다른 사람을 잡아먹었으니

 너 또한 다른 사람에게 잡혀 먹힐 것이다.“

 

유총은 충신들의 반대에도 꺾이지 않고 그 후로도 황후책봉을 계속 단행했다.     

 


<23> 유총 사망과 유찬의 고명대신 숙청(AD318년 6월)

 

두어 달 후 유총이 병이 들어 누웠다. 즉시 대사마 유요를 징소하여 승상으로 삼고 석륵을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석륵은 받지 않았다. 이미 전조 조정과 사실상 결별한 상태였다. 유총이 누운 지 며칠 뒤에 죽고(AD318년6월19일) 태자이자 상국이던 유찬이 황위를 계승했다. 유총의 비인 근씨를 황태후로 올리고 자신의 처 근씨를 황후로 책봉했으며 아들 유원공을 황태자로 임명했다. 유찬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지도 않았고 또 인륜을 저버리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즉, 근황태후 등 여러 유총의 황후들은 책봉한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이어린 여자들이었으므로 새 황제 유찬은 이들에게 몹쓸 짓을 많이 했다.

 

근준은 유찬의 이런 패륜을 보면서 가슴 속 깊이 다른 생각(즉, 반역)을 품고서 말했다.

 

“ 소문에 따르면 

  여러 공작들이 이윤이나 곽광처럼 왕을 마음대로 폐립하기 위해

  먼저 태보 호연안과 저를 죽이려고 한답니다.

  폐하께서는 의당 대비를 하셔야 합니다.“

 

근준의 계획은 일단 황실과 깊은 인연이 있는 친인척 조정 대신들을 대대적으로 솎아내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유찬은 근준의 생각을 좇지 않았다. 초조한 근준은 두 명의 근씨 황후, 즉 황태후 근월화와 유찬의 정부인 근씨 황후를 움직여서야 황제의 결단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 때 화를 당한 조정대신은 태재 왕경, 대사마 유기, 유기의 동생 거기대장군 오왕 유령, 기간(기간, 조심스러운 충간)으로 유명한 태사 유의, 대사도 제왕 유매 등이었다. 모두 황제의 가까운 친척이거나 황실의 척족으로써 중직을 맡은 사람들이었다.   

     

이 때 근준은 쿠테타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므로 조정의 강력한 반대세력을 미리 제거해 둘 필요가 있었다. 유찬으로써도 비록 태자였고 상국이었지만 조정의 여러 친척들이나 척족들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했었음으로 순탄한 통치를 위해서 제거하는 것이 편하다고 판단했다.  유총이 죽기 직전 고명으로 임명한 7명의 대신들 중에서 4명이 죽임을 당했고 주기와 범륭은 장안의 유요에게로 도망가서 살아남았다.  

 

 

<24> 근준의 쿠테타(AD318년 8월)

 

유찬은 황제가 되자마자 모든 군권을 대장군 근준에게 맡기고 석륵을 토벌하겠다고 나섰다. 유요에게는 장안을 진압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유찬 자신은 매일 후궁의 정원에서 연회를 열면서 놀았다. 

 

근준은 자신의 쿠테타 계획을 광록대부 왕연과 의논했다. 근준은 왕연을 매우 존경해 오던 차였다. 깜짝 놀란 광록대부 왕연이 조정에 그 사실을 알리려고 하다가 도중에 체포 구금되었다. 왕연은 전에도 여러 번 황제의 잘못을 간하다가 질책을 받은 충직한 사람이었다. 근준이 이런 곧은 왕연과 쿠테타를 모의한 것을 보면 일단 황음한 유찬의 비행에 대해 누구나 동감하고 있었으므로 왕연도 자신의 쿠테타에 흔쾌히 동조할 것이라고 믿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하간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근준은 군사를 발동하여 광극전에 올라서 유찬의 죄상을 낱낱이 밝힌 뒤 가두어 죽여 버렸고 유씨 성을 가진 사람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잡아 동쪽 저자에서 목을 베었다. 그리고 죽은 유연과 유총의 묘(영광릉과 선광릉)를 파헤쳐 사체를 훼손하고 종묘를 불태웠다. 근준의 이런 과격한 행동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자매와 딸을 황제의 비로 보낸 황실 척족으로써 황제에 대해 이런 능멸할 행동을 한 것은 해석하기 어렵다. 다만 유총과 유찬의 폭정에 대해 민심이 크게 떨어 졌다는 사실과 또 전조 조정이 선비족의 후예라는 점에서 한족의 민족적 분노감이 배후에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근준이 호숭에게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 옛 부터 호인(이민족. 주로 흉노)으로써 천자가 된 사람이 없었다.

  내가 전국새를 너에게 줄 테니 서둘러 돌아가서 서진 황실에 돌려 주거라.“

 

이미 서진 조정은 무너졌으므로 돌아갈 곳이 없었다. 황당하게 여긴 호숭이 머뭇거리자 근준은 그를 죽여 버렸다. 근준은 스스로 대장군에 한천왕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명령은 황제의 명령이라고 불렀다. 근준은 왕연에게 이전 조정부터 지켜오던 좌광록대부를 주려고 하였다. 왕연이 근준에게 욕을 내뱉었다.

 

“ 도각의 역적 놈아.

  어찌 나를 속히 죽여 내 왼쪽 눈을 서양문에 두었다가

  상국(유요)이 들어오는 것을 보게 하고

  오른쪽 눈을 건춘문에 걸어 두어 

  대장군(석륵)이 들어오는 것을 보게 하지 않느냐! “ 

 

화간 치밀어 오른 근준은 결국 왕연을 죽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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