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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2 : 전조(前趙)의 유요(A)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12월04일 16시30분
  • 최종수정 2020년12월04일 15시43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1> 전진의 창업자 유연의 아버지 유표

 

AD265년 전국을 통일하고 서진을 세운 사마염이 AD290년 죽자마자 서진은 약 21여년에 걸친 8왕자의 난과 가후, 양준과 같은 외척세력의 국정농단으로 급격하게 붕괴되었다. 서진 조정의 혼란을 틈타 지방 세력들은 곳곳에서 중앙에 대해 반기를 들며 독립하면서 「5호 16국 시대(AD304년-AD439)」를 개막하게 되는데 이것의 시초가 유연(劉淵)의 전조(前趙,AD304)건국이다. 유연은 남흉노계열에 속하는 선비족의 후예로써 오래 전부터 지금의 내몽고 남부지역에 살와 왔던 토호였다. 그의 아버지 좌현왕 유표(劉豹)는 흉노족 추장 선우 혁제어부라의 아들이었으며 작은 할아버지 난제호주천은 남흉노 41대 마지막 선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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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때 위나라 조조는 남흉노족을 다섯 개의 부족, 즉 오부로 나누고 혁제어부라를 좌부의 수장으로 지명하였는데 그 자리를 물려받은 유표는 서진 때 좌현왕이 되었고 AD270년 그의 일족은 성을 유(劉)씨로 갈고서 한 왕조의 후예라고 자칭하였다. 유표의 동생 유거비의 5대 후손 유발발은 성을 본래의 혁련씨로 고치고 통만(섬서성 정변현)에서 하(夏)나라를 건국하였다.(AD407)     


<2> 사마영이 유연과 유총을 등용하다.(AD304)

 

서진 황제 사마충은 AD290년 유연을 건위장군 오부대도독으로 임명하여 북방을 통괄하도록 했다. 8왕자의 난(AD291-AD311)이 한창이던 AD304년 사마예를 타도하고 실권을 장악한 태제 사마영은 북방의 안정과 자신의 보호를 위해 유연을 관군장군으로 임명하면서 자신의 도읍지인 업에 주둔해주기를 요청하였고 유연은 그 요청을 수락하였다.      

 

이 때 유연은 아들 유총(劉聰)을 함께 데려왔는데 유총은 용감하고 날렵했으며 힘이 세어 삼백근 짜리 활을 쏠 수 있었다고 했다. 뿐 만 아니라 경전과 역사책을 많이 읽어 박학했으며 사귐성이 매우 좋아서 많은 한인 사회 인사들과 교류를 했다. 그런 유총을 사마영은 적노장군으로 삼아 자신을 보호하게 하였다.

 

고향에 살고 있던 유연의 작은 할아버지 유선(劉宣)이 족속들에게 말했다.

 

“ 한나라가 망한 이후로 우리 흉노족 선우(추장)는 헛된 이름만 가졌을 뿐

  땅 한자투리도 가진 것이 없었다.

  지금 우리 세력이 쇠퇴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2만 명은 넘는다.

  이 정도면 충분히 힘을 쓸 수 있는데   

  어찌 머리를 숙이고 남을 위해 노역을 하면서 살겠는가.

  좌현왕(유연)은 영명하고 뛰어난 분으로써

  흉노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하늘이 보낸 분이 틀림없다.

  훌륭한 선조 호한야선우의 대업을 다시 일으킬 분이 틀림없다.“

 

유선의 주도로 유연을 대선우로 추대하기로 결정하고 호연유를 업성으로 보내 그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유연이 사마영에게 고향친척의 장례를 핑계로 귀향을 허가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자신의 위치가 불안한 사마영이 허락해 줄 리가 없었다. 

 

<3> 팔왕자의 난을 틈타 독립한 유연(AD304)

 

당시 서진 조정의 정권은 사마옹과 사마영이 쥐고 있었다. 사마옹은 사마충의 황태자 사마담을 폐위시키고 사마영을 황태제로 삼을 것을 주장하여 관철했다. 그리고 자신은 태재와 대도독으로써 정치와 군사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마영이 과거와는 달리 사치하고 오만하며 측근들이 정치를 문란하게 함으로써 민중의 마음을 크게 잃었다. 당연히 동해왕 사마월은 사마영을 토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마월은 사마영에게 폐위된 황후 양씨와 황태자 사마담을 복원시킴과 동시에 충신 혜소를 징소하여 등용하고 주변에서 소집한 10만 군사를 일으켜 황제를 대동하고 사마영을 토벌하기 위해 업성을 포위했다.(AD304년7월)  

 

위급한 사마영이 당숙 동안왕 사마요에게 방도를 묻자 사마요는 갑옷을 벗고 상복으로 갈아 입은 뒤 친히 나가 석고대죄하기를 주청했다. 사마영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석초에게 5만 군사를 보내 방어하도록 했다. 황제 사마충은 사마월의 반란군 화살에 뺨을 다쳤고 수행하던 충신 혜소는 석초군에게 잡혀 죽었다. 황제는 석초에게 붙잡혀 업성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동해왕 사마월은 갑자기 군사를 물리고 동해로 돌아가 버렸다. 일단 사마영이 이긴 것처럼 보였다. 사마영은 항복하라던 당숙 사마요를 죽여 버렸다(AD304년 8월). 그리고 군대를 보강하기 위해 흉노족인 유연과 그 아들 유총을 영입한 것이다. 

 

이 때 안북장군 왕준과 사마등이 사마영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유연이 사마영에게 다가가 설득했다.

 

“ 지금 왕준과 사마등이 날뛰고 있는데 10만여 대군이니

  아무래도 황실호위군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가서 흉노의 5부 군사를 총동원해서 내려오겠습니다.“

 

사마영이 물었다.

 

“ 5부 군사들을 정말로 움직일 수 있을까요? 

  내 생각은 일단 낙양으로 피신한 다음에

  격문을 전국에 보내 천천히 반란무리들을 진압하려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유연이 대답했다.

 

“ 전하께서는 무황제(사마염)의 아들이시고

  큰 공훈을 세우셔서 만천하가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부르시는데 누가 감히 명을 어기겠습니까.

  그리고 왕준 무리들은 쥐새끼 같은 놈들이라

  대적이라 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지금 업성을 포기하신다면

  약하다는 것을 만 천하에 드러내는 것이 되어서

  낙양에 도착하신다 하여도

  권력과 위엄은 당 바닥에 떨어지는 셈이 됩니다.

  제가 오부 중 두 부의 군사로 동영공 사마등을 무찌르고

  세 부의 군사로 왕준을 처리하게 해 주시면 

  손가락으로 날자를 세는 동안에  

  두 녀석 머리는 나뭇가지 위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사마영이 기뻐하며 유연에게 참승상군사라는 최고군사직에 임명하였다. 유연은 유총을 데리고 북쪽 고향으로 떠났고 이석(산서성 여량시 이석구)에 이르러 5만 명을 모으고 그 곳을 임시 도읍으로 정하였다. 왕준에게 밀리는 사마영을 위해 5천 기병을 보내는 시늉을 했지만 이미 사마영이 낙양으로 패주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철군시켜 버렸다.

 

사마영은 황제 사마충을 모시고 업에서 낙양으로 도망갔다. 사마영이 지키고 있었던 업성은 왕준과 사마등에게 붕괴되었다. 장안을 지키고 있던 사마옹의 부하 장방이 낙양에 들이닥쳐 황제와 사마영을 윽박질렀다. 조정의 실권은 이제 사마옹과 그의 직속 장방이 쥐게 되었다. 장방은 황제와 사마영을 장안으로 강제 송환하였다. 사마옹은 3만 기병을 대동하고 이들을 패상(장안 동남쪽 섬서성 남전현)에서 맞이했다.(AD304년 11월) 그런 다음 황태제 사마영을 폐위시킨 다음 사저로 내려 보냈다.(AD304년 12월) 황태제이던 사마영 대신 사마영의 동생 사마치를 황태제로 책봉하였다. 사마옹은 태재로써 군권 및 정권을 독점하였고 사마월에게는 사공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4> 유연의 사마등과 탁발의타의 공격(AD304)  

 

사마등이 유연과 같은 선비족인 탁발의타와 연대하여 업성의 사마영을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유연이라는 강력한 세력을 두고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사마등은 탁발의타와 그의 동생 탁발의로(나중에 대라는 나라의 창업자가 됨. 북위의 뿌리임)와 함께 유연을 공격하였다. 유연은 사마영과의 협조약속이 못내 마음에 걸려서 이렇게 말했다.

 

“ 내가 그처럼 말했지만 듣지 않더니

  결국 망하여 쫓겨 가게 되었군.   

  정말로 못난이지만 내가 도와준다고 약속을 했으니

  구원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유연이 군사를 규합하여 공격에 나서려고 할 때 주변의 참모들과 종조부 유선이 말리며 말했다.

 

“ 서진 사람들은 우리를 종으로 부려 먹었소.

  그리고 탁발의타와 탁발의로는 우리와 같은 종족이요. 

  서로 돕지는 못할망정 공격한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선비족을 뭉칠 호한야 선우의 대업적을 달성하는 일입니다.“

 

선비족끼리 뭉치는 일이 최우선업무이니 탁발의타를 공격하지 말자는 말이었다. 유연이 이렇게 말했다.

 

“ 훌륭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대장부라면 마땅히 한나라 고조(유방)이나 위나라 무제(조조)처럼

  전 중국을 통일해야지 어찌 선비족을 규합하는데 그친 

  호한야선우를 본받고 만족하겠습니까? 

 

유선 등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 죄송합니다. 

  생각이 그까지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

 

 

<5> 유연의 수도이전과 건국 (AD304)

 

이석지역에 큰 가뭄이 들자 유연은 그리 멀지 않은 좌국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남쪽의 서진과 북동쪽의 탁발씨의 연대로 전쟁이 그치지 않자 불안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그 가운데 있는 유연에게로 몰려들어 인구와 국가의 위세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유연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 옛날 한이 천하를 오래 차지했던 이유는 

  은혜를 베풀고 백성들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오,

  우리 선조는 한 왕조와 생질이고 또 형제이기로 약속하였소.

  형이 망하면 동생이 잇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이렇게 해서 유연이 한나라를 세웠다. 유연은 한나라라고 명명했지만 역사가들은 한의 계통을 이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한조(漢趙) 혹은 전조(前趙)라고 부른다. 신하들은 이참에 황제라고 부르기를 청하였으나 유연이 말했다.

 

“ 지금은 사방이 안정되지 못했고

  또한 고조(유방)가 스스로를 한왕(漢王)이라고 했으므로

  나 또한 한왕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자신의 왕조가 유비의 촉한에 닿아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유비의 아들 유선을 효희황제로 추존하고 전, 후한 여러 황제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6> 유요와 진원달(AD304)

 

한왕 유요는 나면서부터 흰 눈썹을 가졌으며 눈동자는 붉은 빛이 났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으며 지혜와 담력을 모두 갖추었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유연에게서 길러졌는데 유연 또한 조카 유요를 매우 사랑했다. 이석에서 좌국성으로 수도를 옮긴 유연은 종조부 유선을 승상으로 삼고 최유를 어사대부, 종친이자 좌어육왕인 유굉을 태위로 삼았으며 진원달을 황문랑으로 임명하였다. 

 

진원달은 젊어서 지조가 굳었으며 실력이 깊어서 오래 전부터 유연이 초빙하려고 했으나 진원달이 거절했었다. 어떤 사람이 진원달에게 무서워서 그러냐고 묻자 진원달이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 내가 그 사람의 사람됨을 안지가 오래 되었고

  그 또한 나를 안지가 오래되었소.

  아마 며칠 있으면 그의 편지가 올 것이요.

 

정말 며칠 되지 않아 유연의 징소하는 편지가 도달했다. 진원달은 유연을 섬기면서 여러 번 간언을 올렸지만 물러나서는 무슨 말을 올렸는지 모두 지워버렸으므로 그의 아들조차 진원달이 어떤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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