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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1:3대(代)만에 최강국 전연을 무너뜨린 모용위 (P, 끝)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11월27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8월17일 14시24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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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76) 사마광의 부견과 왕맹 평가(AD370)

 

부견과 왕맹이 없이는 전진은 설명할 수 없다. 이 두 사람은 전진의 알파와 오메가와 같다. 사마광은 부견과 왕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 주(周) 무왕은 은나라 주(紂)왕의 형 계미자를 얻어서 주나라를 개척했고,

  진(秦)은 유여를 얻고서 서융의 패자가 되었으며

  오나라는 초나라 오원(오자서) 얻어서 강한 초를 이겼고

  한나라는 진평을 얻어서 항적의 목을 베었으며

  위나라는 허유를 얻은 다음에야 원소를 깨뜨릴 수 있었으니

  적국의 재주 있는 인재를 들여 활용하는 것으로 큰 밑천을 삼은 것이다. 

  왕맹이 아직은 순수한 마음의 모용수를 시기하여 죽이려 했으니

  이는 전연의 폭정을 피하여 도망 오는 인재를 막는 옳지 못한 행동이었다.

  반면에 전진왕 부견은 모용수를 예로 대함으로써

  전연 사람의 희망을 거두어들이고

  그를 가까이 함으로써 전연 백성들의 호응을 얻어내게 되었으니

  그는 허물을 범하지 않은 것이다.       

  왕맹이 모용수 죽이는 것에 급급하여 

  마치 죽파는 장사꾼처럼 행동하고

  그의 총애를 시기 질투하여 참소하는 행동을 보였으니

  어찌 훌륭한 덕군자의 행동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77) 왕맹의 전연 토벌(AD370)

 

왕맹은 낙양을 함락시키고 나서 등강에게  맡기고 더 동쪽으로 나아가 형양 가까이까지 다가갔다. 부견은 그의 공을 높이 사서 사도 겸 녹상서사 겸 평양군후라는 작위까지 내렸지만 왕맹은 사양했다. 부견이 억지로라도 받아달라고 부탁했지만 왕맹은 끝내 받지 않았다. 부견은 왕맹과 양안에게 6만 군사를 주면서 다음과 같이 동진을 명령했다.

 

“ 호뢰관을 깨뜨리고

  상당(산서성 장치)을 평정하며

  달려가 업(전연의 수도)을 접수하되

  마치 빠른 뇌성은 귀에 듣지 못하는 것처럼

  전격적이어야 한다.

  내 친히 1만 군사를 가지고 뒤쫓아갈 테니

  육로와 수로로 나누어 동시에 갈 것이다.

  경은 후미를 전혀 걱정하지 마시고 오직 앞으로만 나아가시오.“

 

왕맹이 이렇게 답변했다.

 

“ 남은 호족으로 싹 쓸어버림이

  마치 바람으로 낙엽 쓸 듯이 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수레가 먼지를 뒤집어쓰시는 수고를 겪지 마시고

  서둘러 칙령을 내리셔서 

  선비족을 어디에 묻을 것인지만 걱정하십시요“ 

    

 

(78) 왕맹과 등강(AD370)

 

업성에 주둔하는 전연 황제 모용위는 30만 대군을 모아 방어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 전진의 군사는 얼마나 되는가?

  우리가 싸울 만한가? ”

 

산기시랑 이봉은 전진의 6만 군사력을 형편없이 폄하하면서 대수롭지 않다고 평가했다. 황문시랑 양침과 중서시랑 악숭은 군사의 수가 아니라 지략이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고 그들은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것이므로 전쟁의 승산이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 사이에 왕맹과 양안이 각각 호뢰관과 상당을 함락시키자 전연은 크게 술렁거렸다. 전진의 왕맹이 동진하여 낙양과 호뢰관을 정벌하는 사이 양안은 북로를 향하여 상당을 접수하고 진양(산서성 태원)을 함락시켰다. 전쟁이라고 할 것도 없이 전진 군사가 도착하는 순간 전연 군사는 무너졌다.  

 

진양을 함락시킨 양안의 군사는 다시 남동진하여 왕맹의 군대와 합류한 뒤 모용평의 30만 대군이 주둔한 노천(산서성 여성)으로 향했다. 이 때 왕맹의 척후병 서성이 기한을 어겨 늦게 도착하는 잘못을 범했다. 왕맹이 군법을 위반한 서성을 죽이려하자 등강이 말리고 나섰다. 왕맹이 등강의 용서를 듣지 않자 등강은 왕맹을 공격하려 했다. 왕맹이 왜 그렇게 흥분하냐고 묻자 등강이 이렇게 대답했다.

 

“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먼 곳 까지 와서 적을 토벌하러 왔는데

  가까운 곳에 적을 두고

  서로 죽이려고만 하고 있으니

  답답해서 내가 그대를 공격하려 한 것이요.“

 

왕맹은 그런 등강의 용기를 높이 치하하면서 서성을 사면했다. 서성이 사면되자 등강 또한 왕맹을 몸소 찾아가 사죄했다. 왕맹이 등강의 손을 잡고 말했다.

 

“ 내가 장군을 시험해보려고 한 것일 뿐이오.

  장군이 한낱 군장 서성에게도 그리 충성을 보이신

  나라에 대한 충성이야 어떻겠소.

  나는 다시는 전연 도적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요.“ 

 


(79) 전연의 멸망(AD370년 11월)

 

전연은 망할 징조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황제 모용위는 무능하고 정치는 가족혼태후가 농단하고 있었다. 군사를 장악한 대사마 모용평은 겁 많고 용렬하며 허풍에만 익숙해 있었다. 모용위가 전쟁을 독촉하자 노천(산서성 여성현) 방어에만 힘쓰던 모용평이 사신을 왕맹에게 보내 한 판 전쟁을 벌이자고 독촉해 왔다. 왕맹은 등강에 전투를 부탁했다. 등강은 전쟁 조건으로 사예교위를 달라고 했다. 사예교위란 황실과 대신들의 비위를 감찰하는 책임자 자리다.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공직자 비리수사처 같은 자리인 셈이다. 왕맹은 자기 능력 밖의 일이기는 하나 안정태수에 만호후 정도는 최선을 다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시큰둥해진 등강은 물러나 자리에 눕고 일어나지 않았다. 왕맹이 마침내 사예교위를 허락하자 등강은 즉각 군사를 일으켜 전연을 대파시키고 약 5만군사의 목을 베었고 10만 군사의 항복을 받아냈다. 모용평은 노천전투에서 크게 패하자 업성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전진 군사는 노천에서 동쪽으로 100여KM 떨어진 수도 업성을 포위했다. 부견은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함락을 미루고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AD370년 11월 10만 전진의 대군이 업을 둘러싸고 포진했다. 이미 황제 모용위, 태부 모용평, 모용장, 모용연 등 전연의 최고 지도부는 업성을 빠져 나간 뒤였다. 업성을 지키던 전연 산기시랑 여울은 업의 북문을 몰래 열고 전진의 군사를 받아들였다. 11월10일 부견은 전연의 궁궐로 무혈 입성했다. 부견을 수행한 모용수가 남아있는 전연의 공경대부를 심하게 질책했다. 모용수와 함께 전진으로 망명했던 측근 고필이 다가가 화를 내실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연나라를 시작하는 계기를 준비해야 한다고 몰래 귀띔했다. 십여 년 뒤 전진이 쇠약해지자 모용수는 후연을 건국하는 사람이 된다.

 

전진의 유격장군 곽경은 번개처럼 말을 몰아 도망가던 전연 황제 모용위를 체포해서 업성으로 압송했다. 모용위가 모든 전연 관원을 대동하고 전진에게 무릎 꿇고 항복했다. 전연의 157개 군과 246만호, 그리고 인구 999만이 전진에 항복했다. 북중국의 절반 이상이 전진의영토가 된 것이다. 장천석의 전량이 고장(감숙성 무위)에 있기는 했으나 칭번국이었으므로 사실상의 북중국 통일이나 마찬가지다. 왕맹에게는 사지절, 도독관중육주제군사,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기주목으로 삼아 업에 주둔시키고 모용평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주었다. 등강에게는 사지절, 정로대장군, 진정군후 및 안정태수, 양안에게는 박평현후, 그리고 곽경에게는 도독유주제군사를 주었다. 

 

부견은 전연의 관료들을 후히 중용했다. 황제 모용위에게 신흥후라는 작위를 주었고 황보진은 봉거도위, 이홍은 부마도위라는 직책을 주어 등용했다. 모용위는 전연이 멸망하고도 한참 뒤인 AD385년 동생 모용충의 반란에 연루되어 부견에게 죽었다. 전연 지도부를 추격하던 곽경이 용성에 다다랐을 때 모용평은 고구려로 달아났지만 고구려 고국원왕은 모용평을 업성으로 압송시켜 버렸다. 업성에서 장안으로 끌려 온 모용평에게 부견은 급사중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전연 조정에서 간첩으로 오인되어 갇혔던 양침에게는 중서저작랑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80) 전연의 충신 양침과 부견의 대화(AD370)

 

양침은 여러 번 전진에 특사로 파견되어 갔으므로 부견과 왕맹이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전진에서 돌아온 양침이 부견과 왕맹의 사람 됨됨이를 칭찬하고 전진의 군사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자 전연의 막료들이 양침을 깊이 의심하기 시작했다. 과연 전진의 대군이 들이닥치자 양침을 첩자로 확신하고 가두었다가 부견이 들어옴으로써 풀려났던 것이다.

 

부견이 양침에게 이렇게 물었다.

 

“ 그대는 모용평과 모용수를 모시던 사람 아니오.

  어찌 주군을 잘 모시지 못하여 나라가 이 지경까지 되게 하였소?“

 

양침이 대답했다.

 

“ 천명이라는 것을 어찌 그 두 사람이 

  이리 혹은 저리로 옮길 수 있겠습니까?”  

 

부견이 다시 물었다.

 

“ 경은 기미(幾微, 작은 낌새)도 잘 모르면서 

  전연이라는 나라를 아름답다고 칭찬하면서

  충성으로 국난을 막지 못했으니

  그러고도 과연 현자라고 불릴 수 있겠소?“

 

양침이 대답했다.

 

“ 신이 알기로 기(幾)란 아주움직임이 작으면서도

  길흉의 선견자 같은 것입니다.

  신같이 우매한 자는 가까이 근접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신하가 되어 충성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없으며

  아들이 되어 효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런 지극한 마음이 없으면

  충효의 시작과 끝을 능히 보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옛날의 열사들이 위태로움에 처하여도 변절하지 않고 

  죽음을 앞에 두고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군주나 부모를 위해 순순히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저 기미를 안다는 자들은 마음으로는 안위에 두고

  몸으로 거취를 요리조리 택하면서 집안과 국가를 버렸지만 

  신은 사신이 되어 그것(요리조리 피하는 것)을 알았어도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인데,

  두 왕과 같은 지위에 미치지도 못하는 사람으로서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양침은 전연 조정의 문제점과 전진의 강점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전진의 부견과 왕맹 앞에서는 매번 전연의 장점과 아름다움을 강조하면서도 돌아와서는 여러 차례 전진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투철한 양침은 아무리 사실이라 하더라도 본국 전연의 문제점이나 흠을 전진의 부견이나 왕맹에게 드러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부견은 전연의 흠을 말하지 않은 양침을 비판한 것이었고 양침은 그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알고도 말할 수 없는 충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맹도  부견과 비슷한 평가를 내린 적이 있다. 학구와 악숭 모두 양침과 같은 전연의 관리 였는데 악군은 동진 환온 군사의 강점을 예기했고 학숭은 전연의 허약한 점을 말하자 왕맹이 그런학숭을 가장 높이 평가한 적이 있었다. 왕맹의 기실참군 풍탄이 이렇게 비꼬며 말했다.

 

“ 기미를 아는 것으로 평가하신다면

  주군께서는 충성스럽게 유비를 괴롭혔지만

  유비가 살려 준 초나라 장수 계포는 기미를 몰랐다고 주살하시고

  유비를 놓아 준 초나라 정공은

  유비가 승리할 줄 미리 알았으니 가장 높이 평가하시겠군요“

 

 왕맹이 쑥스럽게 웃었다.

 

 

(81) 전연이 망한 이유 : 황실 내부의 분열과 무능한 주군 모용위 

 

AD337년 모용황이 전연을 세운 이래로 전연 황실에는 훌륭한 인걸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창업자 모용외는 물론이고 1대 황제 모용황과 2대 황제 모용준도 인재였지만 그의 동생 모용각과 모용수와 모용덕은 역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훌륭한 보국의 형제 대들보들이었다. 이런 형제들이 서로를 믿고 협력하는 한 그 어느 누구도 쉽게 전연을 쓰러뜨리거나 위험에 빠지게 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모용준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형제간의 우애나 신뢰에 전혀 문제가 없었으므로 짧은 시간에 대륙의 북쪽 모퉁이에서 중원지역을 아우를 수가 있었다.

 

전연 황제 모용준이 죽고 7년이 지난 AD367년 모용각마저 죽게 되자 그렇게 튼튼하던 전연 황실의 초석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 까닭은 황위를 이어받은 모용위가 용렬했고 또 그를 떠받드는 황실 최고원로인 모용평의 옹졸함과 인색함이었다. 그는 황제 모용준과 모용각의 수차례에 걸친 각별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능력있는 조카 모용수를 등용하지 않았다. 물론 황제 모용위와 그의 처 가족혼씨 가문과의 불화가 크게 작용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린 모용위를 보필하기 위해서는 모용수와 같은 인재가 꼭 필요했었다.      

 

전진의 도움을 청하면서 약속했던 호뢰관 땅을 주지 않은 것이 전진의 전연 침공의 직접적인 원인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왕맹의 전진은 전연을 침공했을 것이다. 동진 또한 형편이 닿는 한 언제든지 전연이나 전진을 공격해 왔을 것이다. 그것은 전연 또한 마찬가지였다. 결국, 전진, 동진 그리고 전연의 세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전연이 갑작스럽게 멸망한 것은 국력이 약해서도 아니고 땅이 좁아서도 아니었다. 오직 훌륭한 황실 내부 인재를 배척하고 질시한 주군 모용위의 무능함 때문에 삼국 중에서 전연이 가장 먼저 사라지고 만 것이다. 모용위는 전진 부견에 의해 후대를 받다가 AD385년 궁지에 몰린 부견을 암살하려다 발각되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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