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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19 : 거대한 기마제국 북위(Z)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12월18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12월23일 11시04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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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141> 간신 정엄과 서흘(AD525)

 

호태후는 정엄을 비밀스럽게 총애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정엄은 호태후의 아버지 호국진의 참모로 있으면서 호태후의 총애를 받았었다. 호태후가 재집권을 하면서 간의대부 및 중서사인으로 임명되어 궁으로 다시 들어왔다. 주야로 금중에 머물면서 목욕과 휴식시간에는 항상 정엄이 호태후를 따르게 했다. 

 

서흘이란 사람은 원래 원역의 신하였는데 그가 죽자 원차에게 붙었고 원차가 죽자 호태후는 서흘이 원래 원역의 신하였으므로 믿을 만 하다고 여기고 다시 궁으로 불러들여 중서사인을 시켰다. 궁에 다시 들어 온 서흘은 실세 중에 실세가 정엄인 것을 간파하고 정엄에게 바싹 다가가 붙었다. 정엄은 서흘이 문학에도 소질이 있고 또 지혜와 술수가 있었으므로 쓸모가 많다고 여기고 가까이 하였다. 황궁의 권세를 완전히 장악한 이 둘을 성을 따서 ‘서정’이라고 불렀다.        

 

정엄은 거기장군 중서령에 이르렀고 서흘도 급사황문시랑이 되었으나 실제의 권한은 중서,문하의 모든 업무를 관장했으며 나라의 모든 조칙이 그 둘의 손에서 나왔다.

  

서흘은 임기응변에 능하고 지칠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여러 조서를 동시에 써야 할 때에는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때로는 서서, 때로는 누워서 조서의 내용을 입으로 불러주었는데 사리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국가 경륜의 큰 틀이 없이 잔재주에만 능통하였으므로 좀 지나고 보면 잘못된 것이 많았다. 항상 거짓으로 겸손한 척 공경하는 척했으며 그의 권력에 붙고자 많은 사람들이 그에 붙으려고 하였다. 

 

 

<142> 대단한 배짱 노의희(AD525)

 

정엄과 서흘말고도 호태후의 총애를 받는 사람으로 급사황문시랑 원번과 이신궤가 있었다.이신궤가 산기상시 노인희에게 혼인을 청하였으나 거절을 당했다.황문시랑 왕송이 노이희에게 다가가서 왜 허락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노인희가 대답했다.

 

  ” 재앙이 크고 신속하게 다가올 것 같아서 반대햇소.“

 

왕송이 노인희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 내가 천명이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대가 바로 그걸 아는 사람이요.“

 

노인희의 딸은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혼인하는 날 호태후가 사람을 보내 파혼시켰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렸지만 노인희는 아무런 일이 없었던 듯 태연하게 행동했다.

 

 

<143> 북위 주변의 반란과 침입과 신웅의 상소(AD525년) 

    

호태후가 정권을 다시 잡은 AD525년을 전후하여 북위는 끊임없는 외부의 도전과 반란을 겪게 되었는데 크게 네 분야에서 위협해 들어왔다.

 

   ① 파륙한발릉이 북쪽 포두부근에서 침략

   ② 막절념생 등이 서쪽 경천 부근에서 침범

   ③ 남쪽의 형만족의 반란  

   ④ 동남쪽 양나라 침범  

 

위의 장수 신웅이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다음과 같이 상소했다.

 

  ” 군인이 전장에 나서서 죽음을 앞두고도 용감히 싸우는 것은,

    첫째, 명예스러운 이름을 얻고자 함이요,

    둘째, 무거은 상을 바람이요,

    셋째, 형벌이 두려워서이며

    넷째, 화란을 피하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 곳에서 전쟁이 일어났지만 패하는 것은 많고 이기는 것은 적은 것은

    그 연유는 상벌이 분명치 않아서입니다.

    전투가 끝나고 일 년이 지나도 상훈은 없고  

    집에서 할 일 없이 빈둥거리게 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도 공이 없고

    도망쳐 돌아와도 벌이 없으니 

    누가 목숨을 내놓고 싸우려 하겠습니까.

    황제께서 직접 나서셔서 호령을 하시고 

    상벌을 정확히 내리신다면 반드시 이기고 적은 토멸될 것입니다.“

 

황제는 신웅의 상소문을 살펴보지 않았다.   

 

 

<144> 서흘과 원휘의 원심 원순 배척(AD526)

 

광양왕 원심이 성양왕 원휘의 부인과 사정을 통하여 원휘가 분을 삭이고 있었는데 원휘가 상서령이 되어 호태후의 신임을 크게 얻었다. 항주(산서성 대동)사람들이 원심을 자사로 보내주기를 청원했지만 원휘는 원심의 본심을 믿을 수 없다고 하여 결정을 내리지 않고 묵혀두었다. 두락주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키자 항주사람들은 모두 원심을 주군으로 모시기를 꾀하자 원심은 반란에 엮이는 것이 두려워 북도대도독에서 조정으로 돌아오기를 요청했다. 원심을 이부상서로 삼고 양진을 북도대도독으로 임명했다. 

 

원휘는 또 서흘과 결탁하여 시중 원순을 호태후에게 헐뜯어서 밖으로 내 쫓았다. 호태후가 바깥으로 나온 참에 원순이 다가가서 말했다.

 

  ” 저기 서흘이라는 사람은   

    오나라 오자서를 모함하여 죽게 한 백비와 같은 사람입니다.

    위나라가 망하지 않으면 저 사람도 끝내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서흘에게 큰 소리로 꾸짖었다.

 

  ” 이 도필하는 소인 재주를 가진 녀석아.

    문서나 만지고 노닥거릴 것이지 어찌하여

    나라의 문하성을 더럽히고 욕보여서

    선비의 도리를 깨뜨리고 있는 것이냐!“

 

옷을 떨치고 일어났지만 호태후는 잠자코 듣기만 할 뿐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선우수례라는 사람이 포두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원심을 다시 대도독으로 임명하여 선우수례를 토벌하도록 했다. 원심은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참전하고자 했는데 원휘가 호태후에게 말했다. 

 

  ” 자기 아들을 데리고 가는 것을 보면 

    원심의 속마음은 장차 다른 곳에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원심의 부장 배연과 원융에게 몰래 칙서를 내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도록 비밀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원융과 배연이 칙서를 보여주자 원심은 두려움에 떨면서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기만 하였다. 호태후가 그 이유를 묻자 원휘가 자신에게 앙심을 품고 죽일 생각에 가득 차 있으므로 원휘를 외방으로 내보내 주기를 간청했다. 호태후는 들어주지 않았다. 조정의 모든 대소사는 원휘와 소흘과 정엄이 장악했으며 정치와 군사의 기강이 크게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145> 재정고갈과 증세와 민심이반(AD526)

 

끝없이 일어나는 반란과 그를 수습하기 위한 군사로 북위의 조정은 크게 어려웠다. 앞으로 6년까지의 조세를 미리 거두고서도 부족하여 관료들에게 내리던 술이나 육포를 모두 없앴고 시전 점포는 물론 시장에 출입하는 백성들에게도 일인 당 1전의 세금을 물렸다. 백성들이 탄식하며 원망하였다. 이부낭중 신웅이 또다시 상소문을 올렸다. 

 

  ” 화이 만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군수와 현령이 적합하지 못하여 원성을 샀기 때문입니다.

    모두를 뇌물이나 배경으로 직위를 얻었기 때문에

    황실에서 조서가 내려와도 눈도 깜짝하지 않고 무시하고 있습니다.

    출신지역보다는 능력을 앞세우시고

    3년마다 관리를 평가하여 승진과 폄출을 정하시고

    재능이 크고 높으면 경사로 부르시되

    군수나 현령직을 거치지 않으면 중앙정부에 들이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군수나 현령들이 힘써 선정을 펼쳐서 

    억울하고 굽어진 것을 바로 잡으려 노력할 것입니다.“

 

조정은 듣지 않았다. 

 

<146> 소보인의 반란(AD527-AD528)

 

양나라에서 먕명 온 소보인은 AD524년 9월 막절념생을 토벌하는 총책임을 맡고 서도행대가 되어 최연백과 함께 서쪽으로 출병했다. 그러나 여러 해가 되도록 뚜렷한 전공을 세우지 못하고 패배를 거듭하였고 또 부하 동연주자사 반의연은 적군에 투항하기도 했다. 소보인이 경주(감숙성 경천)에서 크게 패하면서 감숙성 동북부 일대와 섬서성 서부를 막절념생이 작악하면서 주변 지역을 급속도로 합병해나갔다. 기주자사 위란근은 주민에 의해 포획된 다음 주민들이 막절념생에 투항했다. 북화주(섬서성 황릉)자사 호인조도 막절천생에 호응했고 질간기린도 빈주를 가지고 막절천생에 투항했다. 옹주자사 양춘이 7천 군사를 끌어 모아 겨우 방어할 정도였다.

 

곳곳에서 패하고 영토가 잘려나가자 유사는 소보인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내렸으나 황제가 사면하여 서인으로 만들었다. 옹주자사가 양춘이 병으로 사직하자 그 자리에 소보인을 앉히고 겸하여 도독옹경등사주제군사의 직책을 내렸다. 양춘은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아들 양욱에게 소보인의 충성심이 의심스러우니 그것을 황제와 호태후에게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양춘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사공이던 사람이 옹주자사로 깎인 것이 수치스러울 것인데 지나치게 좋아하고 과장된 얼굴표정을 보니 마음을 숨기는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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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만일에 대비한 계획을 철저히 세울 것을 간청 드리라고 부탁했다. 양욱이 황제와 호태후를 뵙고 그대로 말씀드렸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사실 소보인의 마음은 여러 가지로 복잡했다. 주변에서는 낙양으로 들어가서 패전의 죄를 스스로 지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다음 전쟁에서 크게 이겨서 보답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강력한 막절념생을 이기기도 어려운 상황에 빠진 것이다. 

 

당시 강직하기로 이름난 역도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패악하고 권력남용으로 원성이 자자한 구념이라는 사람을 역도원이 잡들였는데 호태후가 구출해주려고 하자 역도원이 그를 당장 사형을 시켜버리고 구념을 살리려고 청원한 여남왕 왕열 마저 탄핵해버렸을 정도다. 

소보인의 반란 정황을 감지한 북위조정에서는 왕열이 추천한 역도원을 황제의 대사로 소보인에게 보내 상황을 확인하도록 했다. 소보인은 조정에서 역도원을 보낸 것은 자신을 잡아들이려는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고 또 측근도 부추기는 까닭에 반란을 행동으로 옮겼다. 역도원이 소보인에게 가까워지자 소보인은 곽자회를 보내어 역도원을 살해하고는 거짓으로 표문을 올려서 역도원은 백적(선비계통의 산적들)에게 죽었으며 자신은 양춘부자에게 참소된 것이라고 변명했다. 소보인은 장안으로 들어 와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면서 사면령을 내리고 백관을 설치하여 황제 흉내를 내었다. 위 조정에서는 상서좌복야 장손치를 파견하여 소보인 토벌에 나섰다.(AD527년 10월)

 

소보인이 장안 서북쪽 풍익(고릉)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장손치가 낙양을 떠나 서쪽으로 향하는데 항농(삼문협)에 이르자 행대좌승 양간이 공격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북쪽포판(산서성 영제)으로 돌아 우회공격을 하자고 권했다. 장손치가 말했다. 

 

  ” 그대의 계획은 매우 훌륭하오.

    그러나 지금 설수의가 하동(영제)을 포위하고 있고

    설봉현이 안읍(산서성 운성)을 점거하고 있으며

    종정진손이 우판(산서성 평육)을 지키고 있으니 

    어떻게 그리로 돌아갈 수가 있겠소.“    

 

양간이 이렇게 설득했다.

 

  ” 종정진손은 무능하여 성을 지킬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설수의 군대는 하동의 서쪽으로 몰려있어서 동쪽은 공략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장손치는 아들 장손자언을 시켜서 양간과 기병을 이끌고 강을 건너 북쪽으로 갔다. 대군이 횃불과 봉화로 영제 동쪽으로 밀고 들어오자 설수의와 설봉현이 모두 항복하고 들어왔다. 소보인이 장군 후종덕을 파견하여 반란을 일으킨 모반을 격퇴하라고 지시했지만 후종덕은 거꾸로 소보인을 공격하였다. 소보인이 패하여 처와 가족과 100여 기병을 이끌고 상봉(감숙성 천수)에 있는 묵기추노에게로 도망갔다. (AD528년 1월)  

 

 

<147> 호태후와 황제의 멀어짐(AD528)

 

북위황제 원후의 나이는 열여덟이었다. 호태후는 황제가 장성하면서 자신의 모든 비행과 잘못을 알게 될까 두려워하여 황제가 총애하는 사람들은 죄다 무고하거나 이유를 찾아내 쫓아내었다. 황제의 총신 곡사회를 호태후가 외직인 자사로 임용하려 했는데 곡사회가 거부하자 죄를 덮어 그를 죽였다. 또 선비족 언어를 잘 하는 밀다도인이라는 사람이 항상 황제 곁에 있었는데 이 사람 또한 황제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호태후가 사람을 시켜 살해했다. 황제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모자간에는 큰 틈이 벌어졌다.

 

 

<148> 호태후의 황제독살과 영웅 이주영 등장(AD528)

 

이 당시 위나라 최고 군권은 이주영에게 있었다. 그는 흉노계통의 이민족으로써 병사운광항운육주대도독이었다. 고환, 단영, 울경 채준 등 반란에 참여했다가 항복하여 휘하로 들어 온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병주자사 원천목은 이주영을 형으로 섬길 정도로 사이가 가까웠다. 그리고 장하도독 하발악도 이주영 곁에서 훌륭한 참모역할을 했다. 원천목과 하발악은 이주영에게 하루 빨리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들어가 황제 주변의 간신들을 몰아내고 정치를 바로 세우라고 권고하였다. 

 

이주영이 편지를 써서 호태후에게 요청했다.

 

  ” 산동지역의 관군이 연거푸 산적들에게 패배하고 있으니

    제가 기병 3천을 가지고 상주(하북성 업)로 들어가 구원하게 해주십시오.“  

 

호태후는 이주영을 의심하였으므로 허락하지 않았다. 이주영이 다시 편지를 올렸다.

 

  ” 그렇다면 군대를 북쪽 하구(하북성 래원)으로 보내 

    정형9하북성 정형)과 부구(하북성 무안)을 점령하여

    도적의 배후를 끊어 놓겠습니다.“

 

마침내 허락이 떨어져 이주영은 군사를 동쪽으로 움직였다. 호태후의 심복 서흘은 이주영 주변에 있는 막료들에게 철권을 부면서 회유하여 이주영과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이주영은 호태후와 그의 측근들의 행태에 매우 분개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북위 황제 또한 호태후와 그의 일당을 몰아내려는 생각으로 이주영에게 편지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이주영은 고환을 선봉으로 삼고 출병했는데 상당(하북성 장치 북단)에 이르렀을 때 조서가 내려와 정지시켰다. 정엄과 서흘은 이주영의 군대가 남하한다고 하자 위협을 느끼고 호태후와 결탁하여 숙종 황제를 독살했다.(AD528년 2월25일)

 

호태후는 딸을 황제로 세우고 크게 사면령을 내렸다. 그 다음날 생각을 바꾸어 임조왕 원보휘의 아들 세 살짜리 원소를 황제로 세웠다. 원보휘는 원굉의 아들 원유의 아들로 원후와는 사촌지간이다. 

 


<149> 이주영의 호태후 살해와 원자유 옹립(AD528)

 

상당에 머물고 있던 이주영은 호태후의 원소옹립조치를 듣고 격분했다. 원천목에게 분을 삼키며 말했다.

 

  ” 황제가 겨우 열여덟으로 아직 어린아이인데

    그보다 더 어린 말도 못하는 아기를 받들고 

    천하를 군림하려하다니 그게 말이 되는 예기인가!

    나는 철기병을 이끌고 먼저 애도를 표한 다음에  

    간사하고 요망한 무리들을 잘라내고 어른 군주를 세우려 하는데 어떤가?“

 

원천목이 동조하므로 이주영은 상소문을 조정에 올렸다.

 

  ” 대행께서 세상을 등진 것은 만인들이 짐독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찌 천자가 불편한 데 의원을 부르지 않았단 말입니까.

    어찌 천자가 위독한데 고귀한 친척들이 곁에 없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찌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또 황제의 딸을 세워 사면령을 내렸으니 

    하늘과 당을 속인 것이며 조정과 백성을 속인 것입니다.

    바라건대 신이 대궐로 들어가서

    황제가 붕어한 이유를 찾아내고

    서흘과 정엄과 같은 악독한 무리들의 죄를 밝혀내어  

    하늘을 같이하고 있는 수치스러움을 깨끗이 씻고

    멀고 가까운 사람들의 원한을 사죄한 다음에

    다시 종친을 택하여 보배로운 자리를 잇도록 하겠습니다.“

 

호태후는 이주영의 사촌동생 금위군 이주세륭을 급히 이주용에게 보내 위로하고 타이르도록 시켰다. 이주영이 이주세륭에게 남아있기를 권유했으나 사양하면서 말했다. 

  ” 지금 조정이 형님을 의심하기 때문에 저를 보낸 것 아닙니까.

    제가 여기 남아있으면 저들이 더욱 확신하고 대책을 세울 것이니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이주영은 이주세륭을 보낸 뒤 팽성무선왕 원협의 아들 원자유를 세울 생각이었다. 조카 이주천광을 몰래 원자유에게 보내 의사를 타진햇고 원자유 도한 수락했다.

 

이주영은 병사를 일으켜 상당에서 내려왔다. 이주세륭도 그 소식을 듣고 몰래 낙양을 빠져나와 합류했다. 호태후는 왕공을 모두 불러 대책을 의논했는데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서흘이 나서서 말했다.

 

  ” 이주영 작은 오랑캐에 불과합니다.

    숙위병으로 충분히 막아냅니다.

    덩구 멀리서 와서 피곤할테니 

    험준한 곳을 막고만 있어도 저절로 무너집니다.“

 

호태후는 이신궤를 대도독으로 삼고 정계명과 정선호는 하교(황하 다리). 비목은 소평진(하남성 맹진)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는 낙양으로 사람을 보내 원자유를 초청했다.(AD528년 3월) 4월 원자유가 형 팽성왕 원소와 동생 패성공 원자정과 함께 숨어서 황하를 건너 하양(하남성 맹현)에서 이주영과 만났다. 조정에서 파견한 정선호와 정계명은 성문을 열고 이주영의 군대를 받아들였다. 이신궤는 싸움도 없이 하교가 무너진 것을 보고 회군했고 비목도 이주영에게 투항했다. 서흘은 말 10필을 가지고 야밤에 동쪽 연주로 달아났으며 정엄도 고향으로 도망쳤다. 호태후는 모든 비빈을 성 밖으로 내보냈고 본인도 머리카락을 다 깎았다.  

이주영은 백관을 불러 원자유를 맞이하도록 했다.

 

이주영을 보자 호태후는 여러 말이 많았는데 이주영은 옷을 털고 일어나 호태후와 어린 주군 원소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비목이 이주영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 공의 병사와 말은 1만이 넘지 않습니다.

    게다가 전투를 이겨서 들어온 것이 아니고 

    안으로 무너져 내린 것이므로 

    사람들이 우리를 가볍게 여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백관들과 주민들을 크게 처벌하고 주살한 뒤에

    현명한 사람들을 세워두지 않으면  

    곧바로 안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주영이 그럴듯하다고 판단하고 왕공 귀족 고위관료 약 2천여명을 행궁 서쪽에 세워놓고 주살하였다. 승상 고양왕 원옹, 사공 원흠, 의양왕 원략이 이 때 죽었다. 이주영은 군사들에게 원씨가 멸망하고 이주씨가 일어섰다고 외쳤다. 이때부터 사실상 북위는 멸망하고 분열된 셈이다. 이때 북위의 남쪽 영역에 있던 많은 자사현령들이 군현을 들고 양나라로 투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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