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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19 : 거대한 기마제국 북위(W)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11월27일 17시0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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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16> 사공 원역의 처세(AD512)

 

AD512년 위 황제 원각은 인사를 단행하여 거기대장군 및 상서령 고조를 사도로 임명하고 청하왕 원역을 사공, 광평왕 원회를 표기대장군에 임명했다. 고조는 비록 삼사(사공, 사도 ,태위)자리를 지켰지만 요직인 상서령에서 물러난 것이 섭섭했다. 사공 원역은 황제의 동생으로 매우 똑똑한 사람이어서 팽성왕 원협이 고조에게 밉보여 죽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원역이 고조에게 다가가서 넌지시 말했다.

 

  ” 친왕들을 모두 없애십시오.

    왕망은 외삼촌이라는 자리를 이용하여 

    나라를 뺏지 않았습니까?“

 

고조는 원역의 권고가 진심인지 아닌지 의아했지만 큰 가뭄이 들어서 민심이 흉흉해지자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음식을 줄이는 시늉을 하며 재판에서 마음대로 선심을 쓰며 인사를 제멋대로 재단하였다. 원역이 황제에게 나아가 말했다.

 

  ” 옛날 계씨가 태산에서 제사를 지낼 때 공자가 이를 질책했습니다.

    신하된 신분에서 군주가 드려야 할 제사를 지내는 것은 

    군주에 대한 모독이고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지금 음식을 줄이고 죄수들을 방면하면서 

    인심을 펴는 것은 폐하의 일인데

    사도가 나서서 저렇게 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닙니다.        

    화란의 기틀이 여기에 있습니다.“

 

원역이 고조를 제거하자는 말이었다. 황제 원각은 웃고서 대답하지 않았다.

 

<117> 북위의 와호(누워있는 호랑이) 양주자사 이숭(AD513)

 

여름 비가 크게 내려 수양(안휘성 수현, 양주의 치소)이 물에 잠겼다. 북위 양주자사 이숭의  츠근들이 성을 버리고 높은 곳으로 피신하자고 재촉하자 이숭이 이렇게 말했다.

 

  ” 내가 분에 넘치게 지방관이 되어서 수양성을 지키고 있는데

    덕이 없어서 이런 재난을 당한 것이다.

    지금 내게 회남 1만 리의 미래가 달려있는데  

    어찌 내 한 몸을 살려서 

    전한 왕존에게 부끄러움을 당하겠는가.

    여러 백성들은 서둘러 높은 곳으로 피신하게 하되

    나 자신은 왕존처럼 성과 함께 물에 잠길 것이니 

    더 이상 말하지 않으면 좋겠소.“

 

그의 부하 배현은 사태가 어려울 것으로 짐작하고 주민 수 천 가구와 함께 강을 건너 남쪽으로 피신한 다음 이숭이 곧 도망갈 것이며 스스로 수양의 옛 이름인 예주자사라고 떠들면서 양나라에 항복을 요청하였다. 이숭은 배현이 배반한 것이 사실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사람을 배현에게 보냈다. 배현은 아직 이숭이 수현에서 버티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이숭에게 빨리 성을 버리고 북으로 달아나라고 권유했다. 이숭은 장수를 보내 배현을 격파시켰다. 패한 배현은 부끄러워하며 이숭을 볼 면목이 없어서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숭은 마음이 깊고 관대하며 재략이 뛰어났다. 그가 수양에 있는 10여 년 동안 수천 명의 강병을 키워 장래에 대비했으므로 크고 작은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를 누워있는 호랑이(와호)라고 불렀다. 양나라에서는 간첩을 보내 북위 조정으로 하여금 이숭을 의심하게 했으나 원각은 그를 굳게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118> 북위 사도 고조의 익주 대공격(AD514)

   

당시 익주(사천성 지역)는 양나라의 영토였다. 십여 년 전인 AD506년 경 북위의 장수 왕족이 침입하였지만 이약이라는 사람이 잘 방어했다. 그러나 약속과는 달리 이략에게 익주자사를 내리지 않자 이략이 원망했고 양나라 황제는 그런 그를 반란혐의를 씌워 죽였다. 이략의 조카 이묘가 북위로 도망가서 익주를 공격해야한다고 간청했다. AD514년 11월 북위에서는 사도 고조를 대장군, 평촉대도독으로 임명하고 15만 대군을 네 갈래로 나누어 익주를 공격했다. 그리고 회남을 공격하던 부수안을 불러 익주공략에 투입했다. 그러나 다음 해 원각이 죽고 원후가 즉위하자 대군을 물려 돌아왔다.

 

 

<119> 북위 원각 사망과 태자 원후의 계승(AD515)

 

정월 초 10일 갑자기 원각이 병이 나 사흘 만에 죽었다. 나이가 서른 세 살이었다. 시중 최광, 연장군 우충, 첨사 왕현, 중서자 후강 이 네 사람이 여섯 살 태자를 부축하여 황궁으로 들어왔다. 왕현이 날이 밝기를 기다려 즉위식을 올리자고 하자 최광이 천자의 자리를 잠시라도 비워 둘 수 없다고 반대했다. 왕현은 중궁(원각의 부인 고영)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받자고 했다. 최광이 그럴 필요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즉위식을 즉시 올렸다.

 

고황후는 호귀빈(원후의 모후)을 죽일 생각이었는데 그 의도를 알아차린 환관 유등이 급히 후강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후강은 우충에게 보고했다. 우충은 최광과 상의한 끝에 호귀빈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안치하고 삼엄하게 방비하도록 시켰다. 호귀빈은 그 네 사람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120> 고조 피살과 우충의 집권(AD515)

 

사도 고조는 익주정벌의 15만 대군을 이끌고 돌아오고 있었으므로 조정은 매우 불안했다. 고조라는 사람이 죽은 원각의 부인 고황후의 삼촌이고 또 직전 황제 원굉의 부인 고태후의 오빠였으므로 막강한 외척이었다. 우충은 황족인 고양왕 원옹을 부르고 또 임성왕 원징을 상서령으로 삼아 고조를 견제하는 계획을 세워 고황후에게 칙서를 내리도록 했다. 원옹은 탁발굉의 동생이므로 새로 황제가 된 원후에게는 작은 할아버지였고, 원징은 증조할아버지뻘이었다. 

 

시어사 왕현은 원각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원후가 황제가 되면서 원옹과 원징과 같은 원로 황족이 입조하면 권력을 잃을 것이 두려워 고황후의 명령을 고쳐서 고조를 녹상서사, 왕현과 고맹을 시중으로 하는 가짜 조서를 내려 보냈다. 우충은 즉각 왕현을 황제의 병을 제대로 못 고친 것을 빌미로 왕현을 가두고 작위와 관직을 박탈하였다. 그 때 왕현이라는 사람이 또 한 사람 더 있었는데 그 사람은 황제를 곁에서 보필하는 어사중위 및 첨사 왕현이었다. 우충은 이름이 비슷한 것을 이용하여 교활한 왕현을 엮어서 가둔 것이다. 왕현은 억울하다고 외쳤지만 직합장군이 내리 친 칼자루를 맞고 하루 뒤에 감옥에서 죽었다.

    

위의 주군은 고조를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고조는 세상이 뒤바뀐 것을 알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어서 끝없이 눈물만 흘렸다. 2월 8일 상복을 입고 대궐에 들어와 조의를 표했다. 원옹은 우충과 사전에 짜고서 10여 명의 건장한 무사를 보내 곡을 마친 고조를 끌고 가 목 졸라 죽였다. 그런 다음에는 형리를 시켜 조고의 죄상을 고발하도록 하고 고조가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모든 작위를 박탈하여 서인으로 내린 다음 변문을 통해 시체를 꺼내 집으로 돌려보내었다. 우충 일파들은 호귀빈을 황태비로 승격시키고 고황후 고영을 비구니로 만들어 요광사에 거주하도록 했다.(AD515)

 

 

<121> 우충파와 곽조-배식파의 갈등(AD515)

 

우충이 문하성과 영군장군을 동시에 장악하면서 일시에 실권자로 부상했다. 탁발굉 시절인 태화연간(AD477-AD499)에 재정이 부족하여 녹봉을 1/4 줄인 적이 있었는데 우충은 환심을 사기 위해서 원상으로 돌려놓았고 또 직급도 한 등급씩 다 올려주었다. 또한 세금을 대폭 줄였다.  

 

상서 배식은 능력이나 배경에서 뒤지 않지만 승진이 늦음에 대해 항상 불만이 많아서 시골로 내려가 은거하겠다고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마침 정권이 바뀌고 상서가 되자 교만하게 떠들고 다녔다.

 

  ” 내게 상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상서라는 자리가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회의 때마다 여러 관료들을 무식하다고 폄하하고 꾸짖으면서 이민족(선비족과 남쪽 만족)은 높은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없다고 투덜대었다. 선비족인 우충이나 원소가 이를 갈았다. 곽조 또한 동궁의 사부로 있다가 갑자기 출세를 거듭한 사람으로 우충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다. 배식과 곽조가 함께 고양왕 원옹에게 우충을 축출하도록 권유했지만 우충이 그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거꾸로 배식과 곽조를 반란혐의로 모함하는 무고를 올리게 했다. 우충은 황제가 내리는 조서를 조작하여 배식과 곽조를 모두 죽이도록 했다. 원옹 또한 죽이려 했으나 최광이 극구 말리는 통에 죽이지는 못하고 파직시켜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122> 호태후의 임조청정과 삼인방

 

AD515년 8월 6일 호태비를 올려서 황태후로 삼고 우충은 영숭훈위위라는 보안책임자 및 상서령이 되어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유등은 시중 및 승훈태복, 후강은 시중 및 무군장군이 되어 궁중을 실질적으로 장악하였다. 이 세 사람은 고태후가 호태후를 죽이려 할 때 호태후를 보호하여 살린 사람들이었다. (위<119> 참조) 최광은 거기대장군이 되었다. 청하왕 원역은 태부 및 영태위, 광평왕 원회는 태보 및 영사도, 임성왕 원징은 사공으로 임명했다. 

 

여러 사람들이 호태후가 임조청정하기를 요청하므로 9월 5일 조정에 직접 나와서 정치를 보살폈다. 우충을 시중 및 영군장군에서 해임하고 상서령직만 주었다. 그런 뒤 며칠 있다가 문하성 시관들을 모두 불러 우충의 능력과 평판을 물었다. 모두가 능력이 모자라 직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자 우충을 기주자사로 내보내고 상서령 자리에 원징을 앉혔다. 원징은 호태후에게 아버지 호국진을 불러서 업무에 참여하도록 권하므로 호태후 그것을 따랐다. 상서 원소와 태부 원역이 우충의 과거 전횡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그해 10월 호태후는 우충을 태사 및 녹상서사로 다시 불러 등용시켰다.

 

 

<123> 우충의 실각(AD516)

 

북위 감찰총장격인 어사중위 원광이 주문을 올려서 상서령 우충을 탄핵했다. 선무제 원굉이 죽었을 때 그 틈을 타고서 배식과 곽조를 몰아내고 또 여러 황족을 높은 자리에서 쫓아내었으며 조서를 고쳐서 스스로 의동삼사 및 상서령이 되어서 인사를 제멋대로 농단했다는 혐의였다. 호태후는 과거의 공적을 생각하여 더 이상 죄는 묻지 말되 모든 관직을 빼앗으라고 지시했다.      

 

원광은 시중 후강이 우림군 사병을 격살한 것을 들추어내 대벽에 처해야 한다고 했지만 평소에 요리 솜씨가 좋아서 오랫동안 호태후에게 음식을 제공한 공도 있었고 또 호태후를 위기에서 구해 준 공로도 컸으므로 후강의 식읍만 300호 깎고 또 황실의 음식 전담직을 해촉하는 것으로 끝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호태후는 우충의 공훈을 살려서 영수현공으로 책봉했고 최광에게는 평은현후라는 작위를 내렸다. 우충은 얼마 있다가 병으로 죽었다.  

     


<124> 간의대부 장보혜의 간언(AD518)

 

호태후의 아버지 호국충이 AD518년 4월 죽었다. 시호를 태상진공(太上秦公)이라고 불렀다. 간의대부 장보혜가 ‘태상’이라는 칭호가 매우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없고 

    땅에 두 개의 왕이 없습니다.

    태상이라는 것이 ‘상’의 위에 있다는 말이니 

    왕이 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공자도 반드시 이름을 바르게 하라(필야정명호)하셨습니다.

    상이라는 칭호를 왜곡하는 일을 정지하시어

    겸손의 빛나는 복을 받으십시오. “

  

호태후는 그 문제를 가지고 여러 신하들과 의논했는데 모두들 호태후의 눈치를 보느라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장보혜를 각박한 사람이라고 힐책하였다. 호태후는 이렇게 말했다.

 

  ”짐은 효자로서의 일을 하고자 한 것이고

   장보혜는 충신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경은 짐의 무거운 마음을 빼앗지 말 것이나

   앞으로도 소신대로 말하는 것을 중지하지는 말 것이다.“

 

호태후가 죽은 어머니를 위해 큰 절을 지으면서 재정을 위해 면마세를 징수하려고 하였다.장보혜가 증세의 부적절함을 상소하였다. 면마세는 비단과 포 이외에 면 8량과 삼(마) 15근을 세금으로 냈는데 우충이 작년(AD515)집권하면서 전부 없앴던 세금이었다.  

 

  ”  작년에 면마세를 없애놓고 

     이제 와서 다시 국가재정이 어렵다고 세금을 거두시면  

     천하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일이며

     이미 시행된 조치를 버리고 뒤에 잘못된 조치를 내리시면 

     뒤의 조치마저 잃게 되는 법입니다.  

     게다가 이미 창고에는 면과 마가 넘쳐나게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동안 걷어 들여야 할 세금보다 훨씬 많은 양을 

     세리들이 거두어 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정확한 세금을 거두기만 했어도 

     백성들의 저항은 없었을 것인데

     그러지는 않고 덥석 세금을 없애버리는 잘못을 범했던 것입니다.

     또다시 과도한 세금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받을까 심히 두렵습니다.“

 

장보혜는 위의 주군이 조회의 일을 등한시 하고 자주 놀기만 하며 불사에 빠지는 한편 모든 국사를 관리들에게 맡기는 것에 대해 상소하여 올렸다.

 

  ” 생각할 수도 없는 유령의 세계(불교를 말함)에 빠지시면서

    거만의 자금을 백성으로부터 거두시며 

    녹봉을 줄이고 깎아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승려들의 입을 공양하시고  

    구름 같은 궁궐을 아름답게 장식하시면서 요원한 미래의 복을 추구하시며

    새벽부터 신하들이 머리를 수그리고 밖에서 기다리는 데도

    깊은 궁 안에서 놀고만 계시니   

    이것은 시대에 어긋나는 일이며 

    사람과 천지의 신령과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위의를 깨끗하고 신중하게 하시여 

    만방을 위해 모범을 보이시며 

    몸소 교묘에 나가시어 경건한 제례를 드리시고

    친히 삭망의 예에 참예하시어  

    성균에 석전하시고, 

    급하지 않은 사원의 화려함을 철폐하시고, 

    백관의 녹질을 회복하시고,

    이미 진행 중인 궁궐 공사는 서둘러 마무리 하시고, 

    다시 일을 시작하지 않으신다면

    효제는 신명에 통할 것이고 덕 있는 가르침은 사해에 빛날 것이며

    씀씀이를 줄이시고 사람을 아끼신다면 

    백성들은 법과 풍속을 기꺼이 따를 것입니다.“

 

호태후는 장보혜의 말이 귀에는 거슬렸지만 결국 거의 그의 제언대로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수시로 장보혜를 불러들여 국가 정책을 의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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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11월27일 17시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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