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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19 : 거대한 기마제국 북위(Q)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10월16일 17시0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3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83> 북위의 명신 이충

 

AD491년 북위에서는 율령을 개정하고 주군이 직접 송사를 맡아 재결하였다. 중요 사안의 경중과 판결을 이충이 맡아 했는데 황제가 그것을 거의 받아 써 그대로 결정을 내렸다. 이충은 충성스럽고 근면하고 밝게 판단하였으며 신중함과 치밀함을 가지고 판결을 내렸으며 인정이나 친소에 치우치지 않고 판단을 했으므로 그의 결정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84> 가난한 행복, 요씨의 부인 양씨 이모(AD491)

 

풍태후에게 총애를 받던 환관 부승조라는 사람은 죽을죄를 지어도 사면을 받는 조서를 풍태후에게 받았다. 풍태후가 죽고 부승조가 뇌물사건에 연루되어 죽게 되었지만 불사조서 덕분에 죽음을 면하고 집에 갇혀 지내다가 복직되었지만 곧 죽었다. 

 

그가 권세를 부릴 때 친인척이 달라붙어 이익을 챙겼지만 양씨 성을 가진 이모는 홀로 그렇지 않았으며 늘 이렇게 말했다. 

 

   ” 언니가 비록 지금 영화를 누리고 있으나

     동생처럼 걱정 없는 즐거움을 누리지는 못하시지요.“    

 

언니는 그런 동생이 가엽게 느껴져 옷이며 필요한 물건을 이모에게 주었지만 거절했다.

 

  ” 내 남편은 평생 가난하게 살았으므로 

    이런 훌륭한 의복은 오히려 불안하게 만들 뿐입니다.“

 

주는 물건들도 다 버렸고 노비를 주면 거느릴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 그래서 부승조의가족들을 이모를 ‘미련한 이모’라고 불렀다. 부승조가 무너지고 유사가 두 이모를 붙잡아 들였는데 부승조의 어미는 사형을 당했지만 양씨 이모는 행색이 초라하고 또 청렴하게 살았으므로 풀어주었다.    

 

 

<85> 북위의 낙양천도를 위한 거짓 전쟁준비(AD493)

 

북위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추운 지역에 위치해있었다. 수도인 평성은 북위 40도에 위치하고 있고 또 심한 내지이므로 평균 겨울 온도가 영하 15를 넘는 매우 추운지역이었다. 게다가 6월에도 눈이 내리기도 하고 항상 모래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탁발굉은 수도를 낙양으로 옮길 생각이었지만 생활거점을 옮기는 것에 대한 신하들의 반대가 거세었다. 탁발굉은 남쪽 제나라를 정벌한다는 계획아래 천도문제를 숨겼다. 태상경 왕심에게 남정의 점괘를 물었더니 ‘혁(革)’괘가 나왔다. 탁발굉이 기뻐하면서 말했다.

 

  ” 탕왕과 무왕이 이룬 혁명이라는 괘가 나온 것은

    하늘에 호응하고 인심에 부응하는 뜻 일 터이니

    얼마나 길한 괘이냐! “

 

다른 사람들이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중에 상서 임성왕 탁발징이 말했다.

 

  ” 탕왕과 무왕의 혁명과 같은 괘가 혁이라고 나왔다고 해서 

    길상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탁발굉은 매우 불쾌한 표정을 드러낸 후 곧 분을 가라앉히고 반대의견이라도 개진한 것을 칭찬했다. 그리고는 회의가 파한 후 돌아 와 곧바로 탁발징을 불었다.  

 

  ” 아까 ‘혁’괘에 대해 다시 의논해야 하겠소.

    내가 화를 낸 것은 조정 신하들에게 

    내 뜻을 넌지시 알리기 위해 그런 것이니 그리 이해하시요.“

 

그리고는 주변 사람을 다 물리치고 나서 말했다.

 

  ” 평성 이 곳은 정벌하기에는 좋은 땅이나 

    뿌리를 내리고 문치를 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하다.

    이제 분위기를 바꾸어 풍속과 문화를 고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다음 수도를 옮길 생각이다.

    경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탁발징이 말했다.

 

  ” 주택을 주원에 두고 사해를 경략하는 것은

    주나라나 한나라의 전략입니다.“

 

탁발굉이 물었다.

 

  ” 우리 북방인들은 항상 옛 것을 그리워하므로 

  수도를 옮기면 매우 놀라고 동요할 텐데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탁발징이 대답했다.

 

  ” 보통 일이 아니니 보통사람이 간여할 것은 아닙니다.

    폐하께서 높은 뜻으로 결정하신 것이니

    우리들이 뭐라고 항변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칭찬했다.

 

  ” 임성은 나의 자방일세!“     

 

6월 7일 황제는 황하에 다리를 건설하게 하여 군대를 건너가게 하였다. 그리고 직접 군대의훈련을 지도하고 이충에게 용맹한 군사를 선발하는 일을 맡겼다. 또 조서를 내려 보내 양주와 서주의 군사를 징발했다. 준비를 마친 위 주군은 광릉왕 탁발우에게 부절을 주어 6진을 통괄하도록 맡기고 태위 탁발비와 함께 수도를 통치하게 한 뒤 본인이 직접 30만 대군을 이끌고 평성을 출발, 남하하였다. 탁발우가 말했다. 

 

  ” 태위가 의당 통제를 주도하시고

    저는 그의 부관이 되겠습니다.“   

 

위 주군이 말했다.

 

  ” 나이가 든 사람의 지혜와 젊은이의 결단이 필요한 것이니

    너는 사양하지 말아라.“

 

 

<86> 탁발굉의 관용(AD493)

 

북위의 대군이 남쪽으로 내려오는 도중에 탁발굉은 도로 곁에 누워있는 절름발이와 애꾸눈을 가진 사람을 보았다. 탁발굉은 수레를 잠시 멈추고는 그들을 깊이 위로하고 평생 먹을 것과 의복을 제공해 주라고 명령했다. 병사들 가운데 좀도둑 세 명을 체포하여 그들의 머리를 베려하자 탁발굉이 나서서 놓아주도록 지시했다. 대사마 안정왕 탁발휴가 말리면서 말했다. 

 

  ” 주군께서 친히 6군을 이끄시고 

    강표(강너머 제나라)의 도적을 치러 가시는 행군인데

    영내 도적을 그냥 살려주신다면 어떻게 간악함을 제어하실 생각이십니까?“

 

탁발굉이 말했다.

 

  ” 진실로 경의 말이 맞다.

    그러나 제왕에게는 때때로 보통을 넘어서는 은덕이 있어야 한다.

    저 도둑들이 죽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인연이 있어서 짐을 만났으니 

    군법을 어겼어도 특별히 사면해 줄 만하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곁에 있는 사도 풍탄에게 말했다.

 

  ” 대사마가 저렇게 엄하니 제군들은 모두 삼가 조심해야 할 것이오.“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은 이런 탁발굉의 행동에 대해 작은 어짐에 불과하고 또 법을 구부려 사면했으므로 현군이기는 하나 바른 군주의 모습은 아니라고 비판했다.(其为仁也,不亦微乎!况赦罪人以桡有司之法,尤非人君之体也。惜也!孝文,魏之贤君,而犹有是乎)

 

 

<87> 북위의 천도 결정(AD493)

 

수도 평성을 떠난 직후부터 낙양에 도착하기까지 45일 간 계속 장마비가 내렸다. 출정에 나선 군사들은 오랜 비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상서 이충이 탁발굉의 전쟁계획에 진의를 궁금해 하면서 물었다.

 

  ” 이번 거사는 모두가 원하지 않는 거사임에도 불구하고

    폐하께서는 일체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주시지 않으시니

    감히 죽음으로 그 계획을 청합니다.“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실 생각이냐는 질문이었다. 탁발굉이 부월(생사를 결단하는 권위의 상징)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 내가 천하 통일의 대계를 위해 거병했다고 말했는데

    여러 분들이 자꾸 의심하는구나.

    부월은 항상 내 곁에 있는 것이니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

 

으름 짱에도 불구하고 안정왕 탁발휴 등이 나서서 울면서 묻고 나서자 탁발굉이 타이르며 말했다.

 

  ” 사실 내가 군사를 일으킨 것은 

    남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천을 위해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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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를 원하는 사람은 좌측에 서고 반대하는 사람은 우측에 서라.“

 

그제서야 신하들이 환호하며 탁발굉의 진의를 이해했고 또 모두 찬성했다. 이충과목량에게 낙양성을 건설하라고 지시하고 우열을 평성으로 보내 천도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탁발굉은 탁발징이 아니었으면 천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치하했다. 

 

<88> 한현종의 상소문(AD494)

 

중서시랑 한현종이 편지를 써서 황제에게 네 가지를 건의해 올렸다.

 

  ① 지방 관리들을 번거롭게 하지 마시고 서둘러 평성으로 돌아가시고 

     또 신속하게 낙양궁 건축을 마무리 하시고,

  ② 낙양성의 도로를 넓히시고 하수도와 도랑을 통하도록 건설하시고, 

  ③ 황제의 행차에 안전을 강화하시고,  

  ④ 사소한 것은 관심두지 마시고 큰 것만 다스리십시오.

 

그 외에도 인재선발, 형벌, 재정문제 등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해 상언했는데 탁발굉은 매우 훌륭한 제언이라고 칭찬했다. 한현종은 제주자사 한기린의 아들이다. (위<74>참조) 북위는 이 해에 상상(승진), 상중, 상하, 중, 하상, 하중 및 하하(퇴출)의 관료평가 7등급 체계를 확립했다. 3년마다 세 번씩 하던 평가도 3년에 한 번으로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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