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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19 : 거대한 기마제국 북위(G)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8월07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08월03일 14시48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32> 탁발도를 황태자로 세우다(AD422) 

 

아버지 탁발규와 마찬가지로 탁발사도 한식산 후유증에 시달렸다. 동진의 사마비도 한식산의 부작용으로 25세 나이에 죽었는데(AD397) 기후마저 여러 재앙이 이어서 나타나자 탁발사가 두려운 마음에 이렇게 말했다.

 

“ 여러 아들들이 아직 어리니 나 죽은 뒤의 문제(후사)를 계책해 주시오.”

 

최호가 말했다.

 

“ 지금 동궁을 세우시고 현명한 공경을 뽑아서 사부로 삼고

  신뢰하시는 신하를 좌우빈객과 친구로 두셔서

  들어가면 만기를 친람하시고

  나오시면 군사업무를 총괄하도록 해야 합니다.

  장자를 세우는 것은 예의 큰 도리이므로

  성인이 되기를 기다린 연후에 세우신다면 

  천륜을 흔들어 혼란을 부르는 일이 됩니다.”

 

남평공 장손숙에게 물었으나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탁발사는 장자 태평왕 탁발도를 황태자로 세웠다. 탁발도는 당시 열 네 살이었다. 그리고 장손숭과 해근과 안동을 좌보로, 최호와 목관과 구퇴를 우필로 삼아 태자를 보필하게 했다. 그리고 나서 탁발사는 탁발도를 조용히 불러서 이들의 장점을 일러 주었다.  

 

“ 장손숭은 훈구대신으로써 4대를 섬긴 원로이시니 잘 모셔야 하고,

  해근은 말과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고,

  안동은 세상 물정을 꿰뚫어 알고 있는 사람이며,

  목관은 정치의 요령을 통달하고 있어서 내 뜻이 무엇인지 잘 읽을 줄 알며,

  최호는 견문 넓고 암기력이 좋은데다가 

  천문과 사람을 읽을 줄 아는 탁월한 재능이 있고.

  구퇴는 공정하고 근신하는데 모범을 보일 사람이다.“

 

태자 탁발도는 매우 총명하여 신하들이 어려운 문제를 들고 오면 탁발사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 이건 내가 해결할 문제가 아니고 

  장차 너희 주군이 될 태자에게 가서 물어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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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북위의 남진정책(제1차 위송 전쟁 AD422)

 

유송의 시조인 유유가 병으로 사망하자(AD422) 탁발사는 유유가 함락시킨 낙양지역을 공격할 생각을 품었다. 최호가 말렸다.

 

  ” 상대방이 상사를 치르는 동안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아름답지 못합니다. 

    먼저 사람을 보내 조문부터 하시고

    나약한 고아(유유 아들)에게 나라를 잘 구휼하도록 지도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천하에 의롭다는 명성을 얻게 되면

    장강 이남은 저절로 굴러들어오는 법입니다.

    지금 정벌에 나선들 저들 사이에 간극이 벌어지지 않았으니

    이긴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강한 신하가 나타나서 내부가 흔들리는 것을 기다려 

    군사를 보내셔도 늦지 않습니다.“

 

북위 탁발사는 이렇게 물었다.

 

  ” 유유는 요흥의 죽음을 틈타서 공격하지 않았소?

    우리가 유유 죽은 틈을 타는 것이 왜 안 되는 일이요?“ 

    

최호가 대답했다.

 

  ” 요흥의 아들들이 다투어서 호기가 생긴 것이지

    요흥이 죽어서 틈이 벌어진 것이 아닙니다.

    지금 강남에는 그런 틈이 보이지 않습니다.“

 

탁발사는 듣지 않고 해근과 주기와 공손표를 내보내 남쪽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땅을 먼저 차지할지 성을 먼저 함락할지 망설였으나 최호는 남방 사람들이 수성에 강하니까 먼저 땅을 차지한 뒤 조세를 거두고 곡식을 쌓아 두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권하였으나 탁발사는 다른 대신들의 말을 듣고 성을 먼저 공격하였다. 주기는 허창을 함락시켰으며 공손표는 낙양 서북쪽 호뢰관을 함락시켰다. 동쪽 전선으로 진격한 숙손건은 산동성 태안(태산)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 이제 북위의 영토는 회하와 한수 이북까지 확장되었다.(제1차 위송 전쟁)

 

 

<33-2> 탁발사의 죽음과 탁발도의 즉위(AD 423)

 

탁발사는 그 해 갑자기 사망했다. 나이가 32세 였다. 아마도 한식산의 후유증일 것이다. 탁발도가 열여섯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다. 탁발사를 북위의 태종 명원제라 부르고 탁발도를 세조 태무제라고 부른다. 탁발도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고 새로 중신들을 임명했는데 모두가 탁발사가 아꼈던 최호를 비난하고 헐뜯었다. 탁발도는 최호를 집으로 돌려보냈지만 대소 중대사를 항상 그에게 사람을 보내 자문하고 의견을 들었다. 최호에 대한 세평은 이랬다.

 

  ”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희고 깨끗하기가 여인과도 같았다.

    항상 장량(한 고조 유방의 으뜸 책사)과 비교하였는데

    옛 것을 상고하는 것에는 그보다 낫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사마광은 도교에 빠진 구겸지의 술법에 심취해 있었다고 해서 최호를 비판했다.

 


<34> 북위의 장안공격(AD427)

 

당시 장안은 유송이 차지하고 있었다. 원래 장안은 후진의 수도였으나 후진이 동진에게 멸망당하고 나서 동진의 땅이 되었고(AD417) 동진이 역성혁명으로 망하여 유송(유유가 세운 송나라,劉宋) 땅이 된 것이다. 그러나 무너진 후진의 영토 중에서 황하 서북쪽의 대부분의 관중 땅을 차지한 것은 AD407년 하(夏)나라를 건국한 혁련발발이었다. 동진의 명장이자 유유의 오른 팔이던 유목지가 죽자 유유는 장안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건강으로 돌아왔고 장안 땅은 혁련발발이 가져갔다.(AD418) 장안을 차지한 혁련발발은 곧바로 황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혁련발발이 AD425년 사망하고 아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깊어지자 탁발도는 하나라를 정벌할 생각을 품었다. 새로 태위가 된 장손숭이 안된다고 반대하고 나섰다.   

 

“ 저들이 수비에 몰두하면 

  우리 군대는 피곤한 채로 그들과 싸워야 하며

  그 틈을 타고 북쪽의 욱구려대단이 

  우리의 배후를 공격하는 경우 매우 힘들어집니다.“

 

최호는 여러 가지 천문변화를 볼 때 공격하는 것이 옳다고 찬성했다. 탁발도는 자기 생각대로 해근에게 4만 5천, 주기에게 1만 명을 보내 장안을 공격하는 동시에 장손한과 탁발복진 등을 보내 하의 수도 통만(섬서성 정변)을 습격했다.(AD427) 북위의 기습공격을 받은 하나라는 수도를 상규(감숙성 천수)로 옮기고 저항했으나 AD434년 북위의 탁발도에게 멸망한다.  

 

 

<35> 자치통감 사마광의 탁발도 평가(AD427)

 

자치통감에 적힌 사마광의 탁발도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 북위 주군 탁발도는 기골이 장대하고 건장하며 사나울 정도로 용맹스러웠다.

     적의 성을 공격할 때에는 

     스스로 화살과 돌을 맞을 각오로  

     좌우의 사상자들을 들어 날랐으므로 

     마치 신과도 같은 모습이 저절로 드러났다.

     이런 연유로 장수와 병졸이 우러러 복종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 나서게 되었다.

     성품이 원래 검소하고 음식이나 의복이 수수해서 주는 대로 먹고 입었다.

     여러 신하들이 수도의 성과 궁을 튼튼히 짓자고 청하면서 말했다.

        ‘역서(易書)에 따르면 왕은 험한 요새를 지어야 그 나라를 잘 지킨다고 했습니다.

         또한 한나라 소하도 ’천자는 사해가 집이니 

         장엄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권위를 세우겠습니까‘ 했습니다.

     탁발도가 말하기를 “ 옛 말에 이런 것이 있소. 

         ’험하고 아니고가 아니고 덕이 있는가 없는가라고 했소.     

          혁련굴개(하나라 군주)가 흙을 쪄서 험준한 성을 쌓았지만 

          내가 무너뜨리지 않았소. 어찌 성에 달린 문제겠소.

          아직 세상이 평정되지도 않아서 두루 백성들의 힘이 필요한데

          땅을 파고 공사를 일으키는 일은 나는 못하겠소.

          소하를 빗대어 말하는 것은 좋은 비유가 아니요.”

탁발도는 국가재정이 나라근본이라고 생각했으므로 비용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논공행상은 모두 전사자 가족에게 돌아갔으며 친척이나 귀족들이라 할지라도 상급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였다. 장군을 전장으로 보낼 때 친히 작전을 지시해서 내 보냈으며 그 지시를 위반한 자는 거의 다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서 졸병들 중에서도 간혹 용장을 선발하였으며 오로지 그 재능에 따라 자리를 주었지 귀천 여부를 묻지 않았고 그들의 말을 매우 세심하고 정밀하게 들었다. 밑으로 정에 치우쳐 늦추는 일이 없었고 상을 줌에는 귀천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벌을 줌에도 귀하다고 면하는 일이 없었다. 심히 아끼는 자라도 끝까지 관용함이 없었다. 항상 말하기를 “ 법이란 짐에게 천하와 같은 것이다. 어찌 가볍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너무 잔인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사람을 너무 많이 죽였으므로 종종 죽인 것을 나중에 후회하였다.(자치통감 권120)“

              

             

 <36> 북위의 유연 토벌 논쟁 (AD429)과 최호 칭찬

 

유연(柔然)이라는 나라는 선비족 계열의 유목 부족국가로 예예(芮芮), 연연(蠕蠕) 혹은 여여(茹茹)라고도 불렸다. 유목생활을 주로 하는 부족국가이므로 한 곳에 정착하지 않았으나 대체로 동으로는 요동과 고구려에 맞닿고 서로는 신장자치구의 언기(焉耆), 남으로 고비사막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탁발도는 북쪽의 위협인 유연을 가만히 놔두고는 중국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출정에 앞서 우선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나서 전투부서를 배치하고 진영을 설치하였다.

 

태사령 장연과 서변, 그리고 상서령 유혈이 나서서 전쟁을 반대했다. 올 해가 기사년이므로 세 가지 음의 기운(3음: 己도 陰, 巳도 陰, 己巳도 陰)이 있으므로 불길하다는 것이었다. 여러 군신들도 반대에 합세했다. 그러면서 옛 날 비수대전(AD383) 때에 장연이 전쟁에 반대했었는데 그의 예언대로 되었듯이 장연의 예언은 틀린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탁발도는 전쟁에 찬성하는 최호와 반대하는 장연을 불러 서로 대면시켜 논쟁하도록 했다. 최호는 장연과 서변에게 이렇게 말했다.

 

“ 음은 전쟁, 양은 덕행을 의미합니다.

  군주에게 음이란 작은 음은 사형과 형벌이고 큰 음은 전쟁입니다.

  죄 있는 자(연연)를 토벌하려는 것은 큰 형벌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장연과 서변은 유연이 쓸모없는 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최호가 대답했다.

 

“ 유연은 신하로 있었는데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원흉을 주살하고 양민을 수습하여 보호하면서 조세와 부역을 부과하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 아닙니다.

  장연과 서변의 예언이 적중한다고 하지만

  얼마 전 하나라 통만을 함락시킬 때 패배의 징조를 왜 장연은 몰랐습니까?

  알았다면 왜 말하지 않았습니까.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다면 그 또한 불충 아니겠습니까?“  

 

장연은 천문담당자로써 하나라의 혁련창 밑에 있었는데 북위의 공격을 받고 하나라가 망할 것을 왜 알지 못했냐는 것이다. 장연은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최호를 비난하고 나섰다.

 

“ 남방의 도적(유송을 말함)을 두고 북벌을 감행하다니 

  유연이 도망가 버리면 얻는 것이 없을 것이고

  뒤로는 강대국에게 위협을 받는 것이 아닙니까?“

 

최호가 차분히 대답했다.

 

“ 첫째로, 지금 북방을 격파하지 않으면 나중에 남방을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기병이고 남방은 보병입니다. 보병이 침입하는 것은 

         쉽게 신속히 대적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설사 저들이 우리의 남쪽국경을 침범한다고 하여도 

         그들이 땅을 지킬 수가 없는 것은 지난번 장안 점령 때 봐서 잘 아는 바입니다.

  넷째로 지금 유연은 방비가 매우 허술하니 이 때가 아니면 

         다시 공격하기 쉽지 않습니다. 수고로움은 잠시이고 

         편안함은 영구한 것이니 시기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황상께서 이미 마음을 정하셨으니

         무엇으로 그것을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탁발도가 AD429년 5월 29일 직접 대군을 이끌고 북정에 나섰다. 유연의 지도자 흘승개가한과 모든 군대들은 다 도망갔고 탁발도는 30여만 가구와 말 100여만 필을 노획했다. 조금 더 진군하자는 최호와 구겸지의 의견이 있었으나 복병의 습격을 우려하여 탁발도는 회군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때 이틀만 더 공격했으면 유연 무리는 완전히 소탕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하여 탁발도가 심히 후회했다. 흘승개가한이 죽고 그 아들 욱구려오제(=칙련가한)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유연 세력은 크게 약화된 것은 사실이다.  

 

탁발도는 이번 전쟁에서 수훈을 세운 최호에게 시중, 특진 및 무군대장군의 직위를 하사했다. 최호는 특히 점을 잘 보았으며 탁발도가 수시로 불시에 최호의 집에 들러 자문을 구하였는데 때로는 허리띠를 멜 시간이 없을 정도로 급히 들이닥쳤고 아무렇게 음식을 대접해도 꼭 서서 맛을 다 본 뒤에 돌아갔다고 기록되어있다. 탁발도는 최호를 침실로 불러 이렇게 당부한 적이 있다.

 

“ 그대는 지략과 재능이 깊고 넓어

  짐의 조부(탁발규)와 아버지(탁발사)를 진심으로 섬겨

  충성이 삼대에 걸쳤으니

  짐 또한 그대를 가까이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오.

  경 또한 짐의 마음을 알아서 깊이 새겨 충성스럽게 나에게 간해야 할 것이니

  절대로 감추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오.

  때로 짐이 화를 내고 따르지 않는 일이 있을 지라도

  끝내 공의 말을 깊이 귀담아 기억할 것이오.“

 

그리고는 항복한 적군의 장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이 사람이 비록 몸이 허약하여 활이나 창칼을 제대로 잡을 수 없이 보이지만    

  그 가슴 속에는 창칼과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무기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오.

  짐이 정벌을 망설이고 있을 때

  앞뒤로 계획을 세워 전쟁을 이기게 가르쳐 준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오. “

 

그리고는 상서에게 칙령을 내렸다.

 

“ 무릇 국가와 군사에 관한 모든 계책에서

  너희들이 결정할 수 없는 사항들은 모두

  최호에게 물어 자문을 구한 뒤 결정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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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20년08월03일 14시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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