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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19 : 거대한 기마제국 북위(E)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7월24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07월02일 16시0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7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21> 모용린의 중산 장악과 칭제(AD397)

 

중산을 장악하고 칭제한 모용상은 거칠고 술을 좋아했으며 사치하고 또 난폭했다. 선비족의 가장 큰 씨족 종주 가족혼담을 죽인 것부터 시작하여 500여 명의 신하의 목을 날려버리자 모용상에게서 신하들의 마음이 떠났다. 성 안에서 계속 기근이 들어 궁핍했고 백성들이 들 판에 나가 야생풀을 뜯어 오는 것도 안보를 핑계로 금했다. 죽는 사람이 베개를 벨 정도로 많아지자 사람들은 숨어있는 모용린을 맞이하여 주군으로 모시자고 했다. 모용상이 5천 군사를 가지고 세금을 독려하고 있는 중에 모용린이 정령부락 군사를 이끌고 중산으로 들어 와 모용상의 목을 잘랐다. 모용린이 존호를 칭하고 백성들이 들판에 나가 야생 벼를 채취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중산 백성들은 모용린에게 서둘러 나아가 북위에 원수를 갚아달라고 졸랐는데 모용린이 들어 주지 않자 다시 불만에 쌓이게 되었다. 탁발규는 7천 군사 노구(하북성 요양)에 진을 쳤다가 곧 상산(하북성 정정)으로 들어왔는데 이 때 군사들 가운데 역병이 돌기 시작했다. 열 명 중 4-5명이 죽어 나갔다. 민심이 흉흉했지만 탁발규는 군사를 물리지 않고 버티었다.   

 


<22> 마침내 중산을 점령한 탁발규(AD397)

 

중산에 기근이 계속되자 견디지 못한 모용린이 2만여 군대를 이끌고 나가 남쪽 신시(하북성 신낙시)를 점거하였다. 탁발규가 모용린을 크게 격파하고 9천여 명의목을 자르자 대패한 모용린은 다시 퇴각하여 서산(태행산)으로 숨었다가 업으로 도망갔다. 당시 업에는 범양왕 모묭덕이 지키고 있었다.  

 

모용린이 중산에서 나와서 업으로 도망치자 탁발규는 드디어 10월 20일 중산을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중산 성 안에서 항복한 사람만 2만 여명이 넘었다. 후연의 국새도 차지했고 갖은 보물이 다 북위 차지가 되었다. 탁발규는 이것을 모두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동생 탁발고를 죽인 모용상의 묘를 파헤쳐 그 시신을 베었으며 탁발고를 죽이는데 동참한 고패와 정동을 찾아내 그 5족을 멸했다. 23일에는 탁발의에게 명하여 3만의 군사를 가지고 곧 업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용성에 있던 모용보는 모용덕이 업을 잘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격려하는 표문을 보냈다. 모용덕은 모용보에게 남쪽으로 돌아오실 준비를 하라고 권했다. 업은 원래 전연의 고도였으므로 후연으로서도 정통성과 상징성이 큰 도읍이다. 모용보는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고 군사를 징발하여 남쪽 업으로 돌아 갈 계획을 깊이 품었다.(AD397년 12월) 이 후 후연 세력들은 뿔뿔이 흩어져 남연 혹은 북연과 같은 나라를 세우기는 했으나 잔당에 불과했으며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북중국에서의 강국역할은 하지 못했다. 모용보는 용성의 반란세력 난한에게 피살되고 그 아들 모용성이 난한무리를 제거하고 황제 자리를 이었다.(AD398) 

 

 

<23> 귀주(貴主)사건과 탁발규의 반성(AD402)

 

북위의 분무장군 장곤은 재능이 있고 모략의 재능이 뛰어나 탁발규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탁발규가 중원(하남지역)의 명사를 추천하라고 하자 장곤은 주저 없이 노부와 최령을 추천하여 그들이 모두 중용되었다. 최령은 AD397년 처자식을 후연에 남겨두고 북위로 망명 온 사람이었다. 탁발규가 중산을 포위하고도 오랫동안 함락을 시키지 못하여 군량이 크게 궁핍해지자 탁발규가 대책을 물었는데 최량이 이렇게 대답했다.

 

“ 뽕나무 열매가 좋습니다.

  또 올빼미가 뽕나무 열매를 먹고서 새소리를 바꾸었다는 시경의 말씀도 있습니다.“

 

탁발규는 백성들에게 뽕나무 열매를 바치도록 명령했으나 속으로는 매우 수치스럽다고 생각했고 그런 제안을 한 최령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마침 후진이 동진의 영역인 양양을 침공하자 다급해진 동진의 옹주자사(치소가 양양) 치회가 탁발규의 동생 탁발준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이렇게 올렸다.

 

“ 현명한 형님(즉 탁발규)께서 중원을 호랑이같이 활보하십니다.”

 

탁발규는 이 편지가 매우 무례하다고 생각하여 장곤과 최령에게 동진의 황제를 깎아내리는 답서를 보내도록 하였다. 최령은 동진황제를 귀주(貴主)라고 호칭한 답신을 써보여 주었다. 탁발규는 자신을 ‘형’ 비유한 모욕에 대해 동진황제를 ‘귀주’라고 한 것에 대해 화를 내며 말했다.

 

“ 그를 깎아 내리라고 했는데

  그더러 귀주라고 하면 

  나를 형에 비유한 것에 비하면

  당치 않은 것 아닌가? “ 

탁발규는 망명한 최령이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여겨 죽음을 내렸다. 또 그를 추천한 장곤에게도 책임을 물려 축출해버렸다.(AD399)

 

그로부터 2년 뒤 동진에서는 환현이 사실상 군권을 장악하면서 반대세력을 무참히 처형하고 있었으므로 조정이 크게 불안하였다. 황실과 조정대신들은 환현에 대한 항전을 펼치기도 했으나 대부분 실패하여 여러 나라로 망명을 시도하고 있었다. 탁발규는 그런 인사들이 북위로 오기를 은근히 기다렸으나 동진의 망명인사들은 후진이나 남연으로 갈 뿐 북위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의아하게 생각한 탁발규가 연주자사를 보내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연주자사가 이렇게 보고했다.

 

“ 망명인사들은 하나같이 군사력의 강성함과 조정의 공평함을 믿고 

  북위로 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연의 망명인사 최령이 무참히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모두 후진이나 남연으로 가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

 

탁발규는 이 말을 듣고 깊이 뉘우쳤다. 이후로는 대신이나 사인의 허물을 자못 관용으로 용서하였으며 특히 망명한 인사들에 대해 관용과 후대를 아끼지 않았다.(AD402)

 

 

<24> 북위와 후진의 결판 : 탁발규의 시벽전투 (AD402)

 

요흥의 후진은 장안을 중심으로 사방팔방 영토를 확장하여 낙양까지 이르렀고(AD399) 북위또한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고원을 침공하고 있었다.(AD401) 동진하는 후진과 남진하는 북위의 한 판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탁발규는 말 천 필을 요흥에게 보내 혼인을 요구했다. 딸을 달라는 것이다.  

 

요흥은 탁발규가 이미 2년 전에 모용씨를 부인으로 삼아놓고서 자신의 딸을 첩으로 달라는 것이라며 분개하여 사신 하적간을 가두어버렸다. 북위는 후진 요흥의 적대적인 행동에 장군을 파병하여 후진의 영토를 공략하도록 했다.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갑자기 고조되었다. 북위 탁발규는 병주에 군사를 모아서 대비하도록 지시하고 평양(산서성 임분)에는 전쟁양식을 비축하도록 했다. 탁발규는 동생 상산왕 탁발준을 보내 고평(영하자치구 고원)을 침공하게 했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몰혁간과 유발발은 급히 남쪽 진주(감숙성 천수)로 도망쳤다.  또 탁발규는 평양(임분)태수 이진을 시켜 후진의 하동(산서성 하)을 급습하도록 했다. 후진의수도 장안은 크게 놀라서 대대적으로 북위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AD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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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흥은 아들 요홍(AD388-AD417)을 세자로 세운 뒤 직접 4만 대군을 이끌고 장안을 출발하였다. 탁발규 또한 기병 6만의 군사로 태원에서 곽주로 내려왔다. 미리 보낸 200여명의 척후병이 모두 북위에게 사로잡히면서 요흥군의 장군 요평은 군사를 물려 시벽(산서성 임분 서남)에 웅거하였다. 탁발규는 시벽을 완전히 포위하였고 요흥은 4만 7천의 군사로 시벽을 구원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강력한 북위군이 요흥의 지원군을 몽갱에서 격파하고 군사를 네 갈래로 나누어 협공하자 요흥의 군사는 산산히 부서졌다. 시벽의 포위망을 뚫으려는 요평의 시도도 실패하여 저항하던 전군은 물에 익사하였고 성내 2만 주민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시벽이 함락된 것이다. (시벽전투, AD402) 북쪽의 욱구려가한이 비어있는 북위를 틈타 남침하려는 정보를 입수하고서야 탁발규는 서둘러 철군했다. 북위의 태사령 보숭과 조의 형제는 탁발규의 원정을 틈타 후진과 내통하여 내란을 일으키려했다가 발각되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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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탁발규의 인재영입과 문치

 

탁발규는 적국의 망명인사를 적극적으로 우대하였다. 같은 선비족인 서연, 후연, 남연의 망명 인사들을 융숭히 대접하는 것은 물론 강족인 후진이나 한족인 동진의 망명인사들을 환대했다. 최령을 잘못 죽인 것(위<23>귀주사건 참조)에 대한 실책을 통감한 이후로는 더욱 반대하는 세력을 포용하고 관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최굉과 이선이라는 훌륭한 신하를 중심으로 문치의 바탕을 세웠다. 

 

중앙 및 지방 정부 360개 부서를 이부상서 최굉이 총괄하게 하였다. 또 국자태학생 정원을 3천 명으로 늘였고 오경박사를 두어 가르치도록 하였다. 탁발규가 박사 이선에게 물었다.

 

“세상에 가장 좋은 물건이 무엇인가?”

 

이선이 대답했다.

 

“ 책만 한 것이 없습니다.” 

 

탁발규가 다시 물었다.

 

“ 세상의 책은 얼마나 되며 어떻게 모을 수가 있겠는가?“

 

이선이 대답했다.

 

“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군주께서 진실로 얻고자 하신다면 

  어찌 다 모을 수가 없겠습니까? “

 

탁발규의 명에 의하여 전국의 서책은 평성(대동)으로 집결시켰다. 탁발규의 적국인사에 대한 관용과 교육문화 융성 정책이 결부됨으로써 야만족이라 일컫던 선비족 북위가 손자 탁발도 때 북중국을 통일하는 기초를 쌓은 것이다. 탁발규는 여러 아들에게 왕의칭호를 내렸는데 탁발사에게는 제왕 및 상국, 탁발소에게는 청하왕, 탁발희에게는 양평왕 등의 작위를 하사했다.(AD403)

 

 

<26> 한식산복용으로 정신질환 걸린 탁발규(AD409)

 

당시 탁발규는 한식산(寒食散)이라는 약을 오래 복용하고 있었다. 한식산은 동진 사람들이 젊음유지와 피부미용을 위해 복용하던 약으로써 심한 통증을 유발하면서 신경계 부작용과 피부가 찢어지거나 짓무르는 부작용이 있는 약이었다. 이 약을 장기 복용함에 따라 탁발규는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는데 성격이 일정치 않았으며 조급하고 화를 내는 것이 심각할 정도로 불안정적 하였다. 

 

이 때 날씨가 변덕스러워 번개와 천둥이 잦았고 전국적으로 이상기후의 보고가 빈번히 올라오자 점을 치는 사람들은 그것은 탁발규의 주변에서 큰 변고가 일어날 징조라고 경고했다. 탁발규는 근심하고 걱정하며 며칠 동안 먹지 않거나 잠을 자지 못했으며 혼자서 중얼거리며 화를 냈다가 웃었다가 하는 증세를 보였다. 주변 인사들을 믿지 못하여 돌연히 과거의 잘못을 들추어 죽이기도 하였고 혹은 숨소리가 고르지 못하다거나 걸음걸이가 흔들려 절도가 없다거나 말이 틀리거나 하면 그것은 마음속으로 나쁜 생각을 품은 증거라 외치며 칼로 쳐서 죽였고 그 시체를 천안전(황궁) 궁궐 밖에 늘어놓고 전시하기도 하였다.

 

조정대신들 조차 오늘의 자신의 목숨을 보호받지 못하고 백관들도 오로지 죽음을 면하기 위하여 전전긍긍하는 처지였으므로 정부의 관리나 행정기능은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시장에는 도둑들이 넘쳐났고 산에는 산적들이 밤낮으로 출몰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어가 되지 못했다. 마을과 거리에는 사람의 인적이 거의 끊어졌으며 시장도 서지 못하였다. 모든 중신들이 두려움에 탁발규를 피했지만 오로지 최굉은 탁발규의 곁에서 병든 그를 간호하고 시중을 들었다. 최굉은 탁발규 최고의 충신 최호의 아들이다. 탁발규는 자신의 병을 이상기후 때문으로 여겼던 듯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지금은 이렇게 난폭한 정치를 하지만

  재변이 다 지나가고 나면 당연히 다시 깨끗한 정치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朕故纵之使然,待过灾年,当更清治之耳)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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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7월24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07월02일 16시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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