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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19 : 거대한 기마제국 북위(D)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7월17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07월02일 16시04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6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16> 모용보의 중산 포기 문제(AD397)

 

모용보는 모용린이 어디로 도망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모용린이 북경에 있는 모용회의 군사를 빼앗을 것이 두려워진 모용보는 모용륭과 모용농을 서둘러 빠져나가 용성으로 보내 그곳을 장악하도록 했다. 

 

모용보가 어쩔 줄 몰라 당황해하자 모용륭이 나아와 말했다.

 

  “  선제(모용수)께서 즐풍목우(栉风沐雨:바람에 멀리 빗고 빗물로 목욕하다)로

     중흥의 업을 달성하셨습니다.

     그러나 돌아기신지 일년이 채 안되어 천하가 무너졌으니 

     어찌 저의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왜구들이 다시 쳐들어와 골육이 서로 떨어지고 

     백성들은 의심과 겁으로 인해 적을 대적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북쪽으로 옮기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용천지역은 땅이 좁고 가난합니다.

    만약 중국을 아우를 생각을 가지고서 거기에 만족하신다면

    조석으로 다시 일어나 큰 공을 세우는 것은 어렵겠습니다.

    그렇지만 백성을 아끼시고 절용하시며 

    농사를 기르시고 병사를 훈련시킨다면

    수년 안에는 공사가 다 충실하여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옛 조나라든 북위 나라든 

    우리 후연 조정을 흠모하면서 모두들 반기를 들고 우리에게 올 것이어서

    옛 대업을 다시 이룰 것입니다.

    혹 이것이 안 되더라도 험난한 곳을 기대어 스스로를 튼튼하게  

    유유자적하면서 예기를 기를 수가 있습니다.“

 

모용보가 이렇게 말했다.

 

   “ 경의 말이 다 옳소. 한결같이 경의 말을 따를 것이요.”

 

모용륭이 황제를 뵙고 나오자 점을 잘 보는 측근 요동사람 고무가 이렇게 말했다.

 

  “ 전하께서 끝까지 북으로 가지 못하십니다.

    어머니 또한 뵐 수 없을 것입니다.

    주상께서 홀로 가시게 하고 전하께서는 이곳을 지키신다면

    반드시 큰 공로가 있을 것입니다.“    

 

모용륭이 황제도 모시지 말고 어머니 곁에도 있지 못하게 건의하는 고무를 크게 꾸짖었다. 모용륭이 부장들을 모아놓고 떠날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는데 대부분이 머무르자고 했고 오직 사마 노공과 참군 성급만이 황제를 따라 북으로 가자고 했다.

모용농의 부장 곡회구가 모용농에게 말했다.

 

  “ 성 안의 사람들은 모두가 참합피 대전에서 죽은 사람들의 부모형제 들입니다.

    원한이 뼛속 깊이 박혀있습니다.

    누구와 싸우든 죽기로 덤벼들 것입니다.

    지금 다들 북쪽으로 옮겨 가자고 하는데

    대왕께서는 이곳에 계시면서 무리들의 원한을 풀어주신다면   

    북위 군대를 물리치시고 동시에 나중에 편안히 대가를 모시게 될 것이니

    큰 충신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모용농이 곡회구의 말이 참람하다고 생각하여 죽이려 하다가 재능을 보고 살려 주었다.

 

  “ 이와 같이 하면 살수는 있을지라도 죽는 것만 못하다.”

 

3월 14일 모용보는 태자 모용책, 요서왕 모용농, 고양왕 모용륭, 장낙왕 모용성과 함께 1만 군사를 대동하고 중산성을 빠져나와 북쪽 계성에 있는 모용희에게로 갔다. 황제의 어린 아들 하간왕 모용희, 발해왕 모용랑, 박릉왕 모용감이 빠져 나오지 못하자 모용륭이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영접하면서 에둘러 말했다. 말안장을 타 보느라 나갔다 왔습니다.(骳乘) 

 

<17> 황제가 빠져나간 중산성의 수비(AD397) 

 

중산성에서 황제와 측근들이 대거 빠져 나가자 백성들이 당황했고 황제가 빠져나간 성 동문은 사람이 없어서 아예 닫히지도 않고 열려 있었다. 탁발규가 밤에 중산성으로 들어가려다가 왕건이 자신이 노략질 할 것에 뜻을 두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자고 해서다음날로 입성을 미루었다. 동문을 닫아걸고 모용보의 사촌동생 모용상을 주군으로 세워서 방어에 힘을 쏟자 탁발규는 며칠 동안이나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탁발규가 사람을 시켜서 성안 사람들에게 외치도록 했다.

 

  “ 너희 주군은 너희를 버리고 도망가지 않았느냐.      

    헛되이 죽으려고 하는데 

    도대체 누구를 위해 죽으려 한단 말이냐?“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말했다.

 

  “ 무리는 적고 무식하지만

    다시 참합피처럼 몰살당할까봐  두려워서 그런 것이다.

    단 며칠만이라도 연명하기를 원해서 그런 것이지

    우리도 살 것을 희망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탁발규는 왕건 얼굴에 침을 뱉고는 모용보 무리를 추격했지만 따라 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모용보가 중산을 탈출하여 북으로 가다가 정형에서 조왕 모용린을 마주쳤다. 조왕 모용린은 갑작스런 만남에 당황하여 자신의 무리를 포음(하북성 순평)으로 도망시켰다가 망도(하북성 망도)에 주둔했다. 지역 사람들이 모용린에게 양식과 물자를 공급하였으나 모용상이 추격해 오는 바람에 처자식은 모두 붙잡히고 모용린은 다시 산 속으로 도망갔다. 

 

<18> 계(북경)의 모용회(AD397)

 

원래 모용보는 청하왕 모용회를 용성에 주둔하게 했었다. 모용회는 지방에 주둔할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북위가 쳐들어오자 모용보에게 북위를 막겠다고 자처했다. 급한 모용보도 그것을 승낙했다. 모용회는 정남장군 고녹관위와 건위장군 여숭을 선봉으로 삼아 5천 군사로 용성에서 남쪽으로 진격했다. 고녹관위의 군대가 노룡(하북성 천서 북쪽)에 100여일 머무르면서 군마와 소에게 먹일 식량과 군량고갈로 나아가지 못하자 모용보가 크게 꾸짖었다. 고녹관위가 할 수없이 움직였으나 군장들을 준비한다고 또다시 한 달 가량 미적거리다 출발했다. 없는 길을 뚫고 또 미리 첩자를 앞으로 보내 적군의 동정을 염탐하면서 가느라 매우 느리게 진군했는데 사실 군사들이 전쟁에 뜻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본 여숭이 크게 꾸짖었다.

 

  “ 거대한 도적이 하늘까지 넘치고 

    경도(중산)는 위험이 닥치고 있어서 

    필부라도 목숨을 던져 주군을 살리려고 하는데

    여러분들은 주군의 총애와 신임을 받아온 처지에 

    어찌 자신의 생명을 그리도 아낄 수가 있단 말이요.

    만약 사직이 무너지고 신하들의 절개가 짓밟히면

    죽어서도 치욕을 떨칠 수가 없을 것이요.

    여러분은 여기 이렇게 계시지요.

    나는 혼자라도 나서서 그것을 감당하겠소.“ 

 

여숭이 분연히 나서자 고녹관위가 기쁜 마음으로 500여 기병을 붙여 주었다. 여숭은 그 군사를 이끌고 어양(북경시 밀운현)까지 다다랐다. 북위 병사 천여 명을 마주쳤는데 여숭이 외쳤다.

 

  “ 저들은 우리보다 숫자가 많으니

    공격을 먼저 하지 않으면 승산은 없다.“

 

곧바로 북을 치며 직접 공격해 들어가 십여 명의 목을 날려버리자 북위군이 놀라서 뿔뿔이 흩어졌다. 여숭이 기병이 그들을 쫓아가 전멸시키고 돌아왔다. 고녹관위와 모용회의 군사들사기가 한층 높아지면서 의기양양하게 계(북경)방면으로 내려왔다.     

 

<19> 모용회의 군사를 빼앗아 모용륭과 모용농에게 나누어 주다(AD397)

 

3월 16일 모용보가 사람들을 데리고 계에 도착했는데 궁중 친척들은 다 뿔뿔이 흩어지고 없고 오직 고양왕 모용륭만이 수백의 기병을 거느리며 계성을 지키고 있었다. 청하왕 모용회가 2만 기병을 거느리고 와서 모용보를 알현하였다. 그런데 모용회의 얼굴색이 매우 어둡고 불안한 것을 느낀 모용보가 그것을 모용농에게 말했다. 모용농과 모용륭이 같이 말했다.

 

 “ 모용회는 나이가 어린데도(당시 25세)

   오로지 한 방면을 맡아 관할하고 있으니 

   교만하기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다른 뜻이야 있겠습니까?

   저희들이 예를 가지고 책망하겠습니다.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요“  

 

모용륭과 모용농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주군 모용보는 모용회의 군사를 해체하여 모용륭에게 귀속시켰다가 모용륭과 모용농에게 나누어 주었다. 18일 모용보는 계에 있는 모든 부고의 물자를 옮겨 용성으로 옮기도록 명령하고 또 다시 용성을 향해 이동했다. 

 

북위의 석하두가 모용보 무리를 계속하여 쫓아오자 모용보는 싸울 생각이 없었다. 모용회가 나서서  말했다.

 

  “ 병법에 말하기를

    돌아가는 군사는 막지 말 것이며

    죽을 곳에 병사를 두면 

    반드시 그들이 살아난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 두 가지를 다 얻고 있어서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만약 버리고 도망간다면 

    도적은 반드시 틈을 탈 것이며 또한 다른 변란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모용보가 생각을 바꾸어 북위 추격군과 일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모용회가 진지를 구축해서 대비했고 모용농이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북위의 추격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20> 모용회의 반란과 진압(AD397)

 

모용회가 비록 휘하 군사는 빼앗겼지만 그래도 아쉬운 후연 사정에 2만 군사를 보탠 것도 그렇고 추격하는 북위군을 격파하는데도 큰 공을 세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당연히 교만하기가 하늘을 찔렀는데 형님인 모용륭과 모용농이 훈계하고 깨우쳤지만 그럴수록 모용회는 분개하며 반발했다. 그 두 사람은 나이도 많은 삼촌이었고 신분도 높았으며 또 이미 용성을 다스린 적인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자신의 지위 위에 있어서 용성으로 가더라도 대권이 자기에게 있지 않을 것이 두려운 모용회는 반란을 일으키기로 작심했다. 

 

사실 유주나 평주군사들도 최근에 다스렸던 모용회의 은덕을 많이 받은 터라 오래 전에 다스렸던 모용륭이나 모용농이 오는 것을 싫어했다. 유와 평주의 장수들이 이렇게 모용보에게 건의했다. 

 

  “ 청하왕(모용회)의 지략과 용기는 높고 넓어서

    신들은 그와 함께 죽고 살기를 맹세했습니다.

    황제 폐하와 태자 및 여러 왕들께서 계성에 계시면

    저희들이 청하왕과 더불어 중산을 수복한 다음

    황제를 다시 모시겠습니다.“

 

모용보의 주위 사람들은 모두 모용회를 싫어했다. 

 

   “ 청하왕 모용회는 태자가 될 수도 없습니다,

    정신과 안색이 매우 불안정하여 수시로 변합니다.

    다만 그 재주가 남다르므로 쉽게 사람들의 마음을 얻습니다.

    만약 사람들의 의견을 좇아 중산 공략을 허용하시면

    나중에 위첩의 일(춘추시대 위영공의 임시 세자 위첩이 형 괴오를 받아들이지 않은 일) 

    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모용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처했다.

 

  “ 도통(모용회의 이름)은 나이도 어리고 

    능력도 두 왕을 따라가지 못하오.

    짐이 6師를 통괄하면서 모용회에게 

    날개처럼 부탁하려는 것이니

    어찌 그를 내보내어 갈라놓을 수 있겠소.“

 

출정을 원했던 무리들이 실망하며 돌아갔다. 모용보 주변면에서는 모용회를 죽여야 한다고 권고했다. 시어가 구니귀가 그 정보를 모용회에게 전달하며 말했다.

 

  “ 대왕이 믿을 것은 아버지 뿐 인데 

    아버지의 마음이 다른 것을 계획하고 있고 

    또한 거느리던 군사마저 떠났습니다.

    이제 어찌 하시렵니까?

    두 왕을 죽이고 태자를 폐하며

    대왕께서 스스로 동궁에 거하시며 장군과 재상직을 겸하시고

    사직을 바로 잡으셔야 합니다.“

 

모용회는 미적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모용보가 모용농과 모용륭에게 말했다.

 

  “ 반란에 의문의 여지가 없소.

    일찍 제거합시다.“

 

모용농과 모용륭이 말했다.

 

  “ 지금 구적이 안에서 능멸하고  中土가 어지러워

    사직은 누란과 같은 지경입니다.

    모용회가 예 도읍지를 안정시키고 또 어려운 이곳까지 왔으니

    그 위엄과 명예는 사해에 떨치고도 남습니다.

    반역의 조짐이 아직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그런 그를 갑자기 죽이시면

    한갓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은덕에만 상처를 입겠습니까?

    황제의 존엄과 명망에도 큰 상처가 될 것입니다.“

 

모용보는 모용농과 모용륭에게 이렇게 말했다.

 

  “ 모용회 반역의 뜻은 이미 분명해 졌소.

    다만 경들이 자비와 용서를 구하니 차마 일찍이 죽이지 못할 뿐이요.

    아마 하루아침에라도 경들을 해치고 결국은 나에게도 이를 것이니

    때가 오면 후회하지 마시요.“

 

계를 떠나 온 모용보 무리는 4월 6일 광도(요녕성 건창현)에 당도했다. 모용회가 측근 부하 구니귀와 오제염간와 함께 2천 군사를 보내 모용농과 모용륭을 습격하여 모용륭을 장막에서 죽였다. 모용농은 부상을 입고도 구니귀를 사로잡고서 도망가 산 속에 숨었다. 모용회는 구니귀가 붙잡혀 일이 드러나게 되자 서둘로 모용보에게로 가서 말했다.

 

  “ 모용농과 모용륭이 반역을 도모하기에 

    제가 먼저 제거하려 했습니다.”     

 

모용보가 놀랍게도 이렇게 말했다.

 

  “ 안 그래도 그 둘을 의심한 지 오래되었는데

    네가 제거했다니 참 잘한 일이다.“

 

4월 7일 모용회가 계엄을 준비함과 동시에 모용보를 모시고 길을 나섰다. 모용회가 모용륭의 시신을 길 가에 버리려고 하자 여숭이 눈물을 흘리며 굳게 요청하자 허락하여 수레에 싣고서 무리 뒤를 쫓아왔다. 모용농이 돌아와 인사를 하자 모용보가 크게 꾸짖으며 말했다.

 

  “ 네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이냐!”

 

명령하여 그를 체포하게 했다. 묘용희는 아버지가 자기편이라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이런 행동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모용보가 군신을 모아 놓고 모용농의 죄를 다루는 자리를 마련했다. 모용회가 다가와 모용보 곁의 좌석에 앉으려 할 때 모용보는 위군장군 모여등에게 눈짓으로 모용회를 사로잡아 죽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모여등이 칼자국만 몇 개 낼 뿐 제대로 죽이지 못하여 모용희가 빠져 도망갈 수가 있었다. 자신의 군영으로 되돌아 온 모용회는 군사를 챙겨 아버지 모용보를 습격했다. 모용보는 수 백 기병을 이끌고 200여 리를 서둘러 달려 새벽에 용성으로 들어갔다. 모용회가 끝까지 추격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 

 

모용회가 구니귀를 보내 용성을 공략했는데 모용보의 반격을 받고 패퇴했다. 모용회는 사자를 보내 황제 주변의 간신들을 제거할 것과 태자 책봉을 요구했지만 모용보가 들어 줄 리가 만무다. 모용회는 승여와 모든 기물을 거두어들이고는 모용보의 후궁들을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백관을 설치하고 스스로 황태자 행세를 했다.

 

여러 번 전투에서 모용회의 군대가 패하여 군영으로 돌아 와 있는 야밤에 모용보의 시어랑 고운이라는 자가 결사대 100명을 이끌고 모용회 군영으로 잠입하여 죽였다. 놀란 모용회가 10여 기를 데리고 중산으로 도망갔는데 거기서 중산공 모용상이 그를 잡아 죽였다.(AD397년4월9일)  

 

모용보는 모용회의 무리를 모두 사면해주고 고운은 양자로 삼았다. 고운은 고구려 사람으로 모용황이 고구려를 깨뜨리고 주읍을 청산(요녕성 의현)으로 옮겼는데 이때부터 전연 혹은 후연에 신하가 된 부족 사람이다. 그는 매우 침착했으며 말이 적어서 사람들이 잘 알지 못했는데 풍발이라는 장수만이 그의 능력을 알아보아 서로 친한 친구가 되었다. 풍발은 10년 뒤 북연을 세우게 된다. 

 

모용농은 머리뼈가 부서지고 뇌수가 보일 정도로 크게 다쳤는데 모용보가 손수 치료하여 상처가 많이 나았다. 모용농을 좌복야로 삼고 곧 사공 및 영상서령으로 임명했다. 모용회의 부장이었던 여숭이 자기 발로 나타나자 모용보는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사서 중견장군에 임명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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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7월17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07월02일 16시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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