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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19 : 거대한 기마제국 북위(北魏) <A>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6월26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06월26일 13시54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8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 대(代)의 멸망(AD376)과 내부 혼란

대(代)라는 나라는 5호16국의 하나로 AD315년  탁발의로가 성락(지금의 내몽고 화림각이)에 세운 선비계통의 이민족 나라다. AD377년 경 대국은 탁발십익건이라는 사람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내부적으로 계승 문제로 복잡하였다. 탁발십익건은 이전에 나라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동생 탁발고에게 주었다. 탁발고가 일찍 죽자(AD338) 탁발십익건은 탁발고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탁발근에게 계승시키지 않고 나라를 흡수해 버렸다. 탁발근이 원한을 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와중에 탁발십익건의 세자 탁발식과 그의 동생 탁발한마저 일찍 죽었다.(AD371) 탁발식의 아들(탁발규. 북위의 창건자)은 어리고 탁발식의 또다른 처인 모용비가 낳은 아들 또한 너무 어리니 57세의 탁발십익건(AD320년생)으로서는 어떻게 후계를 정할지 난감했다. 이 때 불만이 많던 조카 탁발근이 탁발십익건의 서장자 탁발식군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 모용비 소생이 왕위를 계승하면 너부터 죽일 것이 분명하다.“

탁발식군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몰래 삼촌 탁발근과 짜고 아버지 탁발십익건과 여러 동생들을 암살했다. 이 때 탁발규와 생모 하씨는 하눌이라는 토욕혼추장(하씨의 친정)으로 피신해서 살아남았다. 탁발식군이 반란을 일으키자 탁발 선비부족들은 전진의 부견에게로 달려가 지원을 요청했다. 부견은 유주자사 부락과 함께 20만 대군을 화룡(요녕성 조양)으로부터 대를 공략했다. 이 때 출정한 전진의 장수는 병주자사 구난과 진군장군 등강과 상서 조천, 그리고 전장군 주융 등이었다. 부견은 운중으로 군사를 보내 들어가 탁발식군과 탁발근을 생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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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의 큰 죄악 중에 하나가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다.”    

부견은 탁발식군과 탁발근을 거열형에 처했다. 부견은 대나라를 나누어 동쪽은 유고인, 서쪽은 철불위진(혹은 유위진)에게 나누어 다스리도록 한 뒤 나중에 탁발규가 장성하면 그에게 나라를 물려주도록 조치했다.(AD376) 이로써 AD315년 이후 62년 지속되던 대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2> 어린 탁발규의 고난(AD385)

유고인은 부견의 명령을 좇아서 어린 탁발규를 모시고 선정을 베풀었다. 부견은 그런 유고인의 공로를 높이 사서 포상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최강국 전진 부견의 총애를 유고인이 한 몸에 받자 서쪽을 책임지던 유위진이 불만에 쌓여 반란을 일으켰다. 유고인이 유위진을 격파하고 추격하였지만 부견은 도망가던 유위진을 무마하여 서선우라는 직책을 주어 다독거렸다.(AD376) 
  
다섯 살 나이 때부터 유고인에게 의탁되었던 어린 탁발규에게 어둠이 드리웠다. 유고인의 동생 유두권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탁발규에 대한 분위기가 나빠졌다. 유두권의 아들 유나진이 아버지에게 다가가 뱃속의 병통을 제거해야 한다고 선동했다. 유두권이 그게 누구냐고 하자 그것은 유고인의 아들 유현이라고 했다. 유두권은 조카 유현을 경계시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해칠 음모가 싹트는 것을 알아차린 유현이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유두권을 죽이고 자립했다. 유현은 탁발규도 제거할 생각이었다. 탁발규를 제거해야만 자신의 권력이 공고해 진다고 믿었다. 

유현의 동생 유항니는 형의 탁발규 살해 계획을 몰래 아내에게 알렸고 아내 탁발씨, 즉 탁발규의 고모는 곧바로 탁발규 어머니 하씨에게 알렸다. 하씨는 유현에게 술을 취하게 한 다음 심복 장손건과 원타에게 함께 탁발규를 도망가도록 하였다. 탁발규는 지금의 영하자치구지역인 하란의 외삼촌 하눌에게로 도망갔다. (AD385) 탁발씨 성을 가진 하란 지역 부락지도자들은 열 네 살의 장성한 탁발규를 세워 지도자로 삼고 그 다음해(AD386) 정월에 대왕으로 옹립했다가 석 달 뒤 나라 이름을 위로 고쳤다. 수도도 성락(내몽고 흥화)에서 서남쪽의 정양(내몽고 하림각이)로 옮겼다. 거의 모든 내몽고 선비족이 탁발규를 지지하고 왕국을 건립하자 유현도 아들 유노진과 군대를 인솔하고 들어와 탁발규에게 항복했다. 항복한 유노진이 탁발규에게 형 유건의 땅을 달라고 하자 탁발규가 그것을 허락했다. 땅을 뺏긴 유건은 동생 유거근을 하란부에 인질로 보내 선물을 제공하면서 제휴하려 했다. 

<3> 탁발규의 유위진 격파(AD391)와 서쪽 국경 확장

십년 전인 AD376년 대나라를 멸망시킬 때 부견은 탁발십익건의 어린 아들 탁발굴돌을 장안으로 압송했었다. 그러나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패전한 뒤 전진이 무너지자 탁발굴돌은 서연을 세운 모용영을 따라서 동쪽으로 갔다. 모용영은 탁발굴돌을 신흥(산서성 기주)태수로 임명했다. 유현은 동생 유항니를 보내 탁발굴돌을 영접하고 탁발규의 남쪽 경계서부터 공격해 들어왔다. 탁발규 내부에서도 우환 등이 탁발굴돌과 결탁하여 탁발규를 체포하려는 반란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우환의 장인은 사위의 음모를 탁발규에게 알려줬다. 탁발규는 우환과 그 측근 5명을 죽이고 나머지 가담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북쪽 하란부가 있는 음산산맥으로 피신한 뒤 모용수의 후연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후연 모용수는 모용린을 보내 탁발규를 구원해 주었다.(AD386) 모용린의 지원군이 오기도 전에 탁발굴돌과 하염간은 탁발규를 공격해 들어왔다. 

공격을 받게 되자 북위의 북부대인 숙손보락은 서쪽의 유위진에게로 도망갔다. 탁발규는 모용린의 지원군이 도착하자 연합군을 결성하여 탁발굴돌을 반격했다. 참패한 탁발굴돌도 유위진에게로 도망갔다. 그러나 유위진은 탁발굴돌 무리를 모두 죽였다. 이제 삭방(내몽골 이금곽락기)에 근거지를 둔 유위진은 막강한 군사와 병마를 지니게 되었다.(AD386) 유위진의 위상이 크게 높아지자 후진 주군 요장은 그를 대장군, 대선우, 하서왕으로 삼았고 장안에 근거지를 둔 서연의 모용영 또한 유위진을 대장군 및 삭방목으로 삼아서 자기편으로 끌어드리려고 하였다. 

하란부의 하염간이라는 원로대신은 탁발규의 모후 하씨의 삼촌이면서도 전에 탁발규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었다. 평소 어린 탁발규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이 못 마땅했다. 하염간은 유건과 유거근에게 다가가 자신을 따르라고 요청했다. 유건과 유거근 형제는 하염간의 뜻을 좇았다. 유노진은 격노했다. 유씨 가족 부대를 하란씨가 아니라 탁발규의 대나라에게 복속시키는 것이 본뜻이었다. 유노진은 형 유건과 동생 유거근을 모두 죽였다. 자신에게 귀속하기로 한 유건 형제가 피살되자 하염간은 즉각 유노진을 공격했다. 유노진은 탁발규가 있는 대나라로 도망쳤다. 탁발규는 사신을 보내 하염간에게 군사행동에 대해 경고를 했다. 하염간은 탁발규의 기세에 눌려 군사행동을 자제했다. 유현의 동생 유폐니도 탁발규에게 귀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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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내부 분열하는 하란의 토벌(AD391) 

후연의 모용수가 중산(하북성 정주)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으로 세력을 확장해 가는 AD390년 경 후연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북위 탁발규나 그 너머 후진 요장은 후연과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AD394년 멸망하기 직전인 전진의 부등 또한 감히 후연에게 대적할 세력은 되지 못했다. 그러니 내몽고 오르도스 이금곽락기에 웅거하던 유위진에게 북위와 후진과 전진은 후연의 예봉을 막아주는 방패와 같은 역할을 했던 셈이다. 교활한 유위진은 그 틈을 타고 아들 유직력제를 보내 내몽고 너머 북쪽에 자리 잡은 동쪽 하란부 하눌을 공격했다. 다급해진 하눌은 조카 탁발규의 북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탁발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하눌지원에 나섰다. 그리고 하눌의 요청에 따라 하란 부족을 모두 흡수하여 북위의 근거지인 지금의 산서성 대동지역으로 이주시켰다.(AD390) 

하눌의 동생 하염간은 형이 나라를 통째로 탁발규에게 넘겨준 것이 못 마땅했다. 과거에도 여러 번 탁발규를 시해하려다가 실패한 것도 형님 하눌 때문이지만 나라를 그런 조카에게 그냥 넘겨주는 것이 못마땅했다. 하염간은 형 하눌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AD391) 그러나 평소 신망이 두터운 하눌이었으므로 하염간의 밀모를 전해준 사람이 있었다. 하염간과 하눌 사이에 무력다툼이 일어났다. 북위 탁발규는 종주국 후연에게 하염간 토벌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AD390년 2월 모용수는 양쪽을 다 공격하기로 했다. 모용린을 보내 하눌을 공격하게 하고 난한은 하염간을 공격하게 했다. 그리고 6월에는 모용린이 하눌과 하염간을 모두 포로로 잡았다. 모용수는 하눌과 그의 부족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나 하염간은 중산(하북성 정주)으로 강제 이주시켜 자신의 관할구역 안에 잡아 두었다.

모용수의 넷째 아들이자 영리한 모용린은 탁발규의 잠재력을 간파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기회에 탁발규마저 잡아들여 후환을 끊어버리자고 아버지 모용수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모용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특한 탁발규 또한 후연 조정 내부에서의 자신을 해하려는 움직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마침 사신으로 보낸 탁발규 동생 탁발고를 후연이 인질로 잡고 더 많은 조공을 무리하게 요구하자 후연과의 우호관계를 끊고 서연 모용영과 선린관계를 맺었다. 이로써 후연의 북쪽 국경은 대와 머리를 맞대며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내몽고 북쪽의 서쪽을 다스리던 유위진이 아들 유직력제와 9만 명의 군사를 보내 동쪽의 북위 국경을 침범했다. 탁발규는 5천 군사로 직접 출병하여 유직력제 군사를 격퇴하고 나아가 내몽골 포두지역까지 진출했다. 유직력제는 체포되었고 유위진은 도망 중에 부하에게 참수되었다. 탁발규의 북위 영토가 서쪽으로 크게 넓혀졌다. 탁발규는 유위진의 막내아들 유발발을 추격했으나 설간부락의 추장 태실장이 유발발을 보호해 줌과 동시에 고평태수 몰혁간의 딸에게 장가가도록 해 주었다. 유발발은 나중에 혁련발발로 개명하였으며 AD407년 하나라를 건국하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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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6월26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06월26일 13시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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