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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8 : 꺼져가는 등불, 모용덕의 남연(南燕) <M>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6월05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03월14일 13시53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73) 후연의 고구려 침입(AD400) 

 

당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출생 AD374 재위:AD391-412) 고안이 집권하고 있었다. 형식적으로 광개토대왕은 후연을 섬긴다고 했으나 사실상은 종주국 대접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나이가 광개토대왕보다 한 살 많은 후연 모용성은 AD400년 2월 15일 3만 대군을 몰아서 고구려를 침략했다. 대장군 도독중외제군사 모용희가 선봉에 섰다. 신성과 남소 두 성을 함락시키고 국경을 7백여 리나 개척하고 주민 5천 여 호를 내지로 옮기고 돌아왔다. 모용성은 그런 모용희를 극력으로 칭찬했다.

 

  “ 숙부께서는 용맹하고 과감하여 

    세조(모용수)의 기풍을 그대로 지니고 계십니다.

    다만 넓고 깊은 계략에서만 조금 다를 뿐입니다.“

 

(74) 단기의 반란과 후연 모용성의 죽음(AD400)

 

단기라는 사람은 모용성의 아내 태후 단씨의 오빠의 아들이다. 그의 친척인 단등의 반란에 연루되어 AD400년 5월 3일 요서지역으로 도망을 갔다가 거의 한 달이나 지나 되돌아왔다. 모용성은 그를 사면해 주고 자신의 딸을 주었으며 황궁 안에서 입직하며 살게 해주었다. 

 

AD400년 8월 후연 주군 모용성은 아버지 모용보가 우유부단하고 나약하여 나라를 잃었던 것을 뼈아프게 생각하고 위엄을 세우고 형벌의 엄하게 다스리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스스로 총명하다고 판단하여 자만심이나 시기하는 바가 지나쳐 신하들이 조금만 잘못해도 죽이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그러니 종친은 물론 공경대부들이 밖으로는 떨었고 안으로는 스스로르르 보호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던 중 좌장군 모용국과 전상장군 진여와 단찬이 반란을 모의하다가 잡혀 죽었다. (8월 15일)  

 

닷새 뒤 전장군 단기와 진여의 아들 진흥, 단찬의 아들 단태가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들어와 소리를 지르며 반란을 일으켰다. 모용성이 크게 놀라 적도들을 소탕했는데 이 과정에서 모용성이 상처를 입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29세 였다.   

 

(75) 후연 모용희 등극(AD401)

 

중루장군 모용발과 용종복야 곽중은 정태후에게 가서 나라가 혼란스러우므로 나이 어린 군주보다는 좀 성숙된 사람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조정 중론은 모용성의 아우인 사도 평원공 모용원에게 있었는데 평소 정태후는 당시 열여섯 살 하간공 모용희를 총애하였으므로 태자 모용정을 폐하고 대신 모용희를 궁궐로 들였다.(8월 20일) 모용희는 나이는 죽은 모용성보다 열두살이나 어렸지만 그의 삼촌이었다.

 

다음날이 되어서 궁정의 변고를 알게 된 조정 신료들은 표문을 올려 모용희를 추대하였다. 모용희가 모용원에게 양보하려 했지만 모용원이 계속해서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자 모용희가 천왕에 올랐다.(8월 21일) 사흘 뒤 숨어있던 단기를 체포하여 삼족을 멸한 모용희는 8월 24일 평원공 모용원에게 역모의 혐의를 씌워서 사약을 내렸다. 모용성의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에 원래 태자였던 모용정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가 모용제와 장불 등의 측근에 의해 있었지만 발각되어 모두 죽었다.    

 

(76) 남연 모용덕과 국중의 취중농담(AD401)

 

산동성 광고에서 황제로 등극한 남연 주군 모용덕은 신하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술에 취기가 오르자 이렇게 물었다.

 

  “ 짐은 옛날에 비추어 어떤 군주라 할 수 있는가?”

 

청주자사 국중이 이렇게 말했다.

 

  “ 중흥의 군주이시니 하나라 사소강이나

    후한의 광무제 같으십니다.“

 

기분이 좋아진 모용덕이 그에게 비단 천 필을 하사했는데 국중이 너무 많다고 받지 않았다. 모용덕이 이렇게 말했다.

 

  “ 짐이 조리를 할 줄 아는 것을 경이 잘 알고 있듯이

    짐 또한 경이 조리를 잘 하는 것을 알고 있소.

    경의 대답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나 또한 빈 말로 상을 주었을 뿐이오.“

    

중서시랑 한범이라는 자가 걱정스런 표정을 하며 주군에게 아뢰었다.

 

  “ 천자는 농담하는 법이 없습니다.

    오늘의 담론은 군주나 신하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모용덕은 크게 놀라며 한덕을 칭찬하고 비단 50필을 내렸다. 

 

(77) 남연 모용덕의 어머니 (AD401)

  

모용덕의 어머니와 형은 모두 후진의 도읍지 장안에 있었다. 모용덕은 두홍을 보내 어머니를 모셔 오고 싶었다. 두홍이 조건을 내걸었다.

 

  “ 신이 장차 장안으로 가서 태후(모용덕 모후)를 받들어 오지 못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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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히 서쪽으로 가서 죽음으로 본을 보이겠습니다.

    신의 아버지(두웅)의 나이가 예순을 넘었으니

    빌건대 본현의 봉록으로 오조(검은 까마귀)의 정을 나누게 해 주십시오.“

 

중서령 장화가 발끈하며 나섰다.

 

  “ 두홍이 부임하지도 않고 봉록을 요구했으니 죄가 무겁습니다.”

 

모용덕이 퉁명스럽게 반박했다.

  “ 두홍이 군주를 위하여 죽음으로 짐의 어머니를 구한다면서

    자신의 아버지를 위한 봉록을 요구했는데

    도대체 무엇이 죄란 말인가?“ 

      

요구대로 두홍을 평원현령으로 삼았으나 두홍은 가는 도중에 도적에게 피살되었다. 

 

(78) 고구려의 후연 침공과 정태후의 역모(AD402)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부대가 후연의 영토 숙군(요녕성 북진시)를 침략했다. 후연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AD402년 5-6월) 

 

모용희는 중산윤 부모라는 사람의 두 딸을 첩으로 삼았는데 큰 딸은 융아로 귀인으로 삼고 작은 딸은 훈영으로 귀빈으로 삼았다. 모용희는 귀빈 훈영을 누구보다도 더 사랑했다. 정태후는 원망과 질투에 사로잡혔다. 황제로 만든 것이 자신인데 자신을 버리고 첩과의 사랑에 빠진 것이 참을 수가 없었다. 오빠의 아들인 상성 정신과 더불어 모용희를 폐하고 장무공 모용연(모용보의 아들이고 모용성의 동생이며 모용희의 형)을 세울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역모가 발각되어 정태후에게는 사약을 내리고 모용연과 정신 모두 머리를 잘랐다. 모용희가 사냥하는 도중에 석성 현령 고화 또한 반란을 일으켰으나 재빨리 돌아와 수습하고서 대사면령을 내렸다.

 

(79) 후연 모용희의 사치와 방탕(AD403)

 

후연 황제 모용회는 사치하기 시작했다. 사방 10리나 되는 용등원이라는 정원을 만드는데 2만여 인부가 동원 되었고 그 안에는 50미터 높이의 산을 조성했다. 산 밑바닥 한 면 길이가 500보나 되었다고 한다. 용등원 내부에 곡광해라는 작은 바다와 소요궁을 지었는데 방이 수 백간이 넘었으며 공사는 일 년 이상이나 지나서 끝이 났다(AD404). 공사를 강행하느라 무리한 병사들이 더위와 추위로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80) 남연 모용덕의 어머니 죽음과 동진 공격 포기(AD403)

 

장안에 있던 어머니와 형 모용납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옛 부하 조융이 알려왔다. 모용덕은 소리를 내어 통곡하며 피를 토하였고 그 후유증으로 병이 생겨 눕게되었다. 이 틈을 타서 사예교위 모용달이 궁정지휘관 후적미와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다. 병상에 누워있던 모용덕을 중황문 손진의 도움을 받고 그의 집에 숨었다. 단굉이 군사를 이끌고 궁성으로 들어와 모용달과 후적미의 반란군대를 격파하고 후적미는 죽였으나 모용달은 북위로 도망갔다. 또 산동성 지역인 태안에서 왕시라는 산적이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 태평황제라고 일컬었다. 남연의 계림왕 모용진이 왕시무리를 소탕했다.  

 

모용덕은 밖에서 이주한 사람을 우대하여 세금을 감면해 주고 군역 또한 혜택을 많이 주었다. 그러자 이주민들은 100호를 1호로 숨기고 1000여 장정을 한 명이라고 거짓 보고하는 폐단이 커졌다. 상서 한작의 요청을 받아들여 정밀조사를 한 결과 숨거나 감추어진 5만 8천호를 새로 찾아냈다.   

 

동진에서 망명 온 고아지라는 사람이 모용덕에게 동진을 침공하자고 건의했다.

 

  “ 설사 오나 회는 깨끗하게 처리할 수가 없다고 하여도

    강북만은 거두어들일 수가 있습니다.“

 

중서시랑 한범도 그러기를 재촉했다. 모용덕이 말했다.

 

 “ 먼저 중원을 얻고 나서 형주와 양주를 소탕할 생각이었다.

   공경들과 함께 공격할 전략을 생각해보라.“ 

 

모용덕의 남연은 보명 37만과 기마 5만 3천 필에 수레 1만 7천 승을 가지고 전투훈련에 몰두했지만 동진에서 환현이 새로 정권을 잡고 황제에 올랐으므로 그 세력에 주눅이 들어 공격계획을 중도에 포기하였다.   

 

(81) 남연 고아지의 반란계획(AD404)

 

동진에서 남연으로 도망온 고아지와 유경선은 청주지역 토착세력과 선비족을 규합하여 남연황제 모용덕을 죽이고 동진 황족 사마휴지를 세우려고 모의하였다. 고아지는 모용덕이 총애하는 사공 유궤를 끌어들이려 했는데 유경선이 말렸다.

 

  “ 유공은 노쇠하여 제(산동)에서 편안히 지내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공연히 계획이 누설될 여려가 있으니 그만 두시지요.“

고아지가 끝내  그 계획을 알렸지만 유궤는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모의가 누설되어 유경선은 다시 동진으로 도망가고 고아지와 반란에 참여한 다른 무리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유궤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연루되었다고 해서 같이 처단되었다.(AD404년 3월).

 

이즈음 환현이 유유세력에게 패하면서 동진 조정이 흔들리자 모용덕은 남침계획을 다시 세웠으나 건강이 악화되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다.

 

(82) 후연 모용희의 폭정과 고구려의 침입(AD404)

 

모용희가 아끼는 애첩 부소의(부융아)가 병으로 죽게 되었다. 용성사람 왕영이 스스로 그 녀를 고칠 수 있다고 장담하자 그를 불러 병을 치료하도록 했다. 결국에 부소의가 죽자 화가 난 모용희는 왕영을 황궁 출입문에 걸어놓고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사지를 잘라 죽인 다음 시체에 불을 질렀다. 

 

모용희는 사냥을 매우 좋아했다. 황후 부씨와 함께 북쪽으로는 백록산(요녕성 북쪽 객나심좌기 백랑산 동쪽), 동쪽으로는 청령(용성 동남쪽 200KM), 남쪽으로는 창해까지 오고갔으므로 수행병 중에 호랑이에게 물려 죽거나 얼어 죽은 자들이 5천 가까이 되었다. 

 

후연 주군이 패역하고 인심을 잃어가는 것을 잘 읽고 있던 광개토대왕은 그 틈을 노리고 후연의 동쪽 국경을 줄기차게 치고 들어와 영토를 넓혔다.(AD404년 12월) 갑작스런 고구려의침공에 놀란 모용희는 AD405년 1월 고구려 성을 함락하면서 요동(요녕성 요양시)을 함락시키기를 명령했다. 

 

  “ 먼저 성에 올라가지 마라.

    그 성을 깎아서 평평하게 한 뒤에

    내가 가마를 타고 들어 갈 것이다.“

 

요동성을 지키던 고구려 병사들은 후연왕의 지시에 더욱 결연히 방어대비를 했고 그 결과 후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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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6월05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03월14일 13시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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