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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이 면접으론 뛰어난 인재 못 뽑는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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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3월12일 17시00분

작성자

  • 김동률
  • 서강대학교 교수. 매체경영. 전 KDI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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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 앱의 숫자가 이만오천보를 넘어가자 슬슬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벌써 다섯 시간째 걷고 있다. 둘레길, 등산길도 아니다. 어릴 때 살던 집들을 차례로 돌아보는 순례길이다. 지난 설날, 차례를 지낸 후 동생과 옛날 집들을 찾아보자는데 의기투합해 걷는다는 게 이만오천보를 넘겼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막내격인 나는 깊은 산골에서 부모님 교육열에 이끌려 지방 도시로 이사했다. 개발시대, 하루가 다르게 이촌향도의 인구는 증가했고 우리 집도 서너 차례 이사 끝에 정착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만 세 군데 다녔다. 구석구석 둘러 본 그 시절 옛집들은 이제 흔적도 없다. 고향에 산 세월보다 이제 서울에 산 날이 더 많다. 그래도 고향은 고향이다. 

 

한국, 일본, 중국 등 농경사회에서 고향은 특별하다. 목초를 따라 떠도는 기마민족과 달리 모빌리티, 즉 이동성이 없기 때문이다. 대개 한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라 커서는 이웃 동네 처자와 결혼해 살다가 뼈를 묻게 된다. 당연히 나고 자란 곳이 특별한 의미가 된다. 오죽하면 불길함의 상징인 까마귀마저도 고향 까마귀면 반갑다고 했을까? 그래서 북에서 온 호마(胡馬)는 북쪽 바람을 향해 서고, 남쪽 땅에서 온 월조(越鳥)는 남쪽가지에 앉는다고 했다. 조종사였던 생텍쥐페리가 사막에 불시착했을 때 고향집을 생각하며 버텨냈다고 소설 `야간비행'에서 적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도 서술되었듯이 기마민족으로 분류되면 서양의 경우도 고향에 대한 애착이 상당하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플래툰 같은 전쟁영화를 보면 대부분 같은 고향에서 온 부대원에게 안부를 부탁하고 숨을 거둔다. 텍사스 출신들은 ‘텍사스의 노란 장미’를 부르며 향수를 달랜다. 부시 전 미대통령 부자(父子)는 백악관을 놔두고 친한 외국정상의 경우 텍사스 자신들의 고향 목장에 초대해 바비큐 파티를 벌였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이처럼 고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근원적인 그리움의 대상쯤 된다.

 

그런데 적어도 2020년 한국에서 출신지, 즉 고향을 물으면 안 된다. 특히 직원을 채용할 때 출신지와 출신대학 질문은 절대 금지된다. 고용노동부는 개정 채용절차법에 따라 기업이 구직자에게 출신지를 물으면 최대 오백만원의 과태료를 물도록 했다. 이러다 보니 최근 원자력연구원에 최종면접까지 통과한 박사가 최종서류 확인 과정에서 중국출신에다 중국 국적자인 것이 밝혀져 파문이 일었다. 연구원은 가급 국가보안 시설이라 1959년 창설 이래 지난 60년간 한 번도 외국인이 정규 연구직으로 채용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2018년부터 시작된 블라인드 채용제가 문제였다. 응시서류에 국적과 출신대학을 적는 공간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심사위원들이 중국 국적자인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임용이 취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 실력이 아니라 출신지에 따라 선입견을 갖거나 불이익을 주고받는 것은 혐오스러운 발상이다. 마땅히 지양되어야겠다. 호구(戶口)조사처럼 기업이 채용과정에서 부모 직업 등 시시콜콜 묻는 것도 곤란하다. 그렇다고 출신지나 출신대학까지 아예 묻지 못하게 막는 것은 지나치다. 국가 간,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함에도 불구하고 현행 블라인드 채용제도에서는 특정 우수인재를 영입하거나 추천하면 형사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특히 민간기업의 채용영역까지 고용노동부가 획일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정부만능주의에 다름 아니다. 공정한 기회를 위해 블라인드 채용이 필요하다는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경쟁력을 길러야 하는 민간기업의 인재채용 분야에까지 전면적인 블라인드 채용방식을 강제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것이다.

 

뒤늦게 25개 과학기술분야 정부출연연구소를 관장하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도 출연연 인재채용방안 개선책을 마련했다. 현행 블라인드 채용 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한 것이다. 연구회에 따르면 직원 공개채용 때 ① 이력서 등에 ‘출신학교’를 명기할 수 있고 ② 추천인 및 추천서 제출을 허용하며 ③ 외부위원 선정 제한도 완화하기로 했다고 한다.

 

자동차 번호판도 마찬가지다. 지난 2004년에 빠진 지역 표기를 되살리자는 목소리가 높지만 최근 도입된 세 자리 번호판에는 지역표기가 빠진 디자인이 채택됐다. 일본, 미국은 물론이고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 등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자동차 번호판에 거주지가 뚜렷하게 등장한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만 이처럼 자동차 번호판이나 이력서에 지역표기가 금지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행여 정권이 전체 국민들을 지역차별을 일삼는 미개한 존재로 싸잡아 폄하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설사 일부 수준 낮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같은 일방적인 처사는 너무 나갔다. 양식 있는 보통 한국인들의 자존감에 적잖은 상처를 주는 일이 된다.​<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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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3월12일 17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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