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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7 : 광개토대왕과 후연(20. 끝)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3월06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3월06일 22시16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13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117) 남연 모용초의 귀환(AD405) 

 

모용덕은 모용황의 아들이고 모용수의 동생이며 전진 부견 시절(AD370)에 장액태수로 있었다. 모용덕은 거기서 어머니 공손씨와 형 모용납과 함께 살았는데 모용덕이 부견과 함께 회남지역 남정을 하던 때에 금으로 만든 칼을 남겨두고 떠났다. 모용덕과 모용수가 군대를 일으켜 후연을 다시 세우던 때(AD384년 경) 장액태수는 모용덕과 모용납의 아들들을 모두 죽였는데 공손씨는 늙었으므로 죽음을 면했었다. 모용납의 처 단씨는 임신 중이어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모용덕의 옛 부하 강족 사람 호연평이라는 자가 몰래 공손씨와 단씨를 강족이 살고 있는 서쪽으로 도망시키는 데 성공했고 그 단씨가 나은 아들이 모용초다.     

  

공손씨가 노령으로 죽게 되자 10세가 된 모용초를 불러 금 칼을 주면서 동쪽으로 가서 숙부(모용덕)에게 주라고 부탁했다. 호연평은 모용초를 강족에게서 나와 후량으로 도망가게 하였는데 후량이 AD403년 후진에게 멸망당하여 장안으로 강제 이주 당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 죽게 된 호연평은 자신의 딸을 모용초에게 아내로 주었는데 모용초는 장안에서 미친 척하면서 구걸을 했으므로 모두들 천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오직 동평고 ㅇ요소가 그의인물됨을 보고 요흥에게 추천하였다.

 

  “ 모용초는 풍채와 뼈대가 있어 아름답고 훌륭하므로
   미친 것이 아닙니다.
   관직을 주어 붙들어 두십시오.“

 

요흥이 모용초를 불러 시험해 보았으나 모용초가 일부러 거짓으로 대답하거나 대답을 못 하는척 하였다. 요흥이 말했다.

 

  “ 속담에 이르기를
    ‘아름다운 피부는 바보 같은 뼈대를 싸고 있지 않다(妍皮不裹痴骨)’고 했다.
    저 사람은 허황하고 망령된 사람일 뿐이다.“

 

요흥은 모용초를 밖으로 내보냈다. 모용덕은 형 모용납의 유복자가 살아있다는 말을 듣고 오변이라는 사람을 보내 살펴보도록 지시했다. 오변은 장안에 살고 있는 고향사람 종정겸을 시켜 모용초에게 삼촌 모용덕이 찾고 있다고 알려줬다. 모용초는 누설되어 일을 그르칠까 봐 그 사실을 어머니와 처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성을 바꿔서 종정겸과 함께 남연으로 둘어갔다.

오는 도중에 양보(산동성 태안 동)에 도달했는데 그 정보를 입수한 연주자사 모용법은 이렇게 말했다.

 

  “ 옛날에 거짓으로 위태자를 칭한 일이 있지 않은가?
   지금 그 사람이 그런 부류가 아니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모용법은 모용초를 깊은 예우로 대하지 않았다. 모용초는 모용법에 대해 틈이 생겼다 모용덕은 모용초가 왔다는 말에 미리 기병 300을 보내 환영했다. 모용초가 광고에 도착하여 금 칼을 보여주자 평생 그 칼을 지니고 계셨던 어머니 생각에 모용덕은 통곡하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모용초를 북해왕으로 봉하고 자신의 자식들이 모두 죽고 없었으므로 모용초를 후사로 세울 생각을 품었다. 갖은 고초를 겪었던 모용초는 숙부를 깎드시 모셨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지위 낮은 인사들에게조차 겸손함과 인자함을 보였으므로 온 백성들이 그를 칭찬했고 후사로 마땅하다고 여겼다. 


(118) 남연 모용덕 사망(AD405)과 모용초의 폭정(AD406)

 

오랜 가뭄으로 여수(산동성 치박시를 흐르는 강)가 마르자 모용덕은 걱정으로 병이 들었다.이 때 그의 나이가 60세 였다. 북해왕 모용초는 기도를 올리러 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모용덕이 말했다.

 

   “ 군주의 수명이 길고 짧음은 하늘에 있는 것이고
     여수는 우리가 이래저래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며칠 뒤 모용덕은 신하들과 상의 끝에 모용초를 태자로 세웠다. 아들로 삼은 것이다. 잠시 후 지진이 일어나고 백관들이 두려움에 떨자 모용덕은 서둘러 궁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병세가 악화되어 눈이 어두워지고 말도 못 할 지경이 되자 황후 단씨가 서두러 모용초를 황태자로 올려 공식 후계자로 삼자고 건의했다. 모용덕이 고개를 끄덕여 승낙하자 곧바로 모용초를 황태자로 발표하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모용덕은 곧 죽었다. 
    
모용초가 황위에 오르고 단황후는 황태후로 올렸다.모용종이 도독중외제군사가 되고 모용법은 정남대장군, 도독서양남연사주제군사로 임명했다. 상서령 봉부는 태위, 국중은 사공, 봉숭은 상서좌복야가 되었다. 죽은 모용덕에게는 세종헌무황제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모용덕의 절친인 북지왕 모용종과 단굉은 모용초가 불편해서 외지로 나가기를 원했으므로 각가 청주목과 서주자사로 삼았다. 모용초는 오랫동안 같이 지내던 공손오루를 불러들여 심복으로 삼으면서 무위장군으로 임명하자 태위 봉부가 간언했다.

 

  “ 신이 듣기에 친한 사람은 밖에 두지 않고
    나그네는 안에 두지 않는다 했습니다.
    모용종은 나라의 종친 신하로 사직이 의지하여야 할 기둥이고
    단굉 또한 외척 중에서 명망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옵니다.
    이들이 중요한 계획에 동참해야 나라 일이 제대로 돌아 갈 것입니다.
    지방에 두시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모용종과 같은 기둥은 빡에 두시고
    나그네 같은 공손오루를 곁에 두시니
    신은 속으로 편치가 않습니다.“

 

모용초는 봉부의 건의를 묵살했다. 모용종과 단굉은 이렇게 말했다.

 

   “ 누런 개의 가죽은
     아마도 끝내 여우가죽 옷을 깁는 데에나 쓰일 것이다.“

 

 공손오루가 자신을 비하하는 그들의 말을 전해 듣고는 이를 악물었다.


(119) 모용초 폭정과 봉부의 간언(AD406)

 

남연의 황위를 계승한 모용초는 날로 의심이 심해지고 잔인해졌다. 아마도 그 당시 조정에서는 밖에서 굴러 온 모용초에 대해 속으로 반감이 매우 컸을 것이다. 모용초 또한 조정 내 지지 세력이 전무한 상태였으므로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모용초는 정치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사냥에 빠짐으로써 긴장감을 풀었다.  봉부와 한작은 끊임없이 모용초에게 간언했지만 모용초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봉부와 한작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 나는 과거 어떤 황제와 비교 되는가?”

 

봉부와 한작이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 걸이나 주에 비유할 만합니다.”

 

모용초는 부끄러워하면서도 화를 냈지만 봉부는 천천히 걸어가면서 안색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국중이 봉부에게 물었다.

 

  “ 어떻게 천자에게 말하면서 그리 태연자약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얼른 가서 사과하시지요.“

 

봉부가 말했다.

 

  “ 나이가 일흔이니
    오직 바로 죽을 곳을 찾고 있을 뿐입니다.”
 
봉부는 끝내 사과하지 않았고 모용초도 그의 명망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잠시 묻지 않고  묻어두었다. 공손오루가 권력을 농단하면서 북지왕 모용종을 헐뜯으며 죽이라고 강권했다. 모용종은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용덕이 죽었을 때 연주자사 모용법은 분상하지 않았으므로 모용초가 사신을 보내 그런 모용법을 심하게 꾸짖었다. 어차피 사이가 모용초와 안 좋았던 모용법은 반란 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모용법이 주도가 되어 모용종과 단굉과 함께 모용초에게 반기를 들었다.
 
모용초가 그 정보를 입수하고 모용종을 조정으로 소환했다. 명령을 들어도 들어가서 죽고 거부해도 반역으로 죽는 상황이다. 모용종은 병을 핑계로 불응했다. 모용초는 사람을 보내 모용종은 물론 그와 함께하는 시중 모용통을 함께 처형했다. 정남장군(모용법)부의 사마 복진이 말하기를 봉숭 또한 모용법과 자주 내통했다고 고발하니 모용초는 봉숭 또한 체포하여 가두었다. 태후가 두려워하며 모용초에게 말했다.

 

  “ 봉숭이 황문령 모상을 내게 보내 이렇게 말했습니다.
   ‘황제가 태후 소생이 아니시니
    영강의 사건(AD396년 모용보가 계모 난씨를 죽인 사건)처럼
    될까 봐 걱정됩니다‘
    이 말을 듣고 겁이 나서 그 사실을 모용법에게 말한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저를 엮어서 역모로 보실까 두렵습니다.“
   
모용초는 봉숭을 불러 거열형에 처해 버렸다. 모용초는 곧바로 모용진을 파견하여 모용종의 청주를 공격하게 하고 모용욱은 서주, 모용응과 한범을 보내 연주를 공격하도록 했다. 이들 지역은 모두 모용초에게 반란을 시도한 지역이다. 모용법은 전쟁에서 패하여 북위로 달아났다. 모용은은 한범을 죽이고 모용법과 합류하려다가 역습을 당해 후진으로 피신했다. 모용진이 청주를 빼앗자 모용종은 먼저 억류하고 있던 모용응의 처자식을 모두 살해한 다음 땅을 파고 역시 후진으로 도망갔다. 후진 요흥은 이들 후연의 장수 모용종과 모용응을 시평태수와 시중으로 중용했다.


(120) 후연의 계속되는 고구려 공격 실패(AD406)

 

후연의 모용희는 AD404년부터 2년 이상이나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해 초조했다. 3천리가 넘는 계속되는 행군으로 병사들은 피로하고 병들고 추위와 싸우고 있었다. 고구려 목저성(요녕 빈현)을 공격했지만 또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되돌렸다. 석양공 모용운(모용보의 아들이고 주군 모용희의 조카)은 화살에 마자 부상당했다.


(121) 후연 모용희의 폭정(AD407)

 

후연 주군 모용희는 부인 부씨를 위해 승화전을 건축했다. 흙이 얼마나 들어갔던지 흙 값이 곡식가격과 같을 정도였다. 숙군(요녕성 북녕)의 전군 두정이라는 사람이 아예 관을 싣고 궁궐로 가서 승화전 건축을 반대하는 극진한 간언을 올렸다. 모용희는 두정의 목을 베어버렸다. 

 

부인 부씨가 늦은 여름에 언 생선을 먹고 싶다고 하고 한겨울에 살아있는 생지황이라는 희귀한 식물을 구해 달라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구하지 못하는 사람을 혹독히 다루며 책임을 묻거나 목을 베곤 했다. 그런 부씨가 그 해 4월 죽자 모용희는 혼절하여 한참 만에 깨어났고 마치 부모가 죽은 때처럼 애통해 하며 장례를 치렀다. 궁궐 내에 위패를 세우고 모든 신하들에게 곡하며 눈물을 흘릴 것을 강요하니 어떤 신하들은 매운 것을 입에 물고서 억지로 눈물을 짜 내기까지 하였다.
 
고양왕 모용륭의 아내 장씨는 미인이면서 생각에 재치가 있었는데 모용희가 순장시키려고 장씨가 보낸 장례 예품 신발(수화)을 찌어서 그 속에 낡은 가죽이 들어있다고 핑계대어 죽였다. 부씨 능묘를 만드는데 어마어마한 물자가 들어가는 바람에 부고가 텅 빌 정도였다,모용희는 기쁜 마음으로 능묘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 잘 만들었네.
   나도 곧 그곳으로 갈 것이다.“
 

모용희의 모후 단태후가 모용희의 방종과 폭정을 보다 못해 존호를 버리고 출궁해버렸다. 부씨의 상여가 궁을 떠날 적에 끄는 수레가 너무 높아서 북문을 부수고 나아갔다. 
 

(122) 풍발과 쿠테타와 후연의 멸망(AD407년 7월)   

 

중위장군 풍발이 모용희에게 죄를 지었다. 모용희가 그를 죽이려하자 풍발은 산 속으로 몸을 숨겼다. 모용희의 계속되는 요역과 징발로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높아갔는데 풍만과 풍소불이 사촌 풍만니와 함께 어차피 살 길이 없으니 반란이라도 일으키자고 모의하여 행동에 옮기기로 결의하였다. 몰래 수레에 숨은 다음에 부인들로 수레를 끌게 하여 용성으로 들어 온 뒤 북부사마 손호지의 집에 숨었다. 주군은 모용운으로 삼고자 했으나 병을 핑계로 극구 사양하자 풍발이 다그쳤다.

 

   “ 하간왕은 지금 극도로 포악합니다. 
     하늘과 따이 모두 분노하고 있습니다.
     공은 원래 고씨로 명성있는 고구려 왕족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양자가 될 수 있으며
     이렇게 어려운 기회를 버리려 하십니까?“

 

부축하여 동참시켰다. 모용희가 부씨의 장례를 치르고자 성 밖으로 빠져 나간 사이에 풍발의 동생 풍유진이 무리를 거느리고 궁궐 문을 공격하자 수비병사들이 모두 흩어지며 달아났다. 궁궐로 들어 간 다음 창고의 갑옷을 나누어 입고서 궝궐 문을 닫고 막았다. 중황문 조낙생이 날아나 모용희에게 보고하자 황후의 영구를 남겨두고 급히 돌아왔지만 북문을 열수가 없어서 성 밖에서 유숙할 수밖에 없었다. (7월 26일)

 

다음 다음 날 28일 성 안의 모용운이 천왕에 즉위하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모용희가 물러나 용등원으로 들어갔는데 한 병사가 다가와 모든 수비군들이 한 마음으로 군대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그 말을 반란군을 기다린다는 것으로 잘못들은 모용희는 혼비백산 도망가서 숨었는데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옷가지와 신발만 습득했을 뿐 모용희의 행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중령군 모용발이 중상시 곽중에게 말했다. 이제 반란군이 거의 진압이 되어가는데 황상이 나타나지 않으시니 제가 먼저 성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경은 여기에 머무르다가 황상이 오시면 같이 들어오시고 만약 못 찾으시더라도 제가 안에서 사태를 수습하면 나중에 들어오셔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모용발은 2천의 건장한 군사를 거느리고 그 길로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 안의 장령과 병사들은 황제 모용희가 도착했다고 하자 모두들 무기를 내던지고 항복하기를 요청했다. 그렇게해서 성 안이 수습되었는데 너무 오랫동안 모용희가 나타나지 않고 또 추가적인 군대도 들어오지 않자 모용발의 병사들은 겁이 나서 다시 용등원으로 돌아가 버렸다. 혼자 성 안을 지키던 모용발은 반란군에게 피살되었고 마침내 다음 날 모용희가 미복으로 숲에 숨어 있다가 잡혀 모용운에게 보내졌다. 모용운은 모용희의 모든 폭정의 죄를 열거한 다음에 죽였다. 23세였다. 그의 어린 아들들도 같이 살해되었다. 모용운은 성을 고씨로 고쳤다. 유쥬자사 모용의는 영지(하북성 천안현)를 가지고 북위에 항복했고 북위는 그에게 평주목 및 창려왕으로 책봉했다. 이로써 AD384년 모용수에 의해 세워진 후연이 건국 23년 만에 멸망하고 북연이 섰다. 풍발이 주도한 쿠테타로 북연왕이 된 고운은 풍발을 도독중외제군사로 삼고 풍만니가 상서령, 풍소불이 창려공, 풍홍이 정동대장군, 손호가 상서좌복야 장흥을 보국대장군으로 임명했다.   


(123) 후연 멸망의 원인

 

5호16국 시대에는 수도 없는 영웅호걸들이 활약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사람을 세 명 들라면 전진의 부견, 북위의 탁발도 그리고 후연의 모용수를 드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다 쓰러져 가던 전연 조정에서 능력이 출중하다는 이유만으로 질투를 받고 쫓겨나 전진의 부견 밑에서 전진의 대업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모용수였다. AD383년 비수대전 이후 전진이 산산이 부서질 때 모용수는 변변한 근거지도 없이 형양(낙양 동쪽  정주 서쪽)부근에서 적빈 무리와 같은 오합지중의 지지를 받고 후연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그 후 기주(AD384년)와 업을 장악하고 AD385년 수도를 중산(정주)으로 옮긴 다음 제남(AD387), 청주, 연주, 서주를 차례로 병탄하였다. AD387년에는 적요와 유연을 토멸하였으며 AD391년에는 하란을 몰락시켰다. 다음해인 AD292년에는 적소 무리를 소탕했고 AD394년에는 동으로 산동지역과 서쪽으로 모용충이 건국한 서연을 흡수했다. AD394년 후연은 황하 이북에서 후진과 다툴 정도로 최강국이었다.

 

이런 강국 후연이 멸망의 길로 들어선 단초는 첫째로 무리한 전쟁, 즉 북위와의 참합피 대전패배였다(AD395년 10월) 물론 용렬한 태자 모용보가 일으킨 패배이긴 했지만 이 일로 모용수의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그 다음해에 사망하게 되는 원인이 된 것이다. 지난 10여년가 꾸준히 확장되던 후연의 국토는 참합피 패전 이후로 북위에게 수세롤 몰리면서 영토를 잃게 된다.

 

두 번째 원인은 후계의 실패다. 모용보가 참합피에서 패전하여 능력의 한계를 보여줬고 또 후단황후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모용보 대신에 능력이 있는 그의 동생 모용륭이나 모용농에게 대권을 계승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용수는 끝내 장자 모용보를 지지하고 세웠다. 모용수가 병사하고 나서 이어지는 국난을 모용보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북위 탁발규가 병주(산서성 태원지역)를 침략해 들어왔고(AD396년9월) 다음해에는 호타하에서 또 북위군에게 패배했다.(AD397년 2월) 이어서 모여호와 모용린의 반란이 일어나 결국 후연은 중산을 포기하였고 더 나아가 용성지역의 모용보와 중산지역의 모용상, 그리고 업지역의 모용덕(남연)으로 삼분되기까지 하였다.

 

용성을 근거지로 했던 모용보는 단속골의 반란(AD398)과 난한의 반란(AD398)이 일어나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결국 난한에게 피살되었다.(AD398) 모용보 후계의 실패와 함께 또다른 후연 후계의 실패는 모용희의 등극이다. 모용보의 사망 후 그 뒤를 이은 아들 모용성은 장인인 난한을 제거하는 데 까지는 성공했으나 이어지는 단찬의 반란을 제압하다 얻은 부상으로 사망하고 그 뒤를 모용보의 동생이자 모용성의 삼촌 모용희가 잇게 되었다.

 

모용희는 두 가지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하나는 사치와 방탕이 극에 달했다. 용등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정원을 짓느라고 국가재정을 기울게 하였고 동시에 백성의 원성을 샀다. 다른 하나는 무리한 고구려원정이었다. AD402년, AD403년 그리고 AD406년 등 거의 해마다 광개토대왕의 고구려를 정벌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모용보나 모용성이나 모용희 모두 당시 후연이 처한 상황, 즉 북위 탁발규와 고구려 광개토대왕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무리한 전쟁이나 공사나 폭정을 거듭함으로써 민심을 잃고 국가재정을 고갈나면서 이어지는 반란이 결국 후연을 풍발에게로 넘겨주게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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