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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2> 내부 분열(B)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10월08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19년10월08일 10시39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본문

성(盛)하면 반드시 쇠(衰)한다. 개인도 그렇고 기업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다. 제법 오래 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빨리 그렇게 된다. 왜 모든 것은 반드시 쇠할까. 중국역사를 통틀어 오호십육국과 이어지는 남북조시대처럼 많은 나라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졌던 적은 없다. AD301년 전량에서부터 AD589년 수나라가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키면서 다시 중국을 통일하기까지 약 290년 동안 수십 개 크고 작은 나라들이 명멸했다. 길든 짧든 이들 나라의 패망사를 보면 그것을 관통하는 매우 중요한 철칙이 있는데 두 번째 법칙은 국가분열이다. 모든 나라의 흥망성쇠는 국가내부가 얼마나 빨리 분열하는가에 달려있다. 내부에서 등애와 종회가 분열하면서 삼국을 통일했던 조조의 위나라가 멸망했고 사마염의 친족이 8왕의 난을 일으키면서 서진은 10년 만에 멸망했다.   

 

 ⑦ 사마륜이 조카 사마윤을 제거하다.(AD300년8월) :  8왕자의 난 3막

 

가황후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사마륜은 사지절, 도독중외군사, 상국 및 시중이라는 최고 직책을 떠안고 군림했으나 실제로는 꾀 많고 음험한 중서령 손수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용렬했던 사마륜은 모든 결정을 직접 내리지 못하고 손수에게 의지했어야만 했다. 당장 급한 문제가 유폐된 황제 사마충의 후사를 결정하는 문제였다. 진혜제 사마충의 아들 황태자 사마휼이 장성하여 집권하게 되면 불리하다고 판단한 손수는 사마휼을 죽여 버리라고 해서 이미 가황후 측에게 타살되었다. 황위계승의 적통은 사마휼의 아들 사마장에게 있었으므로 사마장을 황태손으로 삼고 사마륜을 황태손의 스승(황태손태부)으로 정했다. 그러나 이 결정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바로 황제 사마충의 동생 회남왕 사마윤(司馬允)이었다. 사마륜이 쿠테타를 일으키기 전에 사마윤을 황태제로 삼아 황권을 이어받기로 서로 약속을 했었는데 논란 끝에 이 약속이 뒤집어진 것이다. 사마윤 측은 사마륜 및 손수 일당의 속셈, 즉 허수아비 황제를 세워 정권을 독점하려는 계획을 알아차리고는 병사를 모집하여 대비하였다. 사마륜과 손수 일당도 그런 사마윤의 생각을 모를 리가 없었다. 

 

선수는 먼저 사마륜이 쳤다. 사마윤에게 태위(수상)직을 제의한 것이다. 말이 수상이지 속셈은 사마윤의 병권을 제거하고 내보내자는 목적이었다. 사마윤은 거절했다. 손수는 어사 유기를 보내 사마윤을 불경죄로 탄핵했다. 그러나 탄핵조서는 황제가 내린 것이 아니라 손수가 직접 쓴 가짜였음이 밝혀졌다. 사마윤이 즉각 반발하고서 군사 700명을 이끌고 “조왕(사마륜)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외치며 사마륜의 관청을 포위했다. 사마윤의 정예군사는 사마륜의 군사 1천여 명을 즉각 현장에서 처형했다. 사마륜의 관청 내에서도 사마윤에게 호응하는 군사가 있었다. 전투는 8시간 정도 계속되었고 전세는 사마윤에게 유리했다. 중서령 진회도 사마윤을 응원할 생각이었다. 친족 간의 내전을 막아야 한다고 설득하면서 황제에게 “백호번을 내려 보내십시오.”라고 권했다. 그러나 전쟁 중지깃발은 추우번을 내리는 것이지 백호번은 전쟁을 계속하라는 깃발이었다. 진회의 생각은 백호번을 내려 보내 사마윤의 군사를 도와서 사마륜 일당을 제거하려는 생각으로 어리석은 황제 사마충을 우롱한 셈이었다. 황제의 명을 받은 백호군 기병 400명을 이끌고 장군 복윤이 궁궐을 막 나가려는 참이었는데 시중 여음왕 사마건이 다가와 속삭였다. “부귀함을 경과 함께 하겠습니다.” 황제와 진회의 명령과 달리 사마윤을 제거하라는 말이었다. 복윤이 마침내 사마윤에게 가서 말했다. “황제께서 조서를 내리셔서 회남왕 사마윤을 도우라 군대를 보내셨습니다.” 전혀 의심하지 않은 사마윤이 조서를 받기 위해 말에서 내리는 순간 복윤의 기병이 사마윤을 살해하고 그 가족과 군사를 처형하였다. 사마윤의 반란군은 한 순간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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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황제가 되는 사마륜(AD301)    

    

강력한 경쟁자 사마윤이 제거되자 사마륜은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욕을 드러내어 거짓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선제(사마의)의 말씀에 사마륜은 일찍이 서궁(황궁)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다시 말해 아버지 사마의의 생각은 형님 사마소와 조카 사마염으로 이어지는 황통이 아니라 사마소 다음에 동생인 사마륜에게로 이어진다는 뜻이었다는 것이다. 시중이자 아첨꾼인 종실 사마위는 유폐된 황제 사마충을 윽박질러 황위를 선양한다는 조서를 쓰게 하여 황제자리를 빼앗았다. 장림은 모든 황궁을 닫아걸고 황군의 진입을 차단하였다. 사마충은 태상황으로 올려 영창궁에 가두었다. 황태손 사마장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아들 사마과를 황태자로 삼았다. 사마륜의 실세측근 손수는 표기장군이 되어 군권을 장악하였고 장림은 위장군이 되어 황제호위 군권을 잡았다. 그리고 손수는 황위에 도전할 우려가 있는 제왕 사마경(황제 사마충의 사촌형), 성도왕 사마영(사마충의 동생) 및 하간왕 사마옹(사마충의 7촌 당숙)의 군사를 통제하기 위해 자신의 심복을 세 왕의 참모로 심어두었다. 나아가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마경에게는 진동대장군, 사마영에게는 정북대장군의 호칭을 내려주고 각각 군부를 개설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⑨ 사마경의 반란(AD301) : 8왕자 난의 4막

 

그러나 제왕 사마경은 황제자리를 빼앗은 종조부 사마륜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아무리 사마의의 아들이라고는 하지만 황권은 아버지 사마사와 사마소와 사마염으로 이어지는 것이었고 특히 중국 통일의 대업은 사마염이 이룬 것이므로 사마륜이 황제가 되는 것은 황위찬탈에 틀림없었다. 사마경은 군사 1만 명을 모았다. 사마륜은 명을 내려 관습이라는 자를 제왕 사마경의 군사(軍司), 즉 참모부장으로 임명해 내려 보내면서 제왕 사마경의 군사모집을 주동한 왕성과 처목을 참수하게 하였다. 격노한 제왕 사마경이 관습을 처형하고 예주자사 하옥과 동애와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다. 동시에 성도왕 사마영과 하간왕 사마옹과 상산왕 사마예, 그리고 신양공 사마흠에게 편지를 보내 반란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성도왕 사마영은 측근참모 노지와 이 문제를 상의했다. 노지는 사마륜을 타도하는 것은 하늘의 순리이므로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자문했다. 사마영은 20만 군사를 일으켜 성도에서 당시 수도 낙양을 향해 동쪽으로 진군했다. 상산왕 사마예도 태원에서 사마경을 지원하기로 했다. 신야공 사마흠은 망서렸다. 조왕 사마륜은 사마흠에게 친숙부인데 제왕 사마경은 사마흠에게 당질이었으므로 가깝기로는 사마륜이 더 가까웠다. 측근 왕수A(王綏)는 가까운 조왕을 택하자고 했다. 그러나 참모 손순이 크게 외쳤다. “조왕은 흉악한 역적이니 마땅히 죽여야 할 것이지 어찌 가깝고 먼 것을 따지십니까?” 사마흠이 마침내 사마경을 따르기로 하였다.     

 

이때 양주자사 치륭은 어디에 붙어야 할지 모르고 당황했다. 측근 심복 조유와 우담은 조왕 사마륜이 패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니 먼저 군대를 이끌고 허창으로 직접 가는 것이 상책이고, 그렇지 않으면 군사와 장수를 사마경의 군대로 파견하는 것이 중책이며 적은 군사를 보내 돕는 척하는 것이 하책이라고 자문했다. 확신이 가지 않은 치륭이 별가 고언에게 묻자 그는 조유가 말하는 하책이 상책이라고 답했다. 치륭이 결정을 내렸다. “ 나는 두 황제(진혜제 사마충과 현재 황제 사마륜)로부터 은총을 입었으니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립을 지키겠소.” 곁에 있던 유승이 깜짝 놀라며 치륭에게 물었다. “ 여우처럼 상황을 엿보시다가 장차 큰 변혁이 오게 되면 어떻게 가족을 보전하시겠습니까?” 미적거리고 망설이는 것에 대해 분노한 치륭의 장군과 군사들은 참군 왕수B(王邃)를 받들고 치륭 부자를 살해하여 그 목을 사마경에 보내면서 반란에 동참을 선언하였다. 

 

동쪽에서는 제왕 삼경의 군사가 몰려오고 북쪽에서는 성도왕 사마영의 군사가 몰려오자 사마륜의 군사는 궁지에 몰렸다. 거짓으로 표문을 만들어 사마경에게 보내어 말했다 “어떤 군사인지는 모르겠으나 조용히 봉국으로 돌아가게 해 주시면 조용히 물러나겠습니다.” 겁에 질린 사마륜과 손수는 밤낮으로 엽승제사(비방을 써서 저주로 적을 물리치는 굿)를 올렸으며 전쟁 날짜를 무당에게 물었을 뿐만 아니라 몰래 깃털 옷을 입은 사람을 풀어서 신선(왕교)이라고 칭하게 하면서 ‘사마륜이 오래 재위’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궁궐내부에서 조차 반란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사마륜의 군대는 허물어졌다. 손수, 허초, 사의의 목이 반란군에게 날아갔고 손기, 손필, 사담도 피살되었다. 황제호위 장군인 좌위장군 왕여가 조정 8대신을 꿇어앉히고는 사마륜에게 강제로 다음과 같은 조서를 쓰게 하였다. “ 내가 손수에게 잘못을 저지르도록 방치하여 세 왕에게 노여움을 샀으나 이제 손수를 이미 주살하였다. 다시 태상황(사마충)을 모셔서 복위시킬 것이고 시골로 돌아가 평생 농사만 지을 것이다.” 사마륜은 약속대로 사저로 돌아갔다. 그러나 반란군에 동참한 양왕 사마융은 표문을 올렸다. “ 조왕 사마륜은 흉악한 역적이니 살려둘 수가 없다.” 결국 사마륜과 그 아들 사마과, 사마복, 사마건 등이 모두 주살되었다.(AD301년5월13일) 사마륜이 등용한 모든 관료들은 쫓겨나 조정 모든 부서에는 관리들이 거의 없게 되었다. 8왕자의 난의 3막이 끝났다.   

   

⑩ 사마경의 폭정과 충신의 경고

 

AD301년 6월 제왕 사마경이 10만 대군과 함께 낙양에 입성했다. 사마경은 당연히 최고위 직인 대사마(군권) 및 9석을 수여받고 성도왕 사마영은 그 아래인 대장군, 그리고 하간왕 사마옹은 시중과 태위직을 얻었다. 상산왕 사마예(司馬乂)는 무군대장군에 봉해졌다. 이번 반란 초기에 망설였던 신야공 사마흠이 봉지로 떠나면서 대사마 사마경에게 이렇게 말했다. 

 

“ 성도왕 사마영은 황제의 친동생이므로 정치만을 보좌하게 하고 

 병권을 뺏어야만 후환이 없을 것이요.” 

 

상산왕 사마예는 성도왕 사마영에게 

 

“ 천하는 먼저 돌아가신 황제(진무제 사마염)의 대업이므로 

  당연히 적통인 대왕께서 잡으셔야지 

  재종형님인 사마경이 잡아서는 안 됩니다.” 

 

최측근 참모 노지 또한 사마영에게 이렇게 말했다.

 

“ 두 영웅은 함께 설 수가 없는 법입니다. 

  건강이 나쁜 생모 성(成)태비를 모신다고 하면서 성도로 물러나 계시다가 

  사해의 인심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상책입니다.” 

 

항상 그렇듯이 사마영은 노지의 말을 따라  군대를 돌이켜 성도로 돌아가면서 형인 황제 사마충에게 말했다. 

 

“ 이번 일은 재종형님 사마경의 공이며 신은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은 사마영의 겸손한 마음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사마영은 사마경 세력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재빨리 자신의 군사 근거지인 업성(하북 임장현)으로 회군하고 말았다. 그리고 노지의 권유에 따라서 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주고 관 8천개를 마련하여 전사한 사람을 후히 장사지냈으며 죽은 사마륜의 군사 1만 4천명도 잘 매장하도록 도왔다. 

 

대사마 제왕 사마경은 정권을 잡자 바로 교만하고 사치하며 포악해졌다. 시중 혜소가 간곡히 상소했다. 

 

  “ 주역에 말씀하시기를 살았을 때 

    망할 수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했습니다.(存不忘亡 易之善戒)” 

 

소용없었다. 매일 연회를 즐겼고 황제를 알현하여 조정 일을 돌보지 않았으며 교만하게 조관을 대했고 사람을 고르게 뽑아 쓰지 않고 오로지 아끼는 사람들 하고만 가까이 했다. 남양의 처사 정방이란 자가 황제의 잘못을 꾸짖는 상소를 올렸다.

 

“ 연회에 빠져서 즐기는 일에만 탐닉하니 첫째 잘못이고,

  골육종실과는 터럭의간격도 없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함이 둘째 잘못이고,

  변방의 이민족의 낌새가 범상치 아니한데도 개의치 않으니 세 번째 잘못이며,

  전쟁으로 폐한 백성을 전혀 돌보지 않으니 네 번째 잘못이고,

  공은 있어도 상이 없으니 다섯째 잘못입니다.“ 

 

민정책임자 손혜도 다섯 가지 어려운 일과 네 가지 불가능한 일(五難四不)을 사마경에게 올렸다.

 

 “  천하에는 다섯 가지 어려운 일과 네 가지 불가능한 일이 있습니다.

    예리한 칼날을 들고 일서서는 일과,

    영웅호걸을 불러 모으는 일과,

    장사들과 동고동락하는 것과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이기는 것과

    황제를 다시 복위시키는 일이 다섯 가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대왕께서는 이 다섯 가지 어려운 일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네 가지 불가능한 일이 있습니다.

    위대한 명성은 오래 짊어질 수가 없고,

    커다란 공로는 오래 맡을 수가 없으며    

    커다란 권세도 오래 지닐 수가 없고

    커다란 위엄도 오래 머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어려운 일을 행하시면서 그것을 어렵다 생각지 않으시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시면서도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시니 

    신 손혜는 걱정이 앞서는 것입니다.

    공을 이룬 다음에는 물러나는 도리를 생각하셔야 하며

    황제와 친한 사람을 두루 높이 등용하시고

    황제와 가까운 사람을 추천하여 장사왕 사마예나 

    성도왕 사마영에게 중책을 주시어 

    등용시키고 대왕께서는 번국으로 물러나심이 

    아름다움을 오로지 하는 길입니다.

    지금 높은 자리에 있음이 오히려 위험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잊고서

    오로지 권세와 욕심과 향락에 빠지시고 계시니

    비록 높은 누대와 겹겹이 쌓인 울타리 안에 계신다 해도

    영천이나 양적에 계실 때(이 때 사마경이 매우 어려웠음)보다 

    더 위험한 위치에 계심을 깨닫기 바랍니다.“

     

사마경은 손혜의 말을 무시했다. 손혜는 병을 핑계로 사마경을 떠나버렸다. 다른 충신들도 많이 떠났다. 왕표도 사마경에게 경고의 편지를 보냈다.

 

“ 더 나아간다면 후회할 것이고(進則亢龍有悔)

  물러선다면 질려의 고통에 처할 것(退則据于蒺藜)입니다.“

 

이쯤하고 본인과 여러 왕들이 대충 물러나는 것이 좋다는 뜻이었다.  

장사왕 사마예가 황족을 이간질하는 왕표를 죽여야 한다고 편지를 올렸다. 죽게된 왕표가 유언을 남겼다.

“ 내 머리를 대사마(사마경)의 대문에 걸어두어  

  군사들이 제왕을 몰락시키는 것을 보게 하라.“   <다음에 계속> 

 

< 진(晉)나라 황실 가계도와 8왕자 난의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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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시는 진 황제   

①,② 등의 번호는 8왕자 난의 실권 장악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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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10월08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19년10월08일 10시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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