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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품/소재/장비 국산화, 어느 정도 효과 있을까?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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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08월12일 17시05분

작성자

  • 김도훈
  • 서강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전 산업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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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산업 강국이다. 그 증거로는 거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지속적인 대규모 무역흑자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이러한 산업에서의 강점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세계무역질서와 그 속에서 펼쳐지고 있는 이른바 글로벌 밸류 체인을 제대로 활용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 기인한다. 특히 자랑할 만한 분야는 바로 IT 산업인데 그 중에서도 모든 IT 산업들과 그와 연관되어 발전할 것으로 기대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  신산업들이 필수적으로 사용해야 할 핵심요소인 반도체,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세계 최강자로 우뚝 선 것으로 인정받아 왔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하고 있는 분야의 아킬레스건을 일본이 건드리고 말았다. 비록 부가가치로는 보잘 것 없는 수준이지만,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산업이라는 최강의 전사가 힘을 쓰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세 가지 필수 소재, 즉 불화수소(에칭가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EUV 포토레지스트 등의 한국 수출을 규제하고 나선 것이다. 수출규제의 명분이야 어떻든 일본의 수출규제는 한국산업 전체에 큰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가장 경쟁력이 뛰어나고 가장 점유율이 큰 산업들이 위기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수출규제는 세계의 자유무역질서와 글로벌 밸류 체인으로 엮어진 세계 산업질서에도 큰 파장을 미칠 것이 틀림없다. 일본의 수출규제에 동감을 표명하는 나라가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렇지만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나라는 역시 한국이다. 한국산업의 핵심 경쟁력이 몇몇 작은 소재들의 결핍으로 인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8월 5일 산업통상자원부를 필두로 한 정부 12개 부처가 공동으로 발표한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대책’은 시의적절 했다. 일단 한국산업의 아킬레스건을 고쳐나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기에 산업계에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데 성공했고, 더 나아가 일본이 이후에 ‘화이트 리스트에서 배제하는 과정에서 예상되었던 추가적인 규제품목 지정의 유보, 수출규제 품목으로 지정했던 EUV 포토레지스트의 수출 허용 등’ 유화적인 조치들을 내놓게 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통상외교 노력과 병행되어야 

 

정부가 발표한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대책’이 우리 산업의 미래를 가로막을 수 있는 아킬레스건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 산업의 경쟁력이 제대로 발휘되는 상황은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세계무역질서가 유지되고 그와 함께 전개되는 글로벌 밸류 체인을 핵심으로 하는 세계 산업질서 속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분야의 경쟁력을 계속 키워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계 모든 산업들 또한 이러한 한국산업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일본이 그동안의 자국 통상기조와도 동떨어지고 세계 무역질서와 산업질서에 위협을 가하는 매우 이례적인 수출규제를 취한 조치 자체를 시정하려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과의 문제 해결을 위한 직접적인 통상외교도 지속적으로 전개되어야 하겠지만, 세계 무역질서와 산업질서에 대한 위협이 되는 점을 부각하여 통상외교의 우군들을 만들어 간접적으로 일본을 압박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필요성은 두 가지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는 우리나라나 일본 모두 자유로운 세계무역질서와 효율적인 세계 산업질서의 혜택을 받아서 지금까지 세계 최강의 산업 경쟁력을 키워온 당사자들인 만큼 이러한 질서들을 지켜내려 하는 기조를 견지하는 것은 두 나라의 의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그렇지 않아도 미중 무역분쟁으로 야기되고 있는 세계적인 보호무역주의 움직임을 완화시키는 것이 우리 정부의 정책기조이기도 함으로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보호무역주의를 배격한다는 통상외교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산화 노력의 실효성, 면밀히 검토할 필요

 

정부의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대책’의 명분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대책의 실효성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가장 초기의 대책으로 내세운 ‘수입국 다변화’ 대책의 강력 추진이 눈에 띈다. 어쩌면 이 대책의 진정성을 담보하는 자세로서 일본의 유화적인 움직임을 이끌어낸 핵심조치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우리 산업이 향후 착수하려는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국산화’ 노력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주는 징표일 수도 있다.

 

되돌아보면 우리나라가 섬유, 신발 등의 경공업으로부터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려고 하던 시기에 일본이 자랑스럽게 사용하던 산업 용어 중에 ‘원셋 이코노미’라는 말이 있었다. 그 뜻은 일본이 경쟁력을 가진 자동차, 전자, 기계 등의 주요 산업들에서 일본은 최종제품은 물론 소재, 부품. 장비 등 산업의 전주기에 걸친 모든 분야에서 경쟁력을 가지고 있어서 자국 내에서 이들 모든 분야를 영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명이기도 했다. 

 

그런 일본의 ‘원셋 이코노미’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많은 중화학공업들에서 ‘조립/가공’ 분야의 경쟁력을 무기로 무섭게 추격하기 시작한 한국, 대만 등의 신흥공업국들의 등장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 산업계는 조립/가공 공정을 이들 신흥공업국들에 물려주기도 하고, 때로는 임금이 싼 동남아 국가들에 미리 이 공정을 이전하여 경쟁력을 지키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최종제품에서의 경쟁력 저하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핵심 소재/부품/장비들의 경쟁력은 일본산업이 쥐고 있었고 신흥공업국들의 일본에 대한 이 분야 의존도는 절대적인 수준이었다. 이러한 만성적인 대일적자를 넘어선 계기가 바로 우리나라의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된 부품/소재/기계류 국산화 노력이었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이제는 대부분의 중화학공업 분야에서 우리나라는 최종제품에 못지않게 많은 소재/부품/기계류 분야에서도 높은 국제경쟁력을 누리는 산업국가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나라의 초기 조립/가공 분야 투자에서든, 그 이후의 부품/소재/기계류 국산화 노력에서든, 항상 우리 산업은 수출시장을 염두에 두고 동 분야들의 경쟁력을 높여 왔다는 점이다. 즉, 시장의 크기가 담보되어 있는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국산화는 물론 세계시장으로의 수출에서도 큰 성과를 보여 왔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 산업이 성공을 거둔 2000년대 초의 부품/소재/장비 분야에서의 투자는, 미래의 산업성장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정부가 국산화하려는 이른바 ‘핵심소재’ 분야는 이런 우리나라의 산업발전 기조와는 사뭇 조건이 다르다. 우선 시장의 크기가 매우 작고 수요자가 소수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새롭게 투자해서 오랫동안 경쟁력을 키우는 노력을 하더라도 기대되는 수익이 매우 작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바로 이 점 때문에 일본의 핵심소재 기업들이 자신들의 오랫동안의 경험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경쟁자들의 등장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지막 보루를 지켜왔는지도 모른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의 국산화에 엄청난 투자와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기대수익이 작은 분야에 집중적인 시간과 투자를 투입할 중소/중견기업들이 많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고, 더욱이 이들은 세계시장에서는 물론 최종제품들을 생산하는 우리 대기업들에 판매하는 시장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어려움을 정부가 해소해 주는 일이 지난한 것임은 산업/기술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이 분야에서 실적을 내고 있는 대부분의 기업가들도 지적하고 있는 점을 정부도 각별히 염두에 두고 이 대책을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전방위적 투망식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아

 

이번 정부의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대책’에서 지적해야 할 가장 큰 문제점은 (빠른 시간 안에 준비해야 했다는 데도 기인하겠지만) 지나치게 전선을 광범위하게 펼쳤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투자할 분야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마련된 7조원이 넘는 정부 예산 책정도 그렇고, 향후 5년간 공급안정성을 확보하겠다는 분야를 정부가 이런 내용을 발표할 때 흔히 사용하는 ‘100대 품목’이라는 숫자를 제시하고 더욱이 ‘20대 품목’에 대해서는 1년 내에 공급안전망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를 내세움으로써 이 대책의 구체성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물론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문제가 되는 품목들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찾아내어 투자하는 노력이 동원되겠지만, 이렇게 숫자를 내세움으로써 산업계에 주는 신호가 매우 흐리게 되어 버렸다는 점은 매우 아쉽다.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점은 이러한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대책’의 추진 과정에서 대기업들의 ‘테스트 베드’로서 나아가 ‘수요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자칫 이들을 치열한 국제경쟁 상황을 도외시한 채, 소재 분야 중소/중견기업들의 ‘후견인’ 노릇을 하라고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곤란하다는 점이다. 이번 대책의 성공 여부를 중소/중견기업들의 치열한 기술개발 노력보다는,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과감한 투자 결정보다는, 대기업의 양보에 방점을 찍어서는 곤란하다. 기실 이들 대기업들이 경쟁력을 보이고 있는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야말로 약간의 경쟁력 저하로 인해 시장의 판도가 크게 바뀔 수 있고, 더욱이 후발국인 중국의 추격이 만만치 않음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오히려 이 분야 대기업들 자신들도 이미 핵심 소재들의 조달선 다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음으로, 시장에서 대기업들 스스로가 능력과 의지를 갖춘 중소/중견기업들을 파트너로서 찾아내어 이들의 기술개발 능력을 지원해 주는 기업들 간의 자발적인 협력 가능성을 열어주는 데 정부가 노력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산업 생태계의 질적 심화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

 

그렇게 막강하게 보였던 우리 산업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려준 일본의 수출규제는 오히려 우리 산업 생태계의 질적 심화 필요성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질적 심화 과정을 단순히 일정한 기간 내에 몇몇 성과를 내는 식으로 추진하지 않도록 해야 하고, 더욱 중요한 점은 이렇게 촉발된 산업 생태계의 질적 심화 노력이 상황이 급변하여 제자리로 돌아가면 다시 잊혀져버리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주어진 아킬레스건 개선이라는 숙제는 우리 산업의 잠재된 오랜 숙제였기 때문이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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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08월12일 17시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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