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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에 앞장 선 여성들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5년04월03일 19시23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9일 11시55분

작성자

  • 정현주
  • (사) 역사ㆍ여성ㆍ미래 상임대표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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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구국에 앞장 선 여성들

 

  1898년 북촌여성들의 중심이 되어 발표한 ‘여권통문’은 한국의 여권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들은 여성도 남성과 같은 인간이므로 똑같이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고, 국가가 여성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가가 여학교를 설립하지 않자 직접 순성여학교를 설립해 운영했다. 

 

국채보상운동에서부터 단체로 구국운동에 나서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로 인해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여권운동에 더해 나라를 구하는 구국운동에 여성들이 직접 뛰어들게 되었다. 갑오농민전쟁이나 일제에 저항하는 의병운동에 여성들도 참여했다. 대표적인 여성의병운동가는 강원도에서 의병운동에 나섰던 윤희순(1860-1935)이다.  윤희순은 여성의병장으로서 ‘안사람의병가’를 지어 의병 활동을 격려했고, 직접 의병활동에도 참여해 군자금 모금, 무기제작, 군사훈련에도 참여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조선은 국권을 상실하는 민족적 비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여성들이 단체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에 나선 것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서 부터였다. 대구 남일동에서 ‘패물폐지부인회’를 조직하여 전국의 부녀 동포에게 격문을 보냈다.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는 남녀의 차이가 없는 것인데, 여자는 어떻게 참여해야 할 지 방법을 논하지 않아서 우리는 패물로서 참여하겠다”고 선언했다. 곧 서울, 인천, 대구, 부산, 안악, 진주, 김포, 제주도에 ‘국채보상부인회’가 조직되었다. 당시 여성들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곧 쇠퇴했다. 

 

일제강점 후 여성의 독립운동

  1910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였다. 이후 여성들은 남성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나섰다.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가장 먼저 결성된 여성조직은 ‘송죽결사대’였다. 평양의 숭의여학교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이들의 독립운동은 1919년 3.1만세운동과 함께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바로 전인 2월 8일 일본 동경에서는 2.8독립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때 동경유학여학생들로 구성된  ‘조선여자친목회’가 이 선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3.1운동은 같은 민족으로서 공동의식, 공동감정, 공동운명이라는 유대의식을 자각하는 계기였다. 같은 해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건립되었을 때 임시헌장 제3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 및 빈부의 계급없이 일체 평등으로 함”이라고 명시되었다. 이러한 문구가 들어가게 된 것은 여성들이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는 등 3.1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이다. 

 

3.1운동 후 여성의 국내 항일운동

  3.1운동의 실패로 인해 한반도에서 독립운동하던 많은 여성들이 일제에 잡혀 들어갔다. 유관순이 옥사한 것도 이 때였다. 김마리아는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해서 활동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고, 병보석으로 출감한 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조신성은 1920년 대한독립청년단을 결성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차미리사는 ‘조선여자교육협회’를 조직하여 전국순회 강연을 다녔다. 1927년에는 ‘근우회’라는 여성조직이 출범하였는데,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를 망라한 여성들의 모임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1931년 해체되었다. 한반도 내 활동공간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많은 여성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항일 여성독립투사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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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 집안일은 물론 군자금 전달, 정보수집에 나서

  대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집안의 여성들은 직접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는 한 남성(즉 가장) 독립운동가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오면 쉴 수 있는 가정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 구체적으로 가정의 경제, 집안의 대소사 처리, 가족 돌보기, 독립운동가 접대, 군자금 모금을 담당했다. 남성들 대부분이 집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가정 경제는 여성들의 몫이었다. 여성의병 윤희순은 시아버지와 남편이 모두 독립운동을 위해 집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집안의 종부로서 제사와 같은 집안의 대소사를 전담하였다. 

 

남자들이 떠난 집에서 산에 올라 나물, 풀뿌리, 나무껍질을 채집하여 먹을거리를 장만했고, 이것이 부족해지면 중국인들을 찾아가 옥수수, 수수쌀 등을 구걸해서 생계를 유지했고, 야산에 밭을 일구어 밭농사 논농사로 연맹했다. 이렇게 어려운 살림살이를 하면서도 이웃마을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에게 항일선전을 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여 독립운동단체에 전달하기도 했다. 

 

중국 상해에서 김구의 어머니인 곽낙원의 뒷바라지도 유명하다. 곽낙원은 상해 임시정부에 있던 독립운동가 집안의 여성들과 함께 임시정부내의 가족들을 서로 도왔다. 며느리 최준례가 세상을 떠난 후 손자들을 키우고 김구를 도살폈다. 가난한 임시정부 가족들의 밥끼니를 위해 쓰레기통을 뒤져 찾은 배추껍데기로 찬거리를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여성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일본 경찰이나 군대의 동향을 탐색,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생계를 위해 공장에서 일하고, 군사활동에 직접 참여하기도 

  독립운동가 이병화의 부인 이해동은 시머어니와 산에 가서 땔감을 구해오고, 집안의 노인들 모시는 일 외에도 부업으로 중국사람이 경영하는 피복공장에서 단추구멍 만드는 일을 해서 가정 경제에 일조를 했다. 

 

  반면에 가족 돕는 일로 독립운동을 하기 보다는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여성들의 삶은 이들과 사뭇 달랐다. 독립운동가 허헌의 딸이었던 허정숙은 가정을 지키기보다는 남성들과 똑같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20년대 국내에서는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로, 1934년 중국으로 망명해서는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조선청년전위동맹 부대표로 활동했다. 1938년에는 연안을 가서 항일군사대학 정시군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40년대에는 광복군에 참여하는 여성들도 늘어났다.

 

  일제강점기 여성들은 항일운동을 통해 여성의 권익을 보장받으려는 여성운동을 성장 발전시켜 나갔다. 여성교육운동, 국채보상운동, 광복군으로 전쟁에 참가하고, 가족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는 일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항일운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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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사단법인역사·여성·미래가 여성가족부의 예산을 지원하고  실시한 ‘한국여성사강사양성과정’의 제16강:신여성과 여성독립운동가, 윤정란(서강대학교)의 강의 내용을 발췌 정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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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16년02월29일 11시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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