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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10A : 3대 인재에도 멸망한 후진(後秦)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4월12일 16시51분
  • 최종수정 2018년04월13일 11시0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4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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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족 추장 요익중(姚弋仲, AD280-AD352)

  

AD312년이면 통일 서진(西晉)이 붕괴되기 시작한 때다. 장안의 서진 조정에서는 AD291년부터 AD306년까지 14년 동안 8왕자의 난이 이어지면서 통치권은 완전히 무너졌다. 전국 곳곳에서 사실상의 지방정부가 군웅처럼 할거하면서 독립을 선언하고 있었다. 장궤(張軌)와 아들 장식(張寔)이 감숙성 고장(감숙성 무위)에 전량(前涼)을 세웠고 AD304년 유연(劉演)은 평양(산서성 임분)에서 전조(前趙)를 세웠으며 이웅 또한 AD 306년 조족을 중심으로 익주(지금의 사천성 성도)에서 성한(成漢)을 세운 뒤였다. 또 지금의 내몽고 지역에는 탁발의로가 성락(지금의 화림각이)를 중심으로 대(代)라는 나라를 세웠다. 그러니까 당시 황하 이북의 중국은 장안지역을 통치하는 서진 조정이외에 감숙성을 장악하고 있던 장식, 산서성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전조, 사천성을 장악하고 있던 성한의 이웅, 그리고 내몽고 지역을 장악한 탁발의로의 대로 나뉘어 통치되고 있었다. 이 외에도 단필제는 유주(지금의 북경)을 장악하고 모용외는 금주(요녕성 금주)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도간은 형주지역을 다스렸지만 스스로 나라를 세우지는 않았다. 여러 나라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나라는 유연의 뒤를 이어받은 유총-유요로 이어지는 전조였다.

 

후진 창업자 요익중(姚弋仲)은 강족 출신이다. 강족은 다민족 혈통이 섞인 혼합민족으로 지금도 사천성 중심으로 부락을 형성하고 있다., 요익중이 자치통감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AD312년 끝 무렵이다. 자치통감 진기(晉記) 10. 회제 영가 6년(AD312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 남안 적정(지금의 감숙성 농서의 동북쪽)에 사는 강족 추장 요익중이 

  동쪽 유미(섬서성 간양현)으로 이사하니 융족(戎族), 강족(羌族), 하족(夏族)들 가운데 

  어린 아이들을 강보에 싸고서 업고 따르는 무리가 수 만 명이었다.

  요익중은 스스로 호강교위 및 옹주자사라고 하면서 부풍공이라 불렀다.“   

 

[그림.1] AD312년경 중국 세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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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요익중이 전조(前趙)의 평양공이 되다(AD323)

 

요익중이 적정(감숙성 농서)에서 유미(섬서성 간양현)으로 이주해 간 뒤 10여년 지난 AD323년 무렵 농서지역은 서진 조정의 도위 진안과 전진의 장수 유공이 대치하고 있었다. 진안은 내분에 빠진 서진 조정에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양왕이라 일컫고 군사를 모아 유공이 주둔하고 있던 남안(감숙 농서현 동북)을 포위공격했다. 그러나 휴도왕 석무가 감숙성 임조에서 군사를 이끌고 상규(감숙성 천수)로 와서 유공을 지원하면서 진안은 크게 패했다. 진안은 7천 잔당을 모아 빠져나와 감숙성 장가천으로 달아났고 석무는 상규를 접수했다. 그 해 7월 유요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나와 진안이 있는 장가천을 포위했고 따로 군사를 보내 석무가 장악하고 있는 상규도 포위해 버렸다.

 

유요의 대군이 들이닥치자 장가천은 물론 상규의 민심이 크게 흔들렸다. 진안은 정예기병을 대동하고 포위망을 빠져 나갔으나 결국 전조의 보위장군 호연청인에게 사로 잡혀 목이 베어졌다. 진안은 장군과 병사를 아주 잘 어루만지고 다루어 고락을 함께 했으므로 그의 죽음을 매우 애도하면서 다음과 같은 ‘장사의 노래(壯士之歌)’를 지어 불렀다.          

 

 

“ 농상(감숙성 동부 일대)에는 진안이라는 장사가 있었소,

  체구는 비록 작았어도

  배짱은 그 누구보다도 더 컸었소,

  장사를 아끼기를 자신의 심장처럼 아꼈고

  멋진 말을 타고 철 안장에 앉아

  일곱 척 큰 칼을 폭포처럼 휘둘렀고

  장팔사모(길이 1장 8척의 뱀 치장을 한 긴 창)를 좌우로 휘두르면서 싸웠는데

  열 번 전투에도 허물어지지 않았으나

  마침내 세 번째 싸움에서 장팔사모를 놓치자 멋진 말을 버리고

  수풀 속 바위틈으로 피신했소.

  밖에서 원군이 오기를 목 빼고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으니

  서쪽으로 흐르는 물,

  동쪽으로 흐르는 강,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으니 어찌할꼬, 어찌할꼬“ 

    

진안이 죽자 그 부하들은 모두 유요에게 항복했다. 농지역(감숙성 동남부 지금의 천수지역 일대)의 여러 부락들도 모두 유요에게 항복하고 들어왔다. 주로 강족이 살고 있던 농지역을 완전 장악한 유요는 강족의 대표적 추장인 요익중을 평서장군으로 임명하여 그 지역 통치를 맡겼다. 아마 이 때 유미로 이주해 온 요익중은 유요의 수하로 있었던 것이 분명하고 유요의 신임을 얻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3) 전조 유요의 1차 전-후조 전쟁패배와 와병(AD325)

 

전조의 유요가 동쪽의 강력한 후조의 석륵에게 막혀 오로지 서쪽(지금의 감숙성)으로 영토를 확장하려고 하는 동안 석륵은 무서운 기세로 영토를 넓혀 나갔다. 남쪽으로는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수선한 동진의 서주(안휘성)지역 영토를 침략했고 북쪽으로는 요동지역을 놓고 우문걸득귀 및 모용외와 다투었다. 이제 전조와 후조의 마찰은 불가피해졌다. 두 나라군대의 접촉점은 지금의 낙양 부근인 호뢰관이었다. 당시 낙양은 석륵의 부하 석생이 주둔하고 있었다. 전조 유요는 유악과 1만5천 군사를 보내 동쪽으로 진군시켜 맹진(하남성 맹진현. 낙양 북쪽)에 도달한 뒤 석생의 낙양을 포위했다. 

 

석호는 4만 군사를 보내 석생을 지원했다. 석호의 군대는 압도적인 우세를 바탕으로 유악의군대를 성고관(하남성 호뢰관)에서 유악의 군대를 대파시켰다. 유요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구원에 나섰으나 군사들이 야략(夜掠,알 수없는 야간공포감)에 휩싸여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석호는 의기양양 낙양을 점령하였으며 사로잡힌 전조 장수 유악 등 80여 명은 형태로 압송 되었다. 석륵은 장안 지역을 제외한 황하 이북의 거의 모두를 장악하게 되었다. 전조 내부에서도 후조에게 귀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장안으로 돌아 온 유요는 소복을 입고 교외에 나가 7일 동안 곡을 하다가 돌아왔다. 그의 분노가 병이 되었다.

 

유요는 영안왕 유윤을 대사마, 대선우 남양왕으로 고쳐 책봉하고 모든 관직은 호족, 갈족, 선비족, 저족, 및 강족의 이민족 만 임명했다. 그것은 아마도 호뢰관 전투에서의 패전이 한족 관리들의 무능함과 나태함, 그리고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움직임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4) 석호의 전조 공략(2차 전-후조 전쟁) 실패(AD328)

 

유요를 호뢰관에서 격파한 후조의 중산공 석호는 4만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여 전조의 영토를 넘보았다. 지관(하남성 제원)에서 출발하여 하동(산서성 하현)을 공격하고 나가서 포판(산서성 영제)까지 나아갔다. 이제 장안까지 거리는 200KM가 안 남았다. 석호의 군대가 황하를 건너면 모든 것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한 유요는 선제적으로 유술을 보내 군대를 먼저 황하를 건너게 하였다. 생각지도 않게 유요가 먼저 선공을 하고 넘어오자 석호는 놀라서 퇴각했다. 유요는 도망가는 석호의 군대를 끝까지 쫓아갔다. 이미 3년 전 뺏긴 낙양부근까지 쫓아간 유요는 낙양을 포위함과 동시에 군대를 사방으로 풀어서 지금의 정주시 부근인 심양, 형양, 급현을 공략하도록 했다. 유요는 3년 전 잃어버린 국토를 다 회복했다.     

 

 

(5) 석호의 복수와 성고관(호뢰관) 전투(3차 전-후조 전쟁) 승리(AD328년 11월)

 

점령했던 낙양을 다시 유요에게 뺏긴 석륵은 낙양을 다시 탈환할 생각이었다. 정하가 반대하고 나섰다.

 

“ 유요가 군사를 천리 가까이 벌여 놓았으니

  가만 두어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대왕은 가만히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움직이시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석륵은 정하를 크게 꾸짖었다. 그리고 패장 서광에게 물었다.

 

“ 유요는 분명히 지금 승리에 도취되어 있다.

  모두들 그가 승세를 타니 예봉을 피하자고 하는데

  갑옷 정병 10만을 가지고 포위하고서도

  100일이 지나도록 함락을 시키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 군사는 늘고 게으른 것이 분명하다.

  내가 정예병을 가지고 공략하면 한 번에 격퇴가 가능하다.

  지금 낙양을 지키지 못하면 반드시 양국(후조의 수도)이 위태로워 질 것이고 

  황하 북쪽에서부터 자리를 밀 듯 밀려 내려오면

  내 할 일은 구름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정하는 공격을 반대하고 있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 

 

서광이 웅크리며 말했다.

 

“ 유요가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습니다.” 

 

석륵이 서광을 칭찬하며 말했다.

 

“ 자네의 말이 옳다.”

 

석륵은 전쟁에 반대하는 자들의 목을 즉각 베어 버리고 군대를 규합했다. 석감, 석총, 도표 등의군사를 모두 형양 부근에 모았다. 중산공 석호에게 석문을 지키라고 하고 석륵 본인은 4만 군사를 이끌고 유요가 점령하고 있는 낙양 금용성으로 진격했다. 그러면서 부하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만약 유요가 성고관에 많은 군사를 집결시켜 놓았으면 우리로는 하책이고,

  낙수를 막고 있으면 중책이며,

  낙양을 지키고 있으면 상책이다. 들어가서 사로잡으면 끝이다.“

 

석륵의 후조군사가 성고관에 집결했다. 보병 6만에 기병 2만 7천의 대군이었다. 유요는 낙수에 집결해 있었다. 유요의 군대는 10만 이었다. 석륵은 웃음을 띠며 축하할 만 하다고 중얼거리며 큰 저항 없이 낙양으로 입성했다. 이렇게 해서 낙양성은 쉽게 탈환되었다. 석륵의 군사와 유요의 군사는 낙수를 가운데 두고 대치했다. 이 때 유요는 술에 취해 있었다. 젊어서도 술을 좋아 했지만 말년에 가서는 더욱 심해졌다. 전쟁을 앞두고도 몇 말씩 술을 들었다. 말에 올라타고도 술에 취해 고개를 숙이기 일쑤가 되자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말을 아예 조랑말로 바꾸어 버렸다. 

 

석감의 공격을 받은 전조의 군사들이 퇴각하면서 술에 취한 유요는 달아나다 말이 구덩이에 빠지는 바람에 떨어졌고 10여군데 칼과 창을 맞은 뒤 석감에게 사로잡혔다. 전조의 군사는 대패했다. 석륵이 명령을 내렸다.

 

“ 잡고자 하는 사람을 잡았으니 

  적군이 도망가게 내버려두라. “ 

 

유요가 석륵을 보자 말했다.

 

“ 석왕은 중문에서의 맹세(重門之盟, 하남성 휘현의 북문)를 기억하시오?”

 

중문에서의 맹세란 18년 전 유총과 유요와 석륵이 서진 태수 배정을 포위하면서 맺은 우호의 맹세를 말한다. 

 

석륵은 서광을 시켜 유요에게 말 하였다.

 

“ 오늘의 일은 하늘이 만든 것이오.

  다시 옛 일을 말해 무엇 하겠소.“

 

석륵은 유요를 다그쳐 빨리 항복하라는 편지를 아들 유희에게 띄울 것을 재촉했다. 유요는 유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와 사직을 바꿀 생각을 하지마라.”

   

석륵은 이마를 찌푸리며 화를 냈다. 한 참 지나서 유요를 처단했다.(AD328년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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