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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기자의 유쾌한 명상 체험기 쉐우민 이야기, 마흔세 번째 이야기 거문고 줄 고르듯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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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4월21일 17시20분

작성자

  • 김용관
  • 동양대학교 교수(철학박사), 전 KBS 해설위원장

메타정보

  • 29

본문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 

  “왕이시어. 길에는 왕께서 다니시도록 만들어 놓은 왕도가 있지만,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그리스 수학자 메가라의 유클리드가 자신의 학생인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에게 한말이다. 노력 없이 길은 뚫리지 않는다. 37보리분법에 노력을 강조한 범주가 四正勤(네 가지 바른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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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가지 바른 노력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해로운 법들은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이미 일어난 해로운 법들은 제거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들은 일어나게 하고,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은 증장시키는 것이다.” (각묵, ‘초기불교입문’에 요약된 사정근)

 

  노력하는 방법, 참 간단하다. 바른 방향의 노력이란 뜻을 강조하느라 ‘正’(사마 sama)이 붙었다. 간단하긴 하지만, 오해 없도록 해야 한다. 무엇이 해롭고 무엇이 유익한 법인지를 모르고서는 사정근을 이해할 수 있다. 직관적으로 좋고 나쁜 그런 것이 아니다. 아비담마를 통해 분명히 밝혀놓았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아비담마의 기본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37보리분법은 당연히 선법이다. 해탈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불선업 10가지와 해로운 마음부수법 14가지가 악법에 속한다. 

  구체적으로 들자면, 생명을 죽임, 주지 않는 것을 가짐(테라바다 계율은 절도를 이렇게 정의한다), 삿된 음행, 거짓말, 중상모략, 욕설, 잡담, 탐욕, 악의, 삿된 견해가 10가지 불선업, 즉 나쁜 행동이다. 어리석음, 양심 없음, 수치심 없음, 들뜸, 탐욕, 사견, 자만, 생냄, 질투, 인색, 후회, 해태, 혼침, 의심이 14가지 불선법, 즉 마음의 나쁜 성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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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네 가지 바른 노력, 4정근은 계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37보리분법의 7가지 범주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여러 번 중복되는 요소들이 많다. 그 가운데 노력, 또는 정진이 대표적이다. 정진은 37보리분법의 마지막 일곱 번째 범주인 팔정도에도 속해 있다.

  4정근은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가를 규정한, 정진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세 번째 범주인 四如意足에는 정진이, 다음 범주인 五根에도 정진근이 있다.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인 七覺支에도 정진각지로 강조된다.

  그렇다. 노력 없이 되는 일이 어디 있던가? 하지만 노력하는 것도 노하우가 있어야 한다. 무작정 하는 노력이 비효율과 불행을 초래하는 사례도 얼마든 있다. 조폭이나 범죄자들도 제 나름대로, 장삼이사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한다. 노력도 바른 노력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동기가 바르고, 목적이 뚜렷하고, 수단이 합당해야 바른 노력일 수 있다. 37보리분법 가운데 한 범주를 정진의 내용으로 채운 경전 편집자들의 고심을 이 대목에서 이해할 수 있다.

 

  네 가지 성취수단(四如意足)

  ‘四如意足’이라는 단어는 참 괴상하다. 여의도 족발집을 연상케 하는 ‘여의족’이라니? 어찌 이런 한역이 나왔을꼬? 원 팔리단어는 ‘iddhi-pada’란다. ‘잇디’는 신통이나 성취를, ‘빠다’는 다리를 뜻한다. 다리는 교통수단이니 ‘수단’의 뜻...? ‘뜻대로 되는 것’이 성취이니 ‘如意’, 다리는 ‘足’이니... 맞네. 맞아. ‘여의족’... 그렇긴 해도 원 단어를 들먹이며 한참 설명을 해야 알아들을 번역, 좋은 한역은 아닌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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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위한 성취수단인가? 경전은 사마디와 신통과 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못 박는다. 경전의 이곳저곳에서 이 네 가지를 때로는 사마디를, 때로는 신통을, 때로는 열반을 얻기 위해 닦아야 한다고 쓰고 있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성취수단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그것은 염오로 인도하고, 탐욕의 빛바램으로 인도하고, 소멸로 인도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열반으로 인도한다.”(염오경)

 

  그렇다면 네 가지 성취수단은 무엇인가? 열의(chanda), 정진(viriya), 마음(citta), 검증(vimamsa)이 그것이다. 열의는 일상적 단어이고, 정진은 앞서 충분히 설명했으니 더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그런데 ‘마음’이 수단이라니... 게다가 ‘검증’이라니... 도대체 니놈들의 정체가 뭐냐? 이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책들이 잘 없다. 오히려 어느 법사의 인터넷 글에서 시원한 설명을 본다. (다음 까페, ‘법구경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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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글을 요약하면 이렇다. 열의는 목표에 대해 열망을 끊임없이 유지하도록 한다. 목표에 대한 열의가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이 에너지가 정진력이다. 정진력은 마음을 수행주제로 향하게 한다. 이것이 사띠이다. 깨달음이라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마음은 사띠를 이어가야 한다. 사띠가 법에 대한 관찰과 조사를 불러일으킨다. 법이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탐욕이 일어나면 탐욕이 왜 일어나는지 원인을 관찰하고, 분노 또는 어리석음이 일어나면 그것이 왜 일어나는지 조사한다. 어떤 번뇌가 일어나든지 그 일어난 원인을 알아차리고 지혜를 개발한다. 이것이 검증의 성취수단이다.

  삼매를 얻거나 도과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이 네 가지가 항상 기능해야 한다. 목표를 성취하려는 열의를 항상 유지하는 것이 열의의 성취수단이다. 정진력을 항상 유지하는 것이 정진의 성취수단이다. 마음을 수행주제에 항상 기울이는 것이 마음의 성취수단이다. 법에 대한 조사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검증의 성취수단이다. 이 네 가지를 항상 유지하여야만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성취수단이라고 하는 것이다.

 

  오근과 오력 

  ‘철학적 인간학’은 수십 년 전 본인이 다니던 대학에서는 교양필수 과목이었다. (철학개론, 윤리학을 포함해 세 과목 9학점이 졸업 필수 학점이었다.) 그 과목을 가르치시던 외국인 교수님이 학기 첫 시간 칠판에 커다랗게 ‘인간은 누구십니까?’라고 썼던 장면이 생생하다. 유창하지만 세밀하지는 않은 한국말 실력을 지녔던 그 교수님, ‘Who is the man’의 우리말 표현이었다.

  인간은 누구신지, 그 덕분? 오랫동안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한 테라바다의 접근은 사뭇 다각적이다. 인간을 해체해서 보면? 五蘊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자아나 실체는 없다. 그렇다면 실체 없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보고 느끼고 살고 지혜를 닦아 해탈할 수도 있다’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수행할 수 있는 존재이다. (즉각 제기될 수 있을 ‘실체가 없다는데, 해탈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그냥 미뤄두자.)

  수행과 관련된 기능 다섯이 37보리분법에 반복돼 나타나는데, 이것이 ‘5근’이다. 인간이 수행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은 바로 이 다섯 가지 기능 때문이다. 그 다섯 가지는, 바로 믿음의 기능, 정진의 기능, 사띠의 기능, 사마디의 기능, 통찰지의 기능이다. 인간이 이 다섯 가지 기능을 갖고 있기에 해탈과 열반이 가능한 존재가 된다. 

  그러니까, 이 다섯 가지는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며 수행이란 마음의 이 다섯 가지 힘을 자라게 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37보리분법의 다음 범주인 五力도 五根의 내용과 같다. 이 다섯 가지가 ‘기능’과 ‘힘’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가 얼마나 중요하면, 아비담마 22근에서 뽑아다가 37보리분법에 다섯을 다시 넣고, 그것도 모자라 다음 범주인 五力에 또 다시 반복하고 있겠는가? 사실 이 다섯 가지는 해탈과 열반으로 가기 위해 어떤 수행의 길로 가야하는 지를 요약하고 있다고도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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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구들이여, 믿음의 기능은 어디에서 봐야 하는가? 믿음의 기능은 여기 네 가지 예류자의 구성요소에서 봐야 한다.(佛, 法, 僧, 戒) 비구들이여, 정진의 기능은 어디에서 봐야 하는가? 정진의 기능은 여기 네 가지 바른 노력에서 봐야 한다.(四正勤) 비구들이여, 사띠의 기능은 어디에서 봐야 하는가? 사띠의 기능은 여기 네 가지 사띠의 확립에서 봐야 한다.(四念處) 비구들이여, 사마디의 기능은 어디에서 봐야 하는가? 사마디의 기능은 여기 네 가지 선에서 봐야 한다.(四禪) 비구들이여, 통찰지의 기능은 어디에서 봐야 하는가? 통찰지의 기능은 여기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서 봐야 한다.(四聖諦)” (상윳따 니까야)

 

  다시 한 번 반복하건데, 수행은 믿음, 정진, 사띠, 사마디, 통찰지의 다섯 가지 기능을 바탕으로 한 다섯 가지 힘으로 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를 잘 추슬러 밀고 나아가야 해탈과 열반의 길을 갈 수 있다.

 

  거문고 줄을 고르듯 

  붓다의 제자 중 소나 존자는 출가 전 집안이 부유했다. 그는 무척 열심히 수행했지만 해탈하지 못해 고민했다. 그래서 세속으로 돌아가 재물을 즐기고, 보시 공덕이나 닦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음은 소나와 붓다와의 대화.

 

"수행이 어려워 집에 가려느냐?"

"그렇습니다."

“소나여, 재가자였을 때 거문고의 줄 고르기에 능숙했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거문고 줄이 팽팽하면 선율이 아름답고 연주가 편하던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거문고 줄이 느슨하면 선율이 아름답고 연주가 편하던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여, 거문고이 팽팽하지도, 느슨하지도 않고 적당하면 선율이 아름답고 연주하기에 편하게 된다."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여, 그처럼 정진이 지나치면 들뜨고 지나치게 느슨하면 나태해진다. 소나여, 정진을 고르게 유지해야 한다.”(소나경)

 

  유명한 거문고 줄의 비유이다. 五根 五力은 잘 고른 거문고 줄처럼 균형이 맞아야 한다. 앞서 말한 바대로, 오근과 오력은 같은 내용을 다른 측면에서 본 것이다. 根, 즉 기능은 통제의 측면에서, 力, 즉 힘은 반대되는 것에 흔들리지 않는 것을 뜻한다. 

  믿음의 힘은 불신에 흔들리지 않고, 정진의 힘은 게으름에 흔들리지 않고, 사띠의 힘은 놓아버림에 흔들리지 않고, 사마디의 힘은 산란함에 흔들리지 않고, 통찰지의 힘은 무명에 흔들리지 않는다. 이 다섯 가지 힘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고 잘 균형을 이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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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원리를 도표를 그려 설명하는 이도 있다. 통찰지, 믿음, 정진, 사마디, 사띠를 각각 동, 서, 남, 북, 중앙에 위치시켜 동서와 남북이 서로 대응하는 짝이 된다.(東西) 통찰지가 강하면 믿음이 약해져 불신에 흔들리고, 그 반대가 돼 통찰지가 약해지면 무명에 흔들린다. 따지기 좋아하고 지적으로 날카로운 사람이 일반적으로 종교적 믿음에 냉소적이다. 반대로 믿음이 좋은 사람은 자칫 맹신에 빠질 수 있다.(南北) 

  정진이 강하면 사마디가 약해져 산란해지고, 반대로 사마디가 너무 강해지면 정진이 약해져 게으름에 빠진다. 수십 년 선방에 다니는 고참 수좌스님에게 들은 얘기가 있다. 선방에서는 시간을 정해두고 입선(참선 시작)과 방선(참선 끝)을 반복한다. 그런데 사마디가 강해지면 방선시간에 소변이 마려워도 화장실 가기가 싫어진다고 한다. 

  아무튼 두 쌍의 힘이 마치 잘 골라진 거문고 줄처럼 균형이 맞아야 한다. 그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중앙에 놓인 사띠이다. 이처럼 사띠의 힘은 오력에서도 가장 중심적 역할을 하는 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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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4월21일 17시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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