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20 : 북제 창업자 고환의 업적을 다 까먹은 아들 고담과 손자 고위<K>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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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서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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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우문태의 후계 문제 : 운문각으로 결정(AD556)
우문태는 AD555년 모든 북위의 황실의 작위를 한 계급 낮추도록 지시했다. 우문태는 효무즤 여동생 풍익공주를 부인으로 맞아서 우문각을 낳았고 요부인을 통해서 우문육을 낳았다. 우문육이 여러 아들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아 독고신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우문태가 후게자를 세우려고 공경을 모아놓고 의견을 물었다. 아무도 겁이 나서 말을 하지 못했다. 상서좌복야 이원이 나서서 말했다.
” 후계는 적자를 세우는 것이지 나이로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약양공 우문각이 세자가 되는데 어찌 의심의여지가 있습니까.
독고신이 싫다고 하면 목을 베어버리면 되는 일입니다.“
이원이 칼을 배어 독고신에게 다가가자 우문태가 깜짝 놀라면서 자신의 칼을 뽑고 이원에게 다가가 말렸다. 주변이 모두 이원의 생각에 동의하고 독고신도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말했으므로 사태는 여기서 종결되었다. 이원이 나오면서 독고신에게 사과했다.
” 대사이다 보니 부득불 그렇게 된 것입니다.“
독고신도 이원에게 사과했다.
‘ 이원 공 때문에 어려운 문제가 결정되었소.”
<75> 고양의 술 중독(AD556)
AD556년 경 장강 이북은 서쪽의 서위와 동쪽의 북제로 확실하게 세력분할이 되었지만 장강 이남은 사정이 복잡했다. 먼저 진패선은 건강을 중심으로 양나라의 영토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그 외의 지역은 여러 세력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강릉에는 소찰이 서위에 복속하면서 독립을 꾀하고 있었고 파릉(무한)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은 후평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더 남쪽 장사에는 왕림이 자립잡고 있었다.
북제 현조 고양은 AD550년 24세 나이로 처음 즉위했을 때는 정신을 바로 차리고 간단하고 안정적인 정치를 펼쳤으며 인사도 매우 공정하고 적소에 사람을 뽑았으므로 평판도 좋았고 신하들도 정성을 다해 정치를 도왔다. 전쟁에 있어서도 신중하며 과단성 있게 전략을 펼쳐서 큰 공을 많이 일으켰다. 고양이 세운 큰 무공만 여섯 번이다.
① AD550년 11월 서위 격파
② AD552년 1월 고막해 정벌
③ AD553년 10월 거란 격파
④ AD553년 12월 돌궐 격파
⑤ AD554년 1월 경내산호 정벌
⑥ AD555년 3월-6월 유연 정벌
그러나 공이 쌓이고 좌우에 간신들이 꼬이면서 술 때문에 행동이 방탕해지고 음란해지면서 분별력을 잃어갔다. 일찍이 길을 지나가는 여인에게 황제가 어떤 분이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 미치고 어리석은데 어찌 천자 역할을 하겠소?”
황제는 그 여자를 죽였다. 누태후(고양의 어머니)가 막대기로 아들을 때리면서 한탄했다.
“ 이 같은 애비니까 이 같은 아이를 낳지 않겠소?”
황제가 말했다.
“ 즉시 이 늙은 어머니를 오랑캐에게 시집을 모내야 하겠습니다.”
이 때 누태후는 54세 였으니 시집갈 나이가 아니었지만 술 취한 아들은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뱉었다. 술이 깨면 고양은 후회하고 사과하기를 반복하면서 불을 피우고 그 속으로 들어가려고까지 하였다. 누태후는 어이가 없었지만 아들을 위해 술 때문이니 걱정 없다고 위로할 뿐이었다. 술에서 깨어난 고양은 고귀언에게 몽둥이를 쥐어 주면서 자신을 피가 나도록 때리라고 명령했다. 피가 나지 않으면 목을 치겠다고 호령했다. 누태후가 울면서 고양에게 다가가 껴안으며 말리는 바람에 고귀언은 화를 면했다. 누태후는 대신 회초리를 들고 고양에게 50대를 가볍게 내려쳤다. 고양은 의관을 다시 고쳐 입고 사죄했지만 열흘이 지나지 않아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취중에는 포학하기가 걸주를 능가했지만 술이 깨면 다시 엄정하고 판단력이 살아났으므로 정사를 돌볼 수가 있었고 특히 훌륭한 양음에게 정사를 맡겼기 때문에 나라가 제대로 굴러 갈 수가 있었다.
<76> 고양의 충신 양음(AD556)
양음은 풍모가 위엄하면서도 모범적이고 결단력이 있었다. 어려운 시절을 겪었던 사람이어서 과거에 음식 한 사발이라도 도와준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 두 배로 갚았고 일찍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살마 조차도 관용으로 살려 주었다. 20년 동안 인재를 뽑으면서 현명하고 강직한 사람을 천거하는 일을 자신의 책무로 삼았다.
기억력 또한 매우 좋아서 한 번 만나면 그 성명을 잊지 않았다. 노만한 이라는 선비가 양음에게 발탁되었는데 너무 비천한 집안 출신이라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양음이 말했다.
“ 공은 일찍이 원자사방에서 꼬리가 짧은 암나귀를 타고 가지 않았소.
나를 보고도 내리지도 않고 네모난 보자기로 얼굴을 가렸는데
내가 어찌 경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소.”
노만한은 기겁을 하며 그 기억력에 감탄했다.
<77> 우문태 사망과 우문호 집권(AD556)
서위의 안정공 우문태가 병이 들었다. 급히 동생 중산공 우문호를 장안으로 불러들였다. 우문태가 우문호에게 말했다.
“ 내 여러 아들들이 아직 어린데
외적은 강하기만 하구나.
천하의 일을 네게 부탁하니 내 뜻을 이루도록 하거라.”
우문태가 AD556년 10월 4일 죽었다. 나이가 49세였다. 우문태는 영웅호걸들을 영입하고 그들을 잘 대접하였으므로 많은 인재들이 그를 따랐다. 성품이 호탕하면서 검소하여 허영을 싫어했고 정사에 밝고 유학을 숭상하면서 옛 것을 따르고 시행하기를 좋아하였다. 세자 우문각이 15세 나이로 관직과 작위를 그대로 계승하여 태사, 주국, 대총재가 되었다.
죽음을 앞둔 우문태의 간절한 요청을 받은 우문호는 지위가 높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말을 잘 듣지 않으려 했다. 우문호는 대사구 우근에게 계책을 물었다. 우근이 말했다.
“ 죽음을 무릅쓰고 양보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날 여러 공들이 모여 의논할 때 우근이 말했다.
“ 안정공(우문태)이 아니었으면 오늘이 없었을 것입니다.
중산공(우문호)은 형의 아들과 친하고
또 직접 고탁을 받은 몸이니 군국의 일은 일단 그에게 위탁해야 합니다.”
무리들은 얼굴이 붉어지며 어쩔 줄을 몰랐다. 우문호가 나서서 확실하게 선언했다.
“ 이것은 집안의 일입니다.
저 우문호가 비록 용렬하나 어찌 형님의 부탁을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우근의 압박을 받고서 모든 공경들이 우문호를 지도자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우문호는 기강을 바로 잡고 문무백관을 잘 위로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었다. (계속)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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