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3.1운동 100주년, 불편한 기억을 꺼내보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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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02월15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19년02월15일 13시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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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은 뿌리가 없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을 걷던 시절, 이브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사과를 먹은 것이 인간의 원죄가 되었다는 기독교의 ‘원죄’ 개념은 죄의 뿌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근원이 되는 무언가가 ‘악’에는 없다. 공기를 타고 주변을 가득 채우는 곰팡이처럼 악은 곳곳에 존재한다. 한나아렌트는 그 누구나 악이 될 수 있는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 했다. 

 

3.1운동 100주년


 1919년 3.1만세운동은, 독립을 향한 열망을 보여준 전국적인 운동이었다. 100년 전 선조들은 일제의 강압에 맞서며 거리로 나섰다. 일제 강점기 36년은 우리의 독립운동이 끈질기게 이어졌던 시간이기도 하다. ‘3.1운동 재판기록’에는 무수히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기록이 있다. 우연히 거리에 나섰다가 잡혀간 사람들, 모진 고문에도 끝까지 자신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굽히지 않는 사람들 등. 그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정부는 곧 다가올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사업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3호선 안국역을 독립운동 테마역으로 디자인하고, 2018년 3월 1일에는 천주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단체가 한 데 모여 기념행사를 진행하는 등 나름대로 그날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만세를 외치며 간절히 독립을 염원했을 그 마음을 떠올린 순간, 지난해 한국을 찾은 베트남인들이 떠올랐고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뇌리를 스쳐갔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


 작년 4월, 우리나라에서 ‘시민평화법정’이 열렸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 참여한 모의재판이었다. 정식재판이 아닌 모의재판이었지만 베트남 학살 현장에 있던 피해자들이 증인으로 참석했고, 묵혀두었던 기억에서 참혹했던 순간을 끄집어내어 진술했다. 한국군이 쏜 총에 맞아 가족이 죽었다고 말한 그들은, 다친 상처에서 창자가 삐져나오는 것을 봤다며 그 장면을 묘사했다. 

 베트남 호치민시 전쟁박물관에는 카메라를 경계하듯 바라보며 바닥에 주저 앉아있는 할아버지 사진이 있다. 할아버지가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는 이유는 손님이 찾아오면 바지를 입고 맞이하는 베트남의 전통적인 예절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 속 눈동자는 뒷일을 전혀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미군은 할아버지를 들어 올려 옆에 있던 우물로 던졌다. 발버둥 치며 우물에 매달린 할아버지의 손을 짓밟아 빠뜨렸다. 그리고 총을 난사했다. 총이 난사된 뒤 핏물이 튀겨 우물 앞에 있던 미군들을 덮쳤다고 전해진다. 그때 핏물을 맞은 한 미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엄청난 일을 벌여왔음을 깨닫고, 이 마을에서 일어날 또 다른 학살을 막기 위해 자신의 발에 총을 쐈다. 

 이 시기 미군의 부상자 수는 ‘1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스스로 자신의 발에 총을 쏜 한 사람. 베트남 전쟁은 사실상 한 편이 일방적으로 당한 학살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참혹한 학살 현장의 가해자로 미군 외에 우리나라가 지목된다. 당시 한국군 또한 베트남인들을 상대로 한 학살의 현장에 참여했다. 때문에 베트남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존재하며 이 증오비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희생자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 아이들이다. 악의 잣대가 우리를 향하고 있었다.        

 

3.1정신을 되새기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학살을 자행했던 인물 중 한 명인 중간관리인 아이히만은, 자신은 시키는 대로 했을 뿐 그들을 학살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고, 특별한 정신이상도 없었다. 다만 그는, 스스로의 행동을 성찰하고 결정할 ‘판단의지’가 없었다. 자신의 행동이 미칠 파장을 생각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수많은 유태인들이  가스실로 내몰려 참혹하게 죽어야 했다. 한나 아렌트는 판단의지 없는 행동들이 모여 학살이라는 결과를 낳았음을 지적했다. 무엇보다 한나 아렌트는 책임의 범주를 개인을 넘어, 그것을 방조하고 애써 무시했던 ‘시대’로 넓혔다. 아이히만은 무수히 많은 사고하지 않았던 사람 중 한 명이었고, 그의 행적을 대상으로 열린 재판은 누구든 악이 될 수 있다는 경종이었다. 

 3.1운동의 진정한 가치는 약자의 입장에서 미래세대를 위해 모든 걸 바친 것이라 정의하고 싶다. 억울하게 국권을 빼앗기고 오랜 기간 절대적 약자여야 했던 역사 때문에 우리는, 억울하게 당하고 모든 걸 잃는 삶을 안다. 그렇기에 더욱 더, 설령 악의 잣대가 나를 가리키는 역사일지라도, 모른 체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비참한 현실을 극복해봤던 용감하고 민족을 위해 모든 걸 바쳤던 DNA가 우리 몸에 내재되어 있기에, 그 용기가 다시 한 번 발현되어 현실을 직시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정립할 수 있는 지혜 또한 발휘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나아갈 100년


  3.1운동 100주년이라는 역사를 앞에 두고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는 것이 불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언가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이 ‘선택적 기억’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의의를 제대로 되새기기 위해서는 불편한 기억 또한 꺼내 볼 필요가 있다고 확신한다.  미래를 말하기 위해서는 선택적 기억을 ‘역사’의 전부인 것처럼 확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양면성을 인정하며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길 제안한다. 

 근대의 가장 커다란 발견은 ‘이성’이라고 한다. 이성을 지닌 존재, 사고하는 존재라는 점은 우리에게 당연한 명제처럼 받아들여진다. 사고하고 행동하는 힘이 인간에게는 있다. 그러나 그 이성이 오직 ‘나’만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사고하는 힘에는 늘 타인이 함께하고 있어야 함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소 불편할 수 있는 기억일지라도 그 기억마저 안고 앞으로의 100년을 맞이하는 자랑스럽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이 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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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02월15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19년02월15일 13시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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