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믿고 거르는 가계정? 디지털 사회의 다중정체성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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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11월02일 17시45분
  • 최종수정 2018년11월02일 17시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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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거르는 가계정’이라는 표현을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SNS에서는 특정 게시물에 대해 사용자들이 댓글로 논쟁을 할 때가 많은데, 가계정을 사용하여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반영하는 경우에 ‘믿고 거르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사용하는 것이다. 실제로 본인의 실명과 개인정보를 숨긴 채 가짜 계정을 통해 자극적인 발언이나 비판을 내뱉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동시에, 디지털 사회에서 공론장의 위치가 옮겨가고 있다. 과거에는 지상파 TV 방송과 같은 전통적인 미디어 매체가 공론장의 역할을 제공했다면, 오늘날엔 SNS와 같은 디지털 플랫폼에서 대부분의 여론 형성이 이뤄진다. 가계정 개설 현상은 디지털 사회 소통양식의 단면을 드러내는 셈이다.

온라인 세계의 다중정체성과 라캉의 자아 개념

과거에 정체성의 문제는 주로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다뤄졌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은 상상계, 상징계, 그리고 실재라는 개념을 통해 자아에 대하여 설명했다. 상상계인 거울단계에서, 언어를 아직 습득하지 못한 상태의 인간은 거울을 보며 자신의 자아를 확립한다. 중요한 점은, 거울에 비친 자아의 모습은 완전한 이미지인데 비해, 인간의 자아는 아직 정신적으로 미완의 상태라는 것이다. 이때 ‘오인과 착각’이 일어나며, 인간은 불완전한 자아 혹은 분열된 자아를 본인의 자아라고 믿게 된다. 따라서 인간이 형성한 자아는 착각에 의한 것이라 소외되고 분열되었다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입장이다. 자아를 형성한 인간은 언어로 대표되는 질서 체계인 ‘상징계’에서 살게 된다. 인간은 언어의 회로 안에서 태어나며, 언어를 통해 타자의 욕망을 주입하여 자신의 욕망을 구성한다. 이 때 인간은 사회적 시스템을 반영한 ‘주체’가 되며, 그 순응의 결과로 ‘진짜 나’와는 더욱 멀어지는 ‘소외’를 겪는다. 디지털 사회의 미디어 플랫폼과 SNS는 ‘상징계’의 대표라고 할 수 있으며, 디지털 사회의 인간 또한 소외를 겪는 셈이다.

가계정과 Real Me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하나의 아이디로 여러 사람인 척 행세를 하는 것이 적발되어 사람들의 실소를 자아내는 일이 종종 있다. 익명 채팅방에서 성별을 바꾸어 활동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가계정을 만드는 경우는 아주 흔하다. 제시된 사례 모두, ID로 대표되는 온라인상의 정체성을 거의 아무런 제약 없이 생성해 낼 수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 현실 세계에서 인간의 정체성은 육체를 통해 결정된다. 하나의 육체를 가진 인간은 그 육체에 연결된 단일한 정체성을 지닌다. 그러나 디지털 세계에서 인간은 육체에 속박되지 않는다. 신체성에 근거한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오늘날의 자아 형성 양상을 이른바 ‘탈육체화 현상’이라 일컫기도 한다. 디지털 세계에서 한 개인이 형성하는 여러 정체성들은 뚜렷한 경계가 없기 때문에, 물리적‧공간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뿐더러, 주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인식적 한계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 자크 라캉이 설명했던 인간의 소외와 분열은 인간이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착각과 오인’을 하고,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발생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어렵다. ‘Real Me’를 찾는 것 자체가 인생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현실세계의 인간들이 ‘단일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디지털 사회의 다중 정체성에는 그러한 한계를 극복할 만한 힘이 있다. 내면에 있던 의외의 모습을 가상세계에서의 또 다른 정체성으로 표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결국 내적 욕구의 건전한 해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분열된 속성을 지녔다. 그 속성 중 ‘가장 대외적으로 문제가 없음직한’ 정체성을 대표적으로 드러내고 살 뿐, 인간의 내면에는 다양한 욕구와 생각 그리고 감정들이 엉켜있다. 만일 그것이 긍정적이고 건전한 욕망이라면, 디지털 세계의 다중 정체성이 그것을 표출할 용기를 북돋아 줄 방법이 될 수 있다.

Second Life vs 모듈형 인간

다만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한 사람의 자아가 여러 방식으로 표현된다면, 그것은 그 각각의 자아가 불완전할 수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자신의 발언, 지향성, 주장 등이 너무나도 이질적으로 표현된다면 그것을 진정한 자아 정체성의 발현이라고 보기 어렵다. 내가 표현하는 바, 말하는 바가 모두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말임을 인식하고 그 모두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 또한 어렵다. 디지털 사회의 다중 정체성 형성에서 긍정적인 면을 강화하고 부정적인 면을 보완할 방법은 무엇일까? ‘세컨드 라이프를 사는 인간이 아닌 모듈형 인간이 되는 것’이 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세컨드 라이프는 온라인상에서 현실과 다른 또 다른 삶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세컨드 라이프’라는 개념은 사람들이 온라인 세계와 가계정 속으로 도피하게 만들 위험성을 내포한다. ‘믿고 거르는 가계정’ 또한 이러한 부작용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현실에서는 소심하지만, 인터넷에서는 악성 댓글을 달거나, 타인을 사칭하여 부적절한 게시물을 올리는 사람들을 ‘키보드 워리어’라고 비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들 사례는 다중 정체성의 건전한 발현이라고 볼 수 없다. 인터넷에서 형성한 정체성이 ‘나의 건강한 정체성들 중 하나’가 아니라 ‘나를 숨긴 채 드러내는 정체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세컨드 라이프라는 용어는 ‘두 번째’라는 이질성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본래의 정체성과 모순되거나 그것을 부정할 가능성이 있다. 다중 자아가 정신 병리학의 하나로 다뤄지는 이유도 각각의 자아들이 다른 자아들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것을 하나로 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람직한 다중 자아란 나의 여러 성향, 장점, 특징들을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들을 통해 적절한 방식으로 표현하되, 그 모두를 하나의 ‘나’라는 Identity로 끌어안을 수 있을 때 가능해진다. 
미디어 학자 레브 마노비치는 『뉴미디어의 언어』라는 책에서 ‘모듈성’이라는 개념을 설명했다. 모듈성이란 작은 불연속적 샘플의 집합이 원래의 독립성, 개별성, 정체성을 지닌 상태로 서로 합쳐지고 변화하거나 커질 수 있으며, 그와 동시에 늘 수정 가능한 상태임을 뜻한다. 레고 블록이 바로 모듈성을 설명하는 대표 사례다. ‘레고 블록’은 블록이라는 속성 하에서 그것을 어떻게 조합하고 구성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모형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디지털 사회의 바람직한 다중자아는 모듈형 인간을 통해 구현될 수 있다. 여러 가지 온라인 플랫폼들에서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있던 다양한 성향과 능력을 발휘하여 다채로운 정체성을 발현하는 사람을 이른바 ‘모듈형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모듈형 인간의 다중 정체성은 결국 ‘나’라는 사람의 여러 긍정적인 특질들로 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전통 철학이나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근대의 주체 철학은 자기동일성을 전제로 한 완전한 자아에 대한 신뢰를 토대로 발전해왔다. 하지만 디지털 사회가 도래한 현대에는 자아와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큰 변동을 겪고 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는 다중정체성을 형성하며 디지털 사회를 살고 있다. 과연 나는 세컨드 라이프를 살고 있는지, 아니면 모듈형 인간을 지향하고 있는지, 키보드를 치기 전에 유념해보아야 할 것이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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