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출산율 0.9시대, 사라지는 대한민국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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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9월14일 22시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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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산을 하면 돈을 드립니다" 

 

​ 프랑스 1.88, 미국 1.87, 중국 1.6, 일본 1.41, 대한민국 0.97. 2018년의 출산율이 집계되자 대한민국은 ‘출산쇼크’에 빠졌다. 대한민국의 일반부부가 평균적으로 한 명의 자녀를 낳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로써 한국은 지구상 유일한 출산율 0점대 국가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이 수치는 OECD 32개국 중 꼴찌라는 굴욕에도 모자라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라는 지적은 이미 익숙할 것이다. 지적에 걸맞게 정부 및 지자체는 종합적인 출산 장려책을 펼쳐왔지만 그 효과는 저조하다 못해 결과적으로 역효과를 낳았을 뿐이다. 현재 장려 정책은 출산기피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헛물을 켜고 있다. 나아가 나라의 존립을 위하여 현정책의 문제점과 출산 기피의 원인을 명백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울시 25개 자치구 중 8곳은 첫아이에게 출산장려금 10만원에서 최대 30만원까지를 지원하겠노라는 공약을 내놓았다. 둘째부터는 그 지원금을 늘려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의견이다. 출산을 장려하겠다는 정부의 의지와 출산 시 경제적 지원을 하겠다는 점은 과거와 같다. 달라진 점은 액수일 뿐이다. 공교롭게도 출산을 하면 돈을 주겠다는 정책은 그 역인 돈을 줄 테니 출산을 하라는 의도와 기묘히 상통한다. 그러나 출산을, 심지어 결혼을 기피하는 와중에 최저임금 올리듯 출산장려금도 함께 높이고 살랑살랑 지폐를 흔들며 출산을 유도하는 정책이 실효성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큰 의문이다. 

 

 ◆ 타의적 출산사회

 

 ‘수저론’과 ‘헬조선’ 담론이 소문처럼 퍼진 것은 몇 해 전의 일이다. 무한경쟁 사회의 말로가 극단적으로 드러났고 대중과 평론가는 이에 절절히 동의했다. 대한민국은 마치 지옥에 빗대어졌고 낙관이 사라진 자리를 체념이 채웠다. 한국 사회는 피로하고 탈진한 사회다. 일전 민주화 항쟁이나 외환위기 극복과 한강의 기적처럼 세대적 결속으로 정치·경제적 위기를 타개할 결속력이 느슨하다. 원자화되고 파편화된 현대의 개인은 ‘우리’가 아닌 ‘나’ 스스로의 행복을 찾는 일에 급급하다. 이런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불황 중에 선뜻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녀를 생산하는 일은, 요즘 시대를 비추어 볼 때 불가능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출산 여성에게 장려금을 지급하는 정책은 언뜻 솔깃하지만 결국 숲이 아니라 나무를 보는 정책이다. "출산을 하면 돈을 드립니다"라는 슬로건은 세계적으로도 출산을 장려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즉각적인 방법이지만 한국 사회의 경우 선행되어야 할 일은 당장 돈을 주겠다는 일이 아니라 양질의 안정된 복지와 부분적 감세 및 증세의 병행이다. 사회초년생 새내기 부부에게 자녀를 가질 시 그릴 수 있는 행복한 비전을 장기적 복지의 형태로 제공하지 않고 통장으로 돈을 넣어주겠다는 제안은 결국 돈으로 꼬드기겠다는 한계에 머무른다. 출산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다. 수십 년에 걸쳐 천문학적 비용이 소모된다. 그런 점에서 복지나 증세는 거부하며 돈 줄 테니 아이 낳으라는, 즉 출산을 통해 애국하라는 정책은 진보적이고 친절하다기보는 국가주의적이다. 여성은 출산-육아-국가성장 메커니즘의 톱니바퀴가 된다. 그런 점에서 ‘출산주도성장’이라는 단어의 선택은 대중에게 경솔하고 강압적인 인상을 준다. 

 

 그리하여 한국 사회는 타의적으로 출산한다. 불임의 원인을 은근히 여성에게 돌리고 수근덕댄다. 시부모를 시작으로 친족으로 퍼지는 일종의 '불임 스캔들'이다. 안 낳는 사람을 돌연 못 낳는 사람처럼 만들어 눈치와 면박을 준다. 그렇게 가임여부로 여성으로서의 가치를 멋대로 매겨버린다. 2세의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는 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출산을 서두르는가 하면 자녀를 양육할 경제적 여건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빚부터 지는 새내기 부부가 되어버리기 일쑤이다. 피로하고 탈진한 사회에서 자녀를 선뜻 계획하는 일은 큰 결단이다. 돈이 없어도 어쩌면 좋은 남편 혹은 아내가 될 수는 있겠지만,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좋은 부모가 될 수는 없다. 불가능하다. 가정을 꾸리는 계획에 있어 경제적 안정을 꾀함은 나무를 심어 숲을 보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정부의 근시안적 출산장려책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자녀 양육에 소모되는 정신적 에너지와 경제적 부담을 정부-가정 사이에 조금이라도 나눠가지지 않는다면 출산율의 반등은 이룰 수 없는 꿈이다.

 

 ◆ 낳고 싶을 때 낳을 권리

 

 출산으로 인한 출혈과 무기력, 염증과 우울은 결국 한국 사회의 출혈과 무기력이고 한국 사회의 염증과 우울로 돌아온다. 미흡한 복지와, 돈으로 복지의 자리를 메꾸려는 무기력한 정책은 우울한 비전을 제공한다. 안정된 출산휴가와 직무복귀가 권리로 보장받지 못하고 조직의 재량을 우선시한다. 이처럼 불안정한 고용 사회에서 미흡한 출산 관련 규율로 인한 인력의 유출은 출혈과 다를 바 없다. 환부를 꿰매지 않고 불행을 체험했던 사회를 2세에게 물려주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육아환경과 사회 분위기를 개선하지 않은 출산장려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뿐이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의 130조 어치 누수는 어디로 흘렀는지 이제는 도통 알 길이 없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는 정책이 필요하다. 보건복지부는 독립적으로 출산 장려책의 양을 늘릴 것이 아니라, 각 부처와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육아 환경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복지의 질을 향상하는 것에 집중하여야 한다. 출산 후에도 지속 가능한 행복의 로드맵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여야 한다. 낳아야 하는 사회가 아니라 낳고 싶은 사회, 나아가 낳고 싶을 때 낳을 권리가 사회에 스미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솝우화에서 말은 당나귀의 짐을 함께 나누기를 거부한다. 말에겐 짐이 그다지 무겁지 않았지만, 당나귀에게는 한없이 무거운 짐이었다. 말은 “네 짐은 네 짐이고, 내 짐은 내 짐이다”라고 일관할 뿐이었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당나귀가 죽고, 말은 당나귀의 짐까지 견디며 길을 간다. 나누면 쉬웠을 길이 이제는 한없이 멀게 느껴질 것이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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