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난민을 바라보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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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7월20일 17시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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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수용과 도덕적 허영심

 

 이상과 현실이 대립할 때, 그리고 절충 없는 둘 사이의 한 입장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은 우리에게 늘 곤욕이다. 둘 사이의 교집합이 줄고 거리가 멀어질수록 절충론이 아닌 양비론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며 마찬가지로 선택에 대한 기회비용이 증가한다. 경제적인 선택의 기준이라면 위험을 감수할만한 실익의 현실 가능성이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 여론을 들끓고 있는 제주도 예멘 난민 문제에 대해서라면 그것이 예외일 수 있다. 왜냐하면 난민 문제의 경우 경제적 입장에 앞서 도덕적 옳고 그름에 대한 입장을 명료히 선행하여야하기 때문이다.

 

 예멘 난민 문제에 대하여 인도주의적 찬성론과 배타주의적 반대론이 격렬히 대립하고 있다. 다만 그 정황은 난민을 반대하는 입장이 여론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여론 동향의 지표로 활용되고 있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예멘 난민을 추방해달라는 청원에 대하여 한 청원은 18만 명이 동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삭제되었다. 다른 한 청원에서는 답변 기준인 20만 명을 초과하여 무려 71만 명이라는 역대 최다 청원이 폭주 수준으로 급증했다. 두 입장 사이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으며 극단적 성격의 양비론으로 치닫는다. 물론 예멘 난민의 집단적 제주도 피신은 현 대한민국 세대의 모든 국민이 처음 마주하는 상황이다. 가장 좋은 해답은 예멘 난민들을 위한 인도주의적 결정의 일환으로 거주와 보호를 약속하되 제주도민의 안전과 생계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초유의 이슈가 닥친 현 상황의 여론은 편향적으로 분화되며 특히 난민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좌중을 압도하고 있다. 심지어 난민을 돕자는 찬성론에 대하여 도덕적 허영이라는 비난이 쏟아지는 실정이다.

 

 난민에 대한 수용의 입장은 도덕적 허영인가? 원색적 비난 같아 보이는 이 질문을 우리는 곰곰이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난민 문제는 우리의 집과 재산을 낯선 자와 나눌 수 있느냐의 문제인 만큼 그 사안이 중대하다. 그런 점에서 난민 수용 찬성은 낯설고 약한 자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과 배품이기에 기독교의 교리적 성격을 강하게 내비친다. 기독교가 국교로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서유럽 국가들에 비하여 한국은 그렇지가 않기에 부정적 여론이 형성되는 것은 당연하다. 나아가 난민문제로 발생한 전례들, 가령 2016 쾰른 집단 성폭행 사건을 필두로 하는 수많은 난민문제를 바라보며 느끼는 바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주도로 이주를 신청한 난민의 대다수가 성인 남성이라는 점이 불법 취업을 위한 위장 이주라는 설도 떠오르고 있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도덕적 의무와 인본적 호의 혹은 기독교적 교리를 이유로 선뜻 난민을 수용하는 일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님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민 수용 찬성론자들에 대하여 도덕적 허영심이라 말할 수는 없다. 낯선 자를 무조건적으로 도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약자를 돕는 일은 다른 모든 사항들보다 최우선시 되는 전제이다. 제주도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난민 수용을 찬성하는 일이 다소 책임 회피적이라고 굳이 부연할 수 있겠지만, 그들 앞에서 도덕을 운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안녕과 실익을 선택한 사람들이 양심과 도덕을 선택한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며 도덕적 허영이라 부르짖는 행위는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수적으로 볼 때 이는 분명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대립이다. 비도덕성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의 침대와 식탁을 낯선 자와 공유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측의 공허한 도덕성 논쟁을 종식하고 더 실리적인 접근을 취할 필요가 있다.

 

 

◆보수적 사회의 아가페 사랑

 

 한국사회는 보수적 사회다. 유교의 강령들이 이 여름의 열기처럼 대기를 꽁꽁 싸매고 있는 사회에서 위험을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낯선 자에게 철퇴를 가하면 가했지,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큼 개방적이지는 않다. 이슬람 포비아와 난민 포비아가 확산되고 세계적 극우화의 흐름이 이어가는 중 문득 대한민국이 난민을 적극 수용하는 것이 외교적으로도 다소 생뚱맞은 결정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힘들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손을 뻗지 않고 벽을 쌓아올리는 일은 우리 세대에게 경제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그리고 도덕적으로나 오히려 더 큰 손실이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펼쳐진 20세기와 그 이후로 대한민국에게 손 뻗어준 도움과 원조를 생각해볼 때 우리는 지금 등을 함부로 돌릴 수만은 없는 입장이다. 도움을 받은 전력을 빌미로 문턱을 낮출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학의 목적이 미래의 청사진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넓혀 현재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것처럼, 난민에 대한 긍정적 검토는 남이 아닌 우리 스스로를 위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예멘 난민을 향한 아가페적 사랑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들을 수용하되 오히려 더 경계하고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그들을 바라봄에 있어 아가페적인 인류애의 입장을 견지하는 일은 난민을 수용하는 국가에게도, 그리고 난민들의 훗날을 도모하는 일에도 더 큰 역풍으로 변질될 수 있다. 대책 없는 무조건적 수용과 사랑으로 인한 난민과 부차적 문젯거리의 포화는 자국 내 난민에 관한 부정적 여론에 기름을 붓는 꼴이다. 낯선 이방인을 향한 극단적 반대와 강압, 추방과 혐오의 슬로건이 걸리는 지름길이다. 그러므로 정말 절실한 난민들을 돕고 악용하는 이주자들을 차단할 강력한 난민법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이며 난민법이 위협을 사전에 차단하지 못한다면 아예 폐기해버리는 행정적 강단이 요구된다.

 

 역사를 반추해볼 때 우리 세대가 지금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무차별한 반대로 벽을 쌓는다면 어떤 반작용이 발생한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무도 선량한 도덕적 의무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이는 자국민의 생계와 안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중대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의 도덕성을 허영이라 운운하고 매도하고, 배타적으로 똘똘 뭉쳐 스스로를 지켜냈다는 어설픈 만족감에 취하는 혐오 집단이 되기보다는 최소한의 노력과 손길이 필요하다. 부끄러운 세대가 되지 않기 위해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고 약자를 돕는 일은 그런 점에서 중요하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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