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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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신분제 사회의 결혼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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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6월15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8년06월16일 18시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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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즉천一賤則賤 신분제와 대한민국

 

어머니 혹은 아버지 양가 중 한 명이라도 양인이면 나머지 한 명이 양반일지라도 그 자식은 양인이 된다는 고려와 조선 초기의 법을 일천즉천一賤則賤이라 일컫는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가 물려받은 양인 혹은 천민이라는 귀속지위는 평생 동안 지속된다. 그것은 허물처럼 벗어낼 수도 없는 일종의 족쇄다. 당대의 신분은 자식의 출발선을 늦추고, 시야를 좁히는 것 이상으로 절대적인 불문율이었다. 양인이나 천민으로 태어난 자녀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력으로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킬 방도가 없었다.

 

결혼적령기 30대 남녀를 대상으로 꼽은 이상형 투표에서는 늘 ‘좋은 환경에서 자란 긍정적인 사람’이 과반을 차지한다. 긍정적인 사람은 많지만 사회적, 경제적 좋은 환경이라는 조건까지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을 찾는 일은 쉬운 일만은 아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중요하다. 그 환경에서 습득한 교육, 지혜, 생활양식과 인품은 평생의 반려자를 택하는 것에 있어 중요한 요소가 되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매력적인 사람에 앞서 매력적이되 안정적인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학습되며, ‘안정’이란 경제적 포용감 그 자체로 매력이 되는 사회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일천즉천론에 따라 자녀의 암묵적이지만 자명히 존재하는 지위를 결정짓는 중요한 일이다. 신분제의 습성과 연좌제적 관습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사회에서 결혼이라는 제도가 전략적으로 다뤄지는 것은 슬프지만 당연한 일이다.

 

 

◆결혼은 꿈이 아니라 현실

 

성별을 막론하여 배우자의 재력과 그로인한 사회적 지위는 배우자 선택에 있어 제1의 요소로 통하고 있다.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결혼은 개인과 개인의 애정 어린 관계를 넘어 다자와 다자간 집단 사이의 결속이기 때문이다. 전략적 결혼이라는 말이 통용되는 것은 어쩌면 서글픈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 아닌 안정과 다음 세대를 위한 뚜렷한 사실이다. 돈이 없어도 어쩌면 좋은 남편은 될 수 있다. 그러나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최근 종영한 Jtbc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는 극 중 정해인(서준희役)과 손예진(서진아役)이 연애와 미래를 바라봄에 있어 부딪히는 문제를 극적이되 현실적으로 조망하였다는 호평을 얻고 있다. 극 중 손예진의 어머니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극 중 정해인 부의 여성편력과 이혼경력, 정해인 직업의 귀천과 가정이라는 울타리의 부재를 근거로 종영하는 그 순간까지 정해인과의 연애와 미래를 한사코 반대한다. 시청자의 입장으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터가 없는 이혼 자녀를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부모가 세상에 존재할리도 만무하다.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 제도이며, 그 사회·경제적 결합을 둘만의 사랑으로만은 메꿀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위 드라마는 환상을 자극하지 않고 극사실주의적인 전개로 소비자의 니즈와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경제적 조건과 가정환경이 비슷한 배우자를 찾는 것은 유행을 지나 당연한 일이다. 가령 어플 ‘스카이피플’의 경우 스카이 대학을 재학 혹은 졸업한 자들 사이의 만남을 주선한다. 어느 결혼 중매업체를 찾아가든 재력과 사회적 지위, 직업의 귀천과 인지도, 가정의 안녕, 신체조건, 종교 등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다. 내가 습득한 사회지위로 판단되는 것이 우선이지만 그 이외의 외적인 요소들, 가령 가정의 형태와 주거 환경과 같이 자력으로 어쩔 도리 없이 ‘물려받은’ 환경이 나를 규정하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일천즉천 신분제 고려 사회부터 21세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유교적 강령이나 연좌제적 습성은 뿌리 깊게 남아있다.

 

 

◆돈으로 해결하는 사랑

 

저조한 결혼율과 출산율은 또 하나의 반증이다. 경제적 능력이 엇비슷한 사람을 만나 빚을 지고 시작하는 새내기 부부에게 자식이라는 존재의 무게는 출산을 꺼리게 하는 큰 이유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는 미흡한 출산장려 정책의 탓이 아닌 수직적 사회와 불경기가 고착화된 인프라, 그리고 병적으로 가속화된 경쟁사회의 말로에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진단하는 것이 옳다. 밀림 같은 경쟁사회에 자식을 풀어놓는 일에는 대비와 책임이 필요하며 그런 의미에서 돈은 최고의 방어기제임 셈이다. 부모의 돈은 자식의 출발선을 앞당기고, 시야을 넓히며, 긍정과 자신감을 고취시킨다. 물론 예외도 존재한다. 그러나 자식농사 성공의 여부를 떠나 이는 역사적으로 통용되는 하나의 법칙처럼 보인다. 우리는 혹 속물처럼 보이는 이 법칙을 지금껏 맹신하지는 않았나. 그러나 번영과 안정을 추구하는 일은 욕망이 아닌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돈으로 하여금 해결할 수 있는 물리적 사건들과 그로 인한 소비의 환각작용은 우리에게 달콤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돈에 의한 신분의 재편은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그저 인간적인 현상이다. 토를 달고 뒷얘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애석하게도 일천즉천 신분제 사회의 결혼은 첫 째가 돈이고 둘째가 사랑이다. 돈으로 표상되는 현실을 좇는 자에게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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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18년06월16일 18시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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