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국민 법감정과 사법부의 위기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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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5월18일 17시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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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범죄 동일처벌!

 

1980년대에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있었다면, 2018년엔 ‘동일범죄 동일처벌’이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얼마 전 홍익대 회화 수업에서 남성 누드모델의 ‘몰카(몰래 찍은 사진)’가 유출됐고 범인은 여성 누드모델이었던 사건이 계기다. 몰카 범죄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이번 사건은 기존 몰카 사건과 두 가지 점이 달랐다. 2016년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몰카 범죄 피해자의 83%가 여성이다. 하지만 이번엔 가해자가 여성이고 피해자가 남성이라는 점에서 주목 받았다. 또 경찰의 대응이 유례없이 신속하고 강경했다. 2차 가해에 대한 경고는 물론 가해자가 휴대폰을 버린 한강까지 수색한다고 한다. 그러자 박탈감을 느낀 여성들이 왜 지금껏 여성이 피해자일 때는 이렇게 적극적이지 않았냐고 분통을 터뜨린 것이다. 성별 편파수사를 규탄하는 ‘동일범죄 동일처벌’ 청와대 국민청원은 현재 30만 명을 넘었다.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가 국민탄원의 장(場)이 된 이유?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엔 유독 범죄 관련 사연이 넘쳐난다. 조두순 출소 반대 청원이 있었고, 부산 여중생 폭행 사건과 인천 초등생 살해 사건을 겪으며 소년법 개정 청원도 있었다. 또 주취감경 폐지, 단역 배우 자매 자살 사건 재조사를 촉구하는 청원이 줄을 이었다. 사건은 다 다르지만 청원 내용은 같다. 더 강하게 처벌해 달라. 이쯤 되면 국민청원이 아니라 ‘국민 탄원(appeal)’이라고 이름을 바꿔야할 것 같다. 청원은 국민이 국가기관에 의견이나 희망을 개진하는 보다 넓은 의미지만, 탄원은 이미 사법제도에 상소된 사건에 대해 사법적 결정을 변경시키려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걸 말한다. 탄원은 사법기관에 해야 하는데 국민들은 엉뚱하게 행정부인 청와대를 찾는다. 더 이상 사법기관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다. 사실 유전무죄 무전유죄나 동일범죄 동일처벌은 같은 의미다. “국민은 사법기관의 공정성을 의심한다.”

 

‘국민 법감정’의 의미

 

언젠가부터 ‘법감정’이란 말이 흔해졌다. 일목요연하게 명문화된 ‘법’과 주관적인 ‘감정’은 거의 반대말처럼 보인다. 그런데 두 단어가 자연스럽게 하나의 표현이 됐다. 실제로 법감정은 법률용어도 아니고 명확한 정의도 없다. 법감정의 주체는 대개 국민이다. 맥락상 국민 법감정이란, 국민이 보기에 법이 마땅히 구현해야할 정의(正義)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국민 법감정과 법원 판결의 괴리”라는 표현도 관용구처럼 쓰인다. 법원 판결 대신 ‘법논리’가 들어가도 무방하다. 이 표현은 두 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법논리에 따라 판결하는 재판부는 이성적이지만 법을 잘 모르는 국민은 감정적이다. 또는 세상엔 두 종류의 법이 있다: 사법기관의 법과 국민의 법. 어쨌든 ‘법의 이중성’을 나름대로 납득하는 과정에서 국민 법감정이란 말이 등장한 셈이다. 결국 국민 법감정은 ‘사법기관 불신’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사법부 위기야! 

 

흔히 법(法)을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라고 한다. 하지만 법을 집행하는 경찰·검찰·법원은 국회의원과 달리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법 권력은 종종 국민을 기만하거나 법을 수단삼아 자신들을 특권화한다. 2400원을 횡령한 버스기사 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놓는 한편 수백억대를 횡령한 재벌은 솜방망이 처벌을 하는 것, 성추행 당한 검사가 언론에 나와 피해를 호소해야할 만큼 자정 능력을 상실한 검찰 조직의 모습 등이 대표적이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별장 성접대 논란은 아직도 의혹이 해소되지 못했다. 사법부 위기를 보여주는 일련의 사건들이 축적되면서 국민들은 사법기관 불신은 물론 ‘법의 잣대’마저 의심하게 됐다. 권력자가 연루된 판결이 나올 때마다 판사들의 신상정보가 공유되고, 국민 정서에 맞는 처벌을 내려 달라고 청와대 홈페이지에 청원하는 이유다.  

 

청와대 국민청원 활성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그런 식으로 사법적 문제들이 다뤄지는 걸 우려한다. 국민청원을 통한 일회적이고 산발적인 사건·사고 처리는 우리 형사사법시스템이 바로 서는 걸 방해하기 때문이다. 사법기관이 신뢰를 회복하려면, 소속 구성원의 일탈과 범죄에 누구보다 엄격해야 한다. 기실 그들은 가중 처벌돼야 마땅하다. 또 오해하지 않게끔, 국민들에게 재판 과정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 국민들로 하여금 유전무죄 무전유죄, 동일범죄 동일처벌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원칙을 요구하게 해선 안 될 것이다. 

 

국민 법감정과 사법부 법감정이 일치할 때, 나아가 ‘법감정’이란 표현을 언급할 필요가 없을 때라야 우리는 사법부 신뢰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들은 법이 정의 구현의 수단임을 잊은 지 너무 오래다. 사법 불평등 시대, 한국 사회 법치주의는 과연 안녕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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