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주 출신 청년이 돌아보는 제주 4·3사건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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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4월20일 17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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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남쪽 끝에는 침묵이 서려있다. 1948년 4월 3일이 지난 지 70년이 지났지만 침묵은 이어진다. 봄이 와도 봄을 즐길 수 없었고, 광복을 맞이해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지 못했던 제주도. 제주도 출신의 청년이 길지 않은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제주의 4·3사건의 현주소를 돌아보려 한다.

 

* 1990년생 제주 청년, 4·3사건을 바라보다.

 

 1990년, 제주도 해안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제주도에서 일어난 4·3사건’이라는 문구를 어디선가 보고는 함께 살던 할아버지에게 알고 있냐고 물어 본 기억이 있다. 1920년대 출생이었던 할아버지는 사람 좋게 웃으시며 총소리에 놀라서 동굴에서 마을 사람과 며칠 숨어있었다고만 말했다. 빤히 나를 보시다 방에 들어가시는 할아버지를 보고 단순한 사건인 줄 알았다. 4월 3일 단 하루 정도의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학창 시절 4·3사건을 전혀 듣지 못했다. 5·18 민주화 운동도 듣고,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울었던 기억도 있지만, 4·3사건은 아니었다. 제주 항일기념관도 가고, 민속자연사박물관도 갔으며, 매년 한라산도 거짓말같이 올랐지만 4·3사건은 입에도 오르지 않았다. 4·3사건은 대학교 술자리에서야 다시 들렸다. 제주도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는 어떤 선배가 4·3사건을 아냐고 물었고, 아마도 아무 소리나 하며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했던 것 같다, 술에 취해 정신없다고 답했다.  

 

 다음날 부끄러운 마음보다 제주도 출신도 아닌 선배도 아는 4·3사건을 모른다는 기묘한 질투심에 인터넷에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4·3사건은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고 관심도 크게 없었다. 하지만 4·3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6년이 넘도록 진행되었고, 당시 24만여 명이었던 인구는 17만 명으로 감소한 대학살이었다. 부끄러웠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왜 이런 참상을 모르고 컸는지 의문이 생겼다. 

 

* 제주 4·3사건, 잊어야만 했던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앞선 경우처럼 4·3사건을 잘 알고 있는 젊은 청년층은, 심지어 제주도 출신이라도, 그렇게 많지 않다. 비슷한 시기에 많은 사건이 있기도 했고, 정부가 오랫동안 4·3사건의 희생자에 대해 침묵하거나 부정해서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제주도민이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4·3사건을 잊어야만 했었던 시절이 있었다.

 

 48년은 한반도가 격동 그 자체였다. 광복을 했지만, 당시 강대국이었던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시작되면서 한반도에서 ‘대리전쟁’이 조용히 발발했다. 멀지 않아 반도는 반으로 나눠 불이 타고 피를 흘렸다. 하지만 4·3사건은 한국전쟁 중에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이에 많은 청년들은 스스로의 이념을 증명하기 위해 또는 살아남기 위해 자원입대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유신정권은 ‘반공’을 강하게 외쳤다. 자연스럽게 ‘빨갱이’의 섬이라는 낙인이 찍힌 제주도민을 곱게 보지 않았고, 제주도민은 ‘육지사람’이라며 멀리했다. 4·3사건의 희생자는 여전히 불온세력이었고, 희생자의 가족들은 군이나 공무원이 될 수 없었다. 제주도 출신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육지에 가면 사투리 대신 누구보다 표준어를 정확하게 사용했다.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주도는 침묵했다.  

 

 민주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해서야 재조명되기 시작한다. 1990년이 되어서야 진상 규명을 하겠다는 공식적인 정부의 발표가 있었다. 가장 활발하게 진상 규명에 나섰던 정부는 참여 정부였고 처음 제주도민과 4·3사건 희생자에게 사과를 한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올해, 4·3사건을 다시 한 번 문재인 대통령이 참여정부에 이어 사과를 했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다.

 

* 풍문이 되지 않기를

 

 4·3사건에는 아직 풀지 못한 매듭이 많다. 해결하기 위해 참여정부에서 두꺼운 진상 규명 보고서를 집필했었다. 아직도 4·3사건 희생자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4·3사건을 잊지 않도록 많은 사람과 단체에서 노력 중이다. 과거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4·3사건을 위해 모였다. 하지만, 1990년까지 잊어야만 살아갈 수 있었던 제주도민에게 40여 년의 침묵의 시간은 잔인했다. 희생자의 유가족을 찾기 힘들거나 사망하였으며, 4·3사건과 관련된 많은 자료는 소실되었다. 이제는 70년이다. 긴 시간 동안 대한민국은 일제의 손아귀를 벗어났고, 전쟁의 폐허 속에서 현재의 강대국이 되었지만, 4·3사건이 일어난 해에 태어난 아이는 일흔 살 노인이 되었다. 너무나도 많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 와서 진상 규명은 불가능에 가깝다.

 

 되돌리기 어렵다면 다른 방향으로 접근을 고려해볼 만하다. 진상 규명 역시 중요한 일이지만, 이제는 제주도를 뒤이어 살아가고, 살아갈 후손에게 4·3사건이 남긴 이야기를 전할 때가 아닐까. 학교에서부터 4·3사건과 관련된 유적지를 찾아가거나 배우며 토론하고, 4·3사건에 대해 알고 싶은 도민에게는 모든 정보를 볼 수 있도록 국가에서 제공하여 능동적으로 기억되는 환경을 조성하여, 슬픔으로만, 비극으로만 4·3사건이 끝나지 않아야 한다. 왜 제주도가 대한민국 어떤 지역보다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더 이상 4·3사건을 풍문으로만 듣던 청년들이 늘지 않길 바란다. 

 

 며칠 전이 4월 16일이었다. 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눈물이 맺히는 날이다. 하지만 화랑유원지에 ‘4.16생명안전공원’을 설치한다는 정부 발표에 일부 단체에서 ‘세월호 납골당’이라고 비하하며 반대한다. 안산시는 제주도의 침묵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를 위한, 무엇보다 우리 다음 세를 위한 행보를 선택하자. 제주 4·3사건을 담담하게 그렸던 영화 <지슬>의 오멸 감독은 제주의 슬픔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영화를 흑백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매년 4월 제주에는 봄이 온다, 흑백의 봄이 온다. 언제쯤 침묵이 끝나고 제주의 봄이 제 색깔을 되찾을까.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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