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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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 받아야 하는 가난, 주제넘지 않은 행복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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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4월06일 17시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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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주제에 감히 돈가스를 먹어?

 

어느 날 사회복지센터에 민원이 들어왔다. “점심 먹으러 갔다가 기분 잡쳤다. 굳이 그렇게 좋은 집에서 먹어야 할 일이냐. 둘이 와서 하나를 나눠 먹는 것도 아니고 한 메뉴씩 시켜서 먹고 있더라. 내 세금으로 낸 돈이….” 기초생활수급을 받는 아동이 식당에서 돈가스를 먹는 걸 보고 한 시민이 항의를 한 것이다. 아이가 일반 분식집보다 비싼 편인, 유명 체인점에서 기분 내며 먹는 행위가 불쾌했다고 한다. 사실은, 음식점에서 아이들에게 공짜로 돈가스를 제공한 것이었다. 식권으로는 가격이 모자라지만 아이들이 예뻐 종종 “얘들아 오늘 저녁 안 먹을래?”라고 해서 밥을 먹이곤 했다고 전했다. 해당 음식점 점주는 그게 손님이 ‘기분 나빠할 일’인지 몰랐다며 무척 놀라워했다. 

 

‘20만원짜리 패딩’을 요구한 후원 아동?

 

지난 겨울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20만원짜리 패딩 후원’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 36살 직장인이라고 밝힌 후원자는 2013년부터 아동복지전문기관을 통해 매달 5만원씩 한 여자아이를 후원해왔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이가 원하는 걸 사주고 싶어 “컴퓨터나 핸드폰 같은 거 빼고 요새 유행하는 롱패딩을 보내주려 한다”며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달라”고 했단다. 후원 아동은 주위 친구들에게 유행 브랜드를 물어 특정 제품을 골랐는데, 가격이 20만원에 이르는 점퍼였다. 이를 전달받은 후원자는 황당함과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나를 후원자가 아니라 물주로 본 것 아니냐”며 후원 아동이 피아노학원에도 다닌다는데 그다지 사정이 어렵지 않은 거 같다고 했다. 결국 후원자는 해당 아동에 대한 후원을 중단했다.

 

‘가난한 자’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

 

위의 두 논란은 ‘가난한 사람’에 갖는 정형화된 이미지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돈가스 항의를 한 시민은 “그냥 분식집에서 먹어도 똑같이 배부를 일을 굳이 좋은 곳에서 기분 내며 먹을 일이냐”고 말했다. 가난한 사람은 돈가스를 먹더라도 분식집 돈가스로 배 채우는 정도는 되고, 일식 체인점에서 기분 내며 먹는 건 안 된다는 논리다. 20만원짜리 패딩에 분노했다는 후원자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서 20만원이라는 가격을 두고 논쟁해선 안 된다. 가격이 얼마든 내가 생각하는 ‘가난의 상한선’을 감히, 넘었다는 게 핵심이다. 후원자는 후원 아동이 피아노 배우는 걸 보니 사정이 어렵지 않은 거 같다고도 했는데 가난한 사람에게 피아노는 사치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사실 후원 아동은 정부의 교육복지 지원으로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가난한 사람들은 불쌍하고 부족하고 얌전하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난에 대해 갖고 있는 1차원적 이미지다. 이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이 생존 이외의 걸 바라면 과욕이라고 비난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보는 사람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행복만 추구해야 마땅하다고 여긴다. 가난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면, 가난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편견을 갖게 된다.

 

‘가난 포르노’가 생산한 가난한 이미지들

 

가난 또는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라는 말이 있다. 국제적으로 자선 캠페인이 급증한 1980년대에 생겨난 용어다. 아프리카 기아의 실상을 알리려고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깡마른 아이의 몸, 커다란 눈망울 주위에 잔뜩 붙은 파리 떼 등의 이미지를 강조한다. 이미지가 충격적인 만큼 방송에 나가면 단번에 수억 달러를 모금할 수 있었다. 빈곤 포르노는 당장 사람들의 지갑은 열 수 있지만 실질적인 해결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하지만 고정된 가난의 이미지를 생산하고 빈곤 실태를 자극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 더 큰 문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사람들이 쪽방촌을 관광지처럼 둘러보고 사진을 찍어 개인 SNS에 올리는 것이 문제가 됐다. 가난을 구경거리로 소비한 것이다. 이런 가난 포르노 때문에 우리는 ‘가난하면 이래야 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빈부(貧富)

 

비싼 옷을 입고 큰 집에 살고 외제차를 타면 부자, 허름한 옷을 입고 다 쓰러져가는 집에 살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가난한 사람인 걸까? 빈부의 판단은 그리 간단치 않다. 특히 보이는 것만으로 단정할 수 없다. 니콜라스 베르그루엔은 ‘집 없는 억만장자’로 불린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아이폰과 정장 세 벌, 전용기, 종이백 하나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것만 갖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투자회사인 베르그루엔 홀딩스를 통해 버거킹,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 독일 유명 백화점 카슈타트 등의 주식을 보유해 실제 재산은 1조8000억에 이른다. ‘보기보다 엄청난 부자’인 셈이다. 우리는 일부러 허름한 집에 사는 현금 부자, 거지 행세하더니 실제로는 자산가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곤 한다. 이렇게 빈부는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행복상한선’ 설정을 멈춰라

 

가난을 단순화한 이미지는 무척 위험하다. 가난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가난을 증명해야 하고, 스스로 가난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타인의 가난을 함부로 평가하기 쉽다. 가난한 사람들을 영영 ‘가난한 이미지 틀’ 안에 가두게 된다. 자신이 생각하는 가난과 어긋난다며 돈가스 민원을 제기하고, 후원을 끊어버린 사람을 보며 너무, 절망적이었다. 가난한 자들을 향한 그들의 태도는 명백히 폭력이었다. 게다가 경제력 있는 어른이 사회 경제적 약자인 아이에게 가한 것이었다. ‘내가 이런 걸 먹어도 될까?’ ‘이런 걸 입고 싶어 해도 될까?’라고 자기 검열하는 상황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가난은 허락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주제넘은 행복이란 없다. ‘너희들은 이 정도까지만 행복할 수 있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 ‘행복상한선’을 두는 사회가 돼선 안 된다. 모두 부자일 수 없는 시대, 가난 혐오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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