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병든 남자들의 세상 : 군대와 사회에서 살아남기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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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3월23일 16시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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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뿌리

 

 병든 사회의 원인을 징병제라는 시스템으로 돌릴 수 있을까. 거친 비약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감싸는 우악스런 분위기의 근원을 생각해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군대라는 폐쇄적 집단으로의 이행은 대한민국 남성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군대의 체계를 사회의 체계로 옮겨와 은근히 기본값으로 설정하고, 이를 따르지 못하는 사람에게 눈치와 면박을 준다는 점이다. 그렇게 직장도 삼엄하고 뻣뻣한 공간이 된다. 우리는 그 곳에 종사하는 사람 혹은 기계가 되기 위하여 감정이나 인간성 따위를 포기하는 순간을 마주한다.

 

 군대는 근본적으론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집단이다. 따라서 군대를 위해 인간성을 소량 타협하여 거세하여도 된다는 구조는 근거 없는 폭력이다. 그런데도 이 구조를 정당화하는 군기 문화가 우리사회로 스며들어 기반을 이룬 것은 징병제로 인한 폐단의 하나다. 그리하여 한국의 모든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병이 들지만, 치유되지 못하고 사회로 나와 예의 그 은밀한 폭력을 재배치한다. 과히 강한 수직적 관료사회의 출발점이다. 막 사회로 나온 가장 순수하고 가장 정력적인 나이의 남성들이 겪는 가장 정당한 폭력과 폭력의 학습. 그것은 결국 사회 어딘가에서 재현되기로 약속이나 한 듯 온 사회로 퍼져나간다.

 

 문화예술계 및 공연계, 법조계, 문학계에서 지목되는 성추행·폭력의 가해자들이 예시가 될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문단, 연극, 영화 및 예술 등을 기반으로 하는 폐쇄적 집단의 고위직 분모이며, 보이지 않는 엄연한 계급이 존재하는 공간의 구성원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군대의 그것과의 교집합을 지닌다. 나아가 이는 남성이 여성에게 가한 성폭력이라는 이슈를 넘어 폐쇄적인 집단의 메커니즘과 빈틈을 학습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가하는 숙련된 폭력의 일환이다. 의료계 간호사들 사이의 '태움'처럼 적폐와 군식 문화가 뿌리내린 모든 공간은 성별에 관계없이 이와 궤를 함께한다. 권력·남성성의 비대와 경색은 징병제 사회인 우리나라에서 지독히도 평범하다.

 

 한편으로 사회생활의 의미망은 ‘눈치 보며’, ‘굽실거리는’,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까지 떠안는다. 덧붙여 ‘균질한’, ‘평균적인’ 외모나 행동 또는 도덕성을 주입한다. 생경한 억양과 제스처는 관심병사를 바라보듯 조명한다. 소량의 다름과 개성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오늘의 군대는 대학의 연장에 서서 학원화된다. 국방이라기보다는 사회 진출 모의고사나 이력의 적당한 한 줄이다. 군대가 군대인 점은 그 이름밖에 없다는 오명을 산다. 벌떡벌떡 일어나는 눈칫밥 교육을 제공하는 정신무장 학원이라는 점에서 한국식 기업으로선 군의 학원화를 열렬히 환영한다.

 

 군보다 사회에서 돈이나 권리는 비대해진다. 불복종과 무지는 학습된다. 잘 학습한 사람은 사회생활에 능숙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것이 칭찬이 되는 것은 그러므로 안타까운 일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슬로건이 그랬던 것처럼 현대사회의 무지는 힘이다. 자유는 예속이다. 우리는 모를수록 강해지고, 따를수록 편한 사회를 산다. 알수록, 저항할수록, 달라질수록 우리는 돈과 권력으로부터 멀어진다.

 

 

◆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우리나라에서 징병제가 존재하는 이유는 북한이라는 골칫덩어리 주적이 있다는 점 때문이다. 주적이라고 군에서 명시하는 북한은 분명 실재한다. 그러나 때론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곤 한다.

 

 철학자 보들리야르는 월남전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연일 뉴스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을 보도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체감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월남전은 내게 일어난 일인가? 현상학적인 질문이다. 월남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그 주장은 지독한 냉소와 과장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정신의 무관심과 불감을 꼬집는다. 때론 이러한 불감증이 현대의 질병이 아닌 인간 본연에게 내재한 속성임을 느끼곤 한다.

 

 한반도식으로 모방하자면 북한은 실재한다. 그러나 정말 실재하는가? 북한을 본 적은 없지만, 우리 모두 북한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다. 과다 실재화된 북한의 모습, 그것은 엄밀히 북한이 아닐 것이다.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모습으로 떠오르는 북한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과다실제다. 언론의 자극적인 보도로 북한의 이미지가 실제의 이미지보다 팽창되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그야말로 원하는 바다. 한편으론 군수산업에 대한 투자, 그리고 투자에 비례하여 빠져나가는 방산비리의 액수가 불현 듯 스쳐지나간다. 군사업의 절반가량은 과다 실재화된 북의 모습을 명분으로 내삼는다.

 

 『1984』의 디스토피아를 상상한 일이 있다. 픽션의 그 곳과 현실의 이곳이 가지는 공통점은 두 장소 모두 디스토피아적 공기를 호흡하는 장소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는 연일 라디오가 같은 소리를 내뱉는다. "우리의 군대가 주적을 물리쳤다. 우리는 강하다. 우리는 승리했다" 그러나 사실 『1984』의 군대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다. 독재자가 창조한 가상의 적은 젊은 청년들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데 이용됐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픽션의 모티브가 현실을 지반으로 한다는 점을 종종 잊곤 한다.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군 전력에 실질적으로 이바지하는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잉여 자원은 갖은 노역과 허드렛일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군대와, 군대에서 사회로 흩뿌려져나간 남성의 결속을 이어주는 매개는 그러므로 보상심리와 노예 도덕이다. 징집은 긴 시간이다. 그 시간의 손실을 메우려는 심리는 자동적인 방어 기제다. 배우는 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곳이 아니어도 배울 수 있는 것이거니와, 적정 수준의 지능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 시간동안 배운 것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숙련도는 지식이 아니고, 지식 또한 지성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 곳의 법, 몸짓, 눈치들과 파렴치가 사회의 공기로 전치되는 것을 집중하여 방지해야 한다.

 

 가령 병역의 필자와 미필자 이분은 한국에서야 대표적이다 못해 지긋하리만치 흔하다. 다녀오지 않은 자는 입을 다물라, 식의 고고한 분위기는 한심하고 때론 가엾다. 실질적으로 나라를 지키는 시간이 아닌 나를 지키는 그 시간을 오직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지탱하기란 쉽지 않다. 애국보단 고집이나 악기, 자기긍정과 자위가 애국보다 사사롭다. 병역은 의무지만 애국은 의무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젊은 청년들은 대다수 애국이 아닌 이런 것들에 의존하여 군생활을 지탱한다. 그들은 사회로 흩뿌려지고 저들끼리의 고집스런 유대를 재형성한다. 그러므로 군 시절이 의미 있었다는 말에 반기를 드는 자의 입을 막는 것은, 병역필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자기 방어이다.

 

 자격 있는 자만이 돌을 던지라는 말은 군대라는 단체의 폐쇄성을 반증한다. 귀를 닫은 집단은 밖으로부터의 위협은 지키겠지만 안으로부터는 썩고 부패한다. 이번 미투 운동의 가해자로 지목된 모든 사람들이 폐쇄적인 집단에 몸을 담고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기득권이 되어 이미 죽은 자처럼 말이 없는 세상이다.

 

 참호전의 대치는 피를 말린다. 전시지만 싸우지 않고 그저 상대를 감시하며 시간을 소모해낸다. 눈싸움처럼 응시하며 죽어간다. 이를테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마찬가지로 주적은 북한이다. 그러나 왜 전쟁은 우리의 고답적인 정신과 치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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