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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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그 후 20년, 잊힌 개인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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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7년12월15일 16시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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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그해,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30대 이상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97이라는 숫자와 IMF를 동시에 떠올릴 테다. 지금까지 ‘IMF 세대’가 명확히 규정된 바는 없지만, 통상 외환위기의 영향을 받은 세대는 크게 세 덩이로 구분된다. 한창 경제활동을 활발히 하던 가장으로서 외환위기 직격탄을 맞고 하루아침에 실직한 40~50대, 막 대학 졸업반에 들어섰던 1970년 초반생들, 그리고 실직한 가장의 자녀로 예민한 사춘기에 가정 붕괴를 겪은 당시 십대들. IMF의 부정적 영향권에 들었던 이들 중 가장 젊은 세대라 하더라도 1980년대 후반생까지만 쳐주니, 딱 1990년생인 나부터는 ‘후기 IMF 세대’라 불러야 맞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97년의 IMF는

초등학교 1학년생 눈높이에서 상상하는 어려움, 그 정도였다. 

 

내 아버지는 대기업 건설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다행히 실직의 고통은 겪지 않았다. 당시 줄줄이 도산하는 도미노 행렬에서 건설회사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회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버지가 일자리를 잃지 않은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TV만 틀면 “나라가 망한다”는데, 나는 고작 사고 싶은 학용품의 가짓수를 줄임으로써 아버지의 경제적 부담을 줄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정도였고, 어머니가 나와 동생들 돌반지를 싹싹 긁어모아 은행에 갖다 줬던 기억이 난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엔 자동차 부품 회사인 ‘만도기계’ 임직원 자녀들이 많았다. 만도기계도 어찌될지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지만 회사 이름만 바뀌고 별 일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97년 재계 12순위였던 한라그룹이 부도나면서 그룹사인 만도기계도 부도 처리됐고, 99년에 스위스 금융기업 UBS에 팔렸다고 한다. 이후 ㈜만도공조로 이름을 바꾸고 김치냉장고를 생산하는 제조업체로 변신했다. IMF를 거치며 자동차 부품을 만들던 내 친구의 아버지들은 김치냉장고로 종목을 바꾸게 됐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그들 삶에 치명적인 경제적 타격은 없었다. 

 

지하철역에 끝없이 누워 있는 노숙자들의 모습과 98년 전년 대비 자살자가 50% 증가했다는 통계는 뉴스에만 존재했다. 97년을 통과하면서도 나와 내 주변은 무사했으니, IMF는 내게 지금껏 8.15 광복이나 6.25 전쟁, 88 올림픽 같은 교과서 속 하나의 역사적 사건처럼 느껴진 것이다. 

 

97년을 정면으로 살지 않은 나,

IMF를 끄집어낸 데에는 이유가 있다.

 

2017년 11월 21일은 우리 정부가 IMF에 공식 구제 금융을 요청한 지 20년 되는 날이었다. 1997년 11월 21일 밤 10시 20분, 임창렬 당시 경제부총리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이를 발표했다. 210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받는 대신 우리나라의 경제 주권이 IMF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3년 8개월 지난 2001년 8월, 정부는 195억 달러를 상환해 비로소 IMF 관리 체제를 ‘졸업’한다. 1997년 12월 말 204억 달러에 불과했던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2017년 11월 말 3872억 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으며 이는 현재 세계 9위 규모다. 

 

올해 언론사들은 앞 다투어 ‘IMF 20년’을 회고하는 기획을 내보냈다. 한국일보는 <외환위기 20년 빛과 그림자>를, 조선일보는 <IMF 20년 해는 다시 뜬다>를 썼고, 임창렬 전 경제부총리와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의 인터뷰도 몇몇 매체에 실렸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실시한 ‘IMF 외환위기 발생 20년 대국민 인식조사’ 결과도 나왔다. 거의 모든 공적 매체가 ‘IMF’와 ‘20년’이 함께 들어간 텍스트를 쏟아내는 것을 보며, 어두웠던 과거는 완전히 끝났고 이제 IMF는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 나오는 한 설정으로 여기면 그만인 것 같았다. 

 

IMF 이후 20년을 돌아보는 건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 거시 경제 담론으로만 다루는 게 아쉽다. 언론사에서 쓴 기사들을 거의 다 읽어보았는데도 나는 여전히 97년을 ‘역사 교과서’로 배우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IMF 위기는 분명 국가적 사건이지만 그때 그 시절,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버렸던 무력한 개인들이 있다. 97년이 개개인의 삶에 미친 여파는 우리나라가 IMF 체제를 졸업한 2001년이나 IMF 20년을 회고하는 2017년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미 97년 이전과 이후로 삶이 달라져 버린 이들에게 ‘IMF 종결’이란 없는 셈이다.

 

영화 <기억의 밤>과 책 『IMF 키즈의 생애』

나는 97년을 더 생생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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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억의 밤>은 미스터리 스릴러물을 표방하지만 실은 외환위기 때 가족의 붕괴를 경험한 두 남자의 이야기다. 둘은 모두 97년에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는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가정이 붕괴되고 사회 안전망이 후속 보호를 해주지 못하면서 20년 동안 사회에서 완전히 ‘지워진 존재’로 살아왔음을 영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영화를 다 본 후 “오로지 출구 하나만 있으면 되었습니다”라는 문구가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공적 매체에서 다루지 않은, 97년 이후 잊힌 개인을 나는 그렇게나마 엿봤다.

 

책 『IMF 키즈의 생애』는 당시 10대의 나이로 공교육을 받고 있던, 현재 30대 성인으로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일곱 명을 인터뷰해 그들의 삶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IMF라는 ‘구조적 지진’이 한 사람의 생애에 남긴 흔적을 따라간다. 인터뷰이 각각이 여성으로서, 97년을 자전적 소설로 쓴 작가로서, 정치 운동가로서, 민사고-뉴욕대 출신으로서 살아낸 1997년의 의미가 책에 담겨있다. IMF가 삶의 선택의 폭을 좁히고, 삶의 태도를 결정하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는 방식마저 제한했음을 20년간 그들의 경험을 통해 보여준다. 개별 인생의 이야기에서 IMF의 의미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IMF 20년의 의미를 거시적으로 조망하는 건 충분하다.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 역시 IMF를 정책적으로 다루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다. IMF 이후 개인의 생애사적 스토리를 모두 모아 엮는다면, 97년 외환위기에 관한 생생한 ‘역사 교과서’가 될 것이다.

 

IMF를 통과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후기 IMF 세대’인 나조차 IMF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게 됐다. IMF 이후 한국 사회는 외환위기 해법으로 채택한 신자유주의적 논리에 지배 받는다. 이에 따라 우리 개개인의 삶 역시 그 전과는 다른 양상을 띤다. 물리적으로는 효율화되고 유연화 된 노동시장 구조에 따라 계약직, 파견직, 영세 자영업자,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아르바이트생들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게 됐다. 정신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불안과 고단함이 일상이 된 사회를 견디며 무한한 생존 경쟁을 내면화하게 됐다.

 

결론적으로 IMF는 회고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게 된 시대의 공기다. IMF 그 후 20년, 잊힌 개인들의 이야기를 주목해야지만 우리가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자각할 수 있다. 그래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영향 아래 있다하더라도 개인 나름대로 삶의 방향성을 설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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