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권리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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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7년11월03일 17시26분
  • 최종수정 2017년11월03일 17시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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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을 수 있겠죠. 

하지만 내 인생은 아니에요. 

촉망받던 사업가 윌은 불의의 사고로 전신 마비 환자가 된다. 루이자는 그런 윌의 6개월 임시간병인을 맡게 되고 어느덧 윌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이미 윌은 안락사를 준비하고 있던 상황.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루이자는 윌을 설득시키려 안간힘을 쓰지만, 윌은 결국 ‘죽음’을 택하며 루이자와 이별을 맞게 된다.

 

세계적 베스트셀러이자 지난해 영화로 재탄생한 ‘미 비포 유(Me Before You)’의 내용이다. ‘사랑마저 넘어선 고귀한 죽음’이라는 결말은 세계 각국에 큰 충격을 안겼고, 국내에서도 ‘존엄사’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일기도 했다.

 

국내에서 존엄사 논의를 처음 촉발한 대표적 사례는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의료진이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는 환자를 부인의 요청으로 퇴원시켰다가 결국 사망하자 대법원에서 살인방조죄로 처벌받은 사건이다. 사건이 있고 난 뒤 의료진들 사이에선 환자의 인공호흡기 제거를 꺼리는 의료관행이 생겨났다. 따라서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들도 그저 인공호흡기를 착용한 채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7년 후 ‘김 할머니 사건’이 의료계에 첫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이 사건은 당시 김 할머니의 자녀들이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 대법원에서 국내 처음으로 존엄사를 인정한 사례이다. 대법원은 당시 판결에서 “사망이 임박한 환자가 인간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에 기초해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인정되면 연명치료의 중단이 허용될 수 있다”고 밝히며 존엄사를 인정했다.

 

‘보라매병원 사건’ 이후 무려 18년간 끊임없이 지속된 존엄사 논의는 보건복지부의 ‘연명의료결정법’으로 결론을 맺게 됐다. 지난달 22일 보건복지부는 내년 2월 본격 시행될 ‘연명의료결정법’을 앞두고 시범 사업을 실행하겠다고 밝혔다. 연명의료결정법이 본격적으로 발효되면 환자는 연명 치료를 거부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연명의료’란 심폐 소생술과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의 의학적 시술을 가리킨다. 이 법은 ‘존엄사’를 보장한다는 의미에서 ‘존엄사법’, ‘웰다잉법’이라고도 불리며 본 시행 전 시범사업은 10월 23일부터 1월 15일까지 시행될 예정이다. 

 

연명의료결정법은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에게만 한정적으로 적용된다.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란 ▲회생 가능성 없는 환자 ▲치료에도 회복되지 않는 환자 ▲급속히 증상이 악화돼 사망이 임박한 환자 ▲말기 암 환자 ▲질병 및 사고로 인해 임종을 앞둔 환자를 의미한다. 연명의료 중단 결정을 원하는 환자는 사전에 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거나 의료기관에서 연명의료계획서를 제출하게 된다. 만약 환자가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가족 2명 이상의 진술과 전문의 1명의 확인을 거쳐 연명의료 결정을 내리게 된다.

 

‘웰다잉’, 존엄한 죽음을 위해

 

연명의료결정법, 즉 존엄사는 안락사와는 엄연히 다르다. 존엄사는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의학적 시술을 중단해 환자가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춘 반면 안락사는 고통 없는 삶을 위해 의도적인 죽음을 유도한다.

 

현재 안락사와 존엄사 모두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국가는 네덜란드와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위스 등이다. 미국은 일부 주에서만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지만 무려 50개 주 중 40개 주에서 이미 존엄사를 인정하고 있다. 네덜란드가 이미 2002년부터 안락사를 허용했다는 점을 미루어보았을 때 우리나라에서의 존엄사 인정은 시대의 흐름에 뒤처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김 할머니 사건으로 존엄사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된 점과 2013년 국가생명윤리심의위가 제도화를 권고한 점을 고려하면 이번 법안은 늦은 감이 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존엄사법이 국회를 통과해 시범사업을 개시한 점은 분명 의미 있는 시작이다. 이번 법안으로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고통받던 환자는 품격있는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자기결정권을 갖게 되었으며 희망 없는 환자를 지켜보아야 하던 가족들도 심리적 압박감과 막대한 치료비 부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 삶의 선택권이 주어진다는 것만으로도 이 법안은 의미 있는 사회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연명의료결정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100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좋은 삶’, ‘웰빙(well-being)’을 넘어 ‘좋은 죽음’,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웰빙’에 신체와 정신적 건강의 균형을 찾고 싶은 현대인들의 소망이 담겨 있었다면, ‘웰다잉’은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해보고 살아온 날을 아름답게 정리하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가 담겨있다. 어떻게 보면 웰다잉은 웰빙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잘 사는 것을 넘어 ‘잘 죽는 법’에 대해 생각해보며 남은 삶의 가치를 재정비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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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영국 이코노미스트 연구소가 40개국을 대상으로 한 ‘세계 죽음의 질’ 조사에서 한국은 최하위권인 32위를 차지했다. 특히, 완화의료와 치료의 질을 따지는 항목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다. 통계가 말해주듯 한국의 ‘죽음의 질’은 나쁜 편이다. 초고령화 시대, 100세 시대를 맞이하여 이러한 ‘죽음의 질’을 향상할 때가 되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하지만, 연명의료결정법으로 그 과정을 준비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만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바뀔 수 있다.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

 

존엄사 허용이 시대적 흐름인 것은 분명하지만 일각에서는 존엄사가 허용되면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할 수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또, 이번 법안이 환자의 가족 또는 의료진이 환자의 뜻과 관계없이 치료를 중단할 칼자루를 쥐여주며 ‘현대판 고려장’을 야기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존엄사 법제화에 따른 윤리적 논란과 부작용이 있는 만큼 시범사업 기간에 여러 문제점을 보완해야만 한다. 임종을 앞둔 환자가 연명의료에 거부 의사를 나타내더라도 완화의료를 제공해 생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만 한다. 현재 전국 완화의료전문기관 중 호스피스 병상은 1321개에 불과하다. 이는 전체 말기 암 환자의 10% 수준이다. 품위 있는 죽음에서 완화의료는 기본 덕목이기에 환자들이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의료 인프라를 구축해야만 할 것이다.

 

존엄사 허용에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을 택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무런 희망없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지 못한 채 병실에 누워 호흡기에만 의존한다면, 이를 인간다운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임종을 앞둔 환자가 타의로 연명장치를 착용한 채 고통에 신음한다면 이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을까.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은 웰다잉을 다룬 책 ‘있는 것은 아름답다’에 “죽음이 삶의 한쪽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동안 무심했던 것들에 감사하며 삶의 가치를 재정비하게 해준다”고 추천사를 남겼다.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연명의료결정법은 삶의 마지막을 돌아볼 진정한 용기를 줄 것이다. 법안에 대한 많은 반대를 넘어 임종을 앞둔 환자들이 가치를 지키면서 생을 마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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