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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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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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7년06월30일 17시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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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이라는 이름아래 모든 것이 정당화되던 70~80년대의 군사독재 시절, 경찰들은 길거리에서 자를 들고 다니며 머리와 치마 길이를 단속했다. 남자의 머리카락이 귀를 덮거나, 여자의 치마 길이가 무릎에서 30cm 이상 떨어질 경우 미풍양속을 해쳤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이처럼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서조차 시민들의 자유는 국가가 규정한 ‘모범 기준’에 의해 억압되었다. 군부에 의해 절대적 선으로 규정된 가치는 기준으로부터의 일탈을 허용하지 않았고, 모든 생각과 행동은 국가가 허락하는 범위 하에서만 이루어졌다. 

 

시민들은 북한과의 대결 구도에서 남한의 승리, 자본주의의 승리를 성취하기 위해 국가의 폭력에 복종해야 한다는 맹목적 믿음을 주입당했다. 군부는 냉전 질서 속에서 국가의 존속과 질서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것처럼 절대적 기준을 조작했다. 그러나 가치의 조작은 선전과 다르게 결코 숭고하지 않았다. 이 포장을 벗겨버리면 은폐된 권력자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자’의 영어 단어인 ‘ruler’의 다른 의미가 지배자, 권력자인 것처럼 군부는 가상의 ‘ruler’에 절대적 권력을 부여함으로써 이를 무자비하게 휘둘러 독재자의 사적인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민주주의를 왜곡하는 ‘위선의 일상화’

 군사 독재가 형식적으로 청산된 이후에도 ‘ruler’의 상정은 횡행했다. 정치인들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사적 의도를 은폐하고자 본인이 속한 정치 집단을 ‘공동체 유지’, ‘국민의 뜻’과 같은 절대적 선으로 탈바꿈 시켰다. 이러한 가치의 조작은 반대 세력을 억누르는데 효과적으로 작용해왔다. 

 

물론 정치는 권력 투쟁이기 때문에 개인의 사익 추구가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치학자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주요 저작인 <군주론>에서 말한바와 같이 “정치적 행위가 부득이 통상적인 윤리적 규범에서 일탈해야 하는 경우에⋯‘그럴듯한 핑계나 구실’을 제시하여 그 충격을 축소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서 욕망을 은폐하고자 행위의 명분을 국민이나 공동체에서 찾는 것은 어느 정도 옹호될 수 있다. 

 

그러나 강정인 서강대 교수는 <군주론>의 해제에서 이러한 정치인들의 ‘기만책’, ‘위선의 일상화’가 ‘민주주의를 이름뿐인 허울에 불과하게 만든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 라고 지적한다. 마키아벨리에게 정치와 권력은 국민의 삶과 국가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존재한다. 즉, 정치인의 ‘기만책’은 그가 국민을 위한 비전과 철학을 진정으로 가지고 있는 경우에 한해서만 정당화 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정치 영역에서 완전한 성인 군자를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치인이 사적 욕망을 추구할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기만책’을 포함한 모든 정치 행위는 궁극적으로 국민에게 선한 결과를 제공하기 위해 작동해야만 한다. 하지만 한국 정치에서 국가와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겉만 포장된 ‘위선의 일상화’는 독재 시절부터 이어진 냉전 이데올로기의 잔재이다. 

 

이는 정치인들의 욕망을 위해 기능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정치 영역에서 국민의 목소리를 삭제하고, 정치의 존재 의의를 왜곡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정당 간의 세력 다툼, 비판을 위한 비판, 모 아니면 도 식의 국정 운영은 항상 국가와 국민을 명분으로 정당화되지만 이는 정치인의 사익 추구를 위한 기만책에 불과하다.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대변해야 하는 본인의 의무를 망각하고, 국민이 부여한 공적 권력을 사익 추구를 위해 남용하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며 반민주적인 행태이다.

 

청문회를 빌미로 추경안 심사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일부 야당의 행태는 이러한 ‘기만책’을 잘 보여준다. 추경안은 일자리 문제 등 민생 경제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합의는 정치인으로서 막중한 책임이다. 추경안이 국회에 제출된 지 20일 이상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야당은 청문회부터 이어진 정부와의 잡음을 빌미로 심사조차 거부해왔다. 이는 문재인 정부 때리기에 몰두하며 주도권을 잡고자 노력해온 권력 다툼의 연장에 불과하다. 그러나 야당은 정치 공세의 동기를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라 정당화하며 오히려 국민을 위한 추경안을 발목 잡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야당으로서 정부에게 합리적 비판을 가하는 것은 권장해야 하지만 협치를 포기하면서 민생 경제를 볼모로 가하는 ‘비판을 위한 비판’은 정치인의 권력욕에 기인하기 때문에 ‘위선의 일상화’이자 ‘기만책’에 불과하다. 다행히 28일 국민의 당, 바른정당은 추경안 심사에 합의했지만 자유한국당은 여전히 심사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오늘은 조국 조지면서 떠드는 날’이라는 식의 문자를 주고받는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여전히 군부 독재 식의 냉전 프레임에 갇혀 절대적 ‘ruler’를 상정함으로써 민의를 왜곡한다.

 

위선의 가면을 벗겨내고, 진영논리를 극복하자

21세기의 탈냉전 시대, 한국 정치는 군부 독재의 망령을 떨쳐내야만 한다. 정치인들의 은폐된 권력욕은 이미 국민들에게 낱낱이 까발려졌으며, 성숙해진 정치 의식으로 인해 절대적 ‘ruler’는 더 이상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 ‘우리의 비판은 국가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숭고하다’는 식의 진영 논리와 기만책은 여전히 팽배하다. 

 

존 스튜어트 밀은 어떤 의견이든 오류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절대적 선을 전제하는 것은 사회를 퇴보 시킨다고 <자유론>에서 말한다. 즉, 민주주의 사회에서 본인의 가치를 무조건적으로 옳은 것이라 규정하는 절대적 ‘ruler’ 는 상호 간 대화를 막음으로써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기 때문에 철폐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 정치 내의 극단적 대결 구도는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 집단, 사람을 대화의 대상이 아닌 공격해서 이겨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본다. 따라서 절대적 ‘ruler’ 를 철폐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정치인들이 본인과 의견이 다른 상대를 정치 파트너로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치는 궁극적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내 의견을 무조건적으로 관철시키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진정으로 국가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 개방적인 태도로 논의해야 한다. 또한 그 동안 명분으로만 사용되던 ‘국민을 위한 정치’는 ‘기만책’에 불과하다. 국민들은 외양으로 드러나는 정치인의 행동을 바탕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정치인들은 공적 영역인 정치에서 사적 이익의 추구를 최소화하고 국민들에게 신뢰감을 주도록 노력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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