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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장애등급제 폐지,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한 소중한 한 걸음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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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7년04월28일 17시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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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여러 장애인 단체들은 ‘제 37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420장애인 차별철폐 투쟁결의대회’를 열었다. 많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모였던 이 날 투쟁에서 그들은 차별철폐와 장애등급제 폐지를 촉구하며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을 위해 목소리를 모았다.

 

장애등급제는 장애를 1등급부터 6등급으로 분류하여 복지 서비스에 차별화를 두는 제도를 말한다. 장애등급제는 단순 의학 기준에 의거하여 장애유형별로 판정기준을 정해 장애등급을 나눈다. 예를 들어, 2017년 기준으로 활동보조서비스를 신청할 수 있는 등급은 1~3등급 장애인이며, 교통약자이동센터는 1~2등급 등록 장애인만이 이용할 수 있다.

 

언뜻 보면 장애등급제는 한정된 예산 안에서 복지 혜택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선별적 복지’는 필요한 사람에게 더 많은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기에 때때로 타당하다고 느껴진다. 또한, 보편적 복지를 추구한다면 세금이 낭비될 수도 있다는 우려와 중증 장애인에게 더 적은 혜택이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장애인 복지에 한해서는 선별적 복지가 너무나도 당연시하게 추구되어왔다.

 

그러나 장애의 정도에 따라 차등적으로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원리는 ‘복지 사각지대’를 만든다. 의학적 기준만을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장애등급제는 장애인의 서비스 필요도, 사회, 경제적 환경을 고려하지 않는다. 장애인들이 처한 현실적인 상황을 생각하지 않기에 정부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장애인들은 ‘등급’이란 벽에 가로막혀 필요한 복지서비스를 누리지 못하게 된다. 

 

지난 2014년 4월 17일 이러한 복지 사각지대 안에서 소중한 생명이 세상을 떠났다. 송국현씨는 활동보조서비스가 필요했던 중증 장애인이었지만, ‘장애 3급’이라는 이유로 당시 2급까지만 신청 가능했던 활동보조인서비스를 받지 못했다. 수개월에 걸쳐 장애등급 재판정을 신청했지만, 그의 장애등급은 결국 조정되지 않았다. 등급심사센터는 항의하러 찾아 온 그를 문전박대하였고, 그는 쓸쓸히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3일 후 불길이 그의 집을 덮쳤고, 타인의 도움 없이 걸을 수 없었던 그는 불길을 피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장애등급제 폐지’ 움직임은 한 순간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사회가, 언론이 알아주지 않았던 때부터 장애인들은 정부를 향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는 이러한 장애인들의 외침을 외면하며, 그들을 더욱 편하게 관리하려 의학적 판단에만 의존한 장애등급제를 고집해왔다. 행정편의주의적 성격이 강한 이러한 제도로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도움이 절실한 장애인들이었다.

 

장애등급제는 비단 송국현씨 뿐만 아니라 많은 장애인들을 고통 속에 살게 하며 복지 혜택을 받고 있는 장애인들도 불안에 떨게 한다. 많은 장애인들은 장애등급 재판정 시기가 도래하여 심사대에 놓일 때 등급이 조정될까 조바심을 낸다. 이러한 제도 속에 중증 환자들은 필요한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늘 중증 등급을 유지해야한다는 역설적인 상황에 마주하게 된다.

 

복지를 누리기 위해서 자신의 신체 등급을 유지해야한다는 점과 스스로의 빈곤과 등급을 증명해야한다는 어리석은 제도는 윤리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한우 등급 매기듯 사람의 등급을 나누는 장애등급제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며 인권 유린이다. 이러한 제도는 장애인들을 ‘등급’으로 낙인찍으며 그들을 향한 편견과 선입견을 더욱 고착시킨다. 또한, 복지혜택은 누구나 누릴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등급’을 나눠 복지에 접근할 자격을 제한하는 것은 복지의 형평성에도 어긋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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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는 출범 당시 ‘장애등급제 전면 폐지’를 외쳤다. 하지만 공약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으며 장애등급제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그리고 장미대선을 바로 코앞에 둔 지금, 여러 대선후보들은 장애인의 날을 맞아 장애등급제 폐지를 포함한 다양한 공약을 약속했다. 장애인 유권자들의 표를 얻기 위해 후보들은 서로 경쟁을 하듯 ‘장애인’ 대상 공약을 쏟아내고 있지만 그들의 공약에는 진정한 장애인 복지를 위한 구체적인 비전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 

 

유력 대선후보들의 공약은 뜬 구름 잡는 단어들의 나열이라고 할 수 있다. ‘확대’, ‘지원’ 등의 두루뭉술한 단어만을 포함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떠한 방식으로 장애인 복지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인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빛 좋은 개살구’처럼 겉으로만 본다면 이보다 더 좋은 공약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속은 텅 비어있으니 이러한 실속 없는 약속을 진정한 ‘공약(公約)’이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2017대선 장애인연대’는 대선 후보들의 공약을 두고 “실천의지마저 없는 허울뿐인 공약”이라고 비판했다. 그들은 지난 대선처럼 이번 공약들 역시 “말뿐인 헛된 약속”으로 그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등급’이라는 낙인이 찍힌 장애인계층은 ‘공약’에 있어 상대적으로 소외된다. 대선 후보들은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비장애인들의 표를 얻기 위해 그들을 위한 공약만을 내세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장애인들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비장애인 유권자들을 공략하는 것이 실제 대선 승리에 있어 더 효과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애인 계층을 소홀히 하고 외면하는 행동은 절대 용납될 수 없다.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수자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외쳐도 그들의 목소리는 금세 잊히며 그들을 위한 정책은 지지부진하기 쉽다. 이러한 사회 구조 속에 힘없는 소수자들은 계속해서 상처받게 되며 ‘사회적 약자’라는 굴레 속에 갇히게 된다. 

 

물론 오랜 시간 시행되어왔던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수많은 제도가 장애등급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아무런 준비 없이 장애등급제를 폐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장애등급제는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계층을 양산하며 서열화와 등급화를 더욱 악화시키기에 궁극적으로는 폐지되어야 한다. 진정한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서 새로운 정권에서는 장애인들의 외침을 들어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정책, 비전을 마련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그들은 언제쯤 그들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까. ‘등급’으로 낙인찍힌 장애인들이 그들의 이름으로 온전히 불릴 날이 올 수 있을까. 유력 대선후보들이 ‘장애등급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운 만큼, 이번에는 꼭 공약이 지켜지는 사회가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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