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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탄핵이 남긴 기억과 과제 - 민주주의의 승리 세대의 기억으로 남다, 분열의 한국사회 어디로 가야할까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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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7년03월17일 16시36분
  • 최종수정 2017년03월18일 22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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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승리, 세대의 기억으로 남다. 

박근혜 탄핵이 시대적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을까? 

양시원 ifs POST 청년기자│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

 

2017년 3월 10일 18대 대통령 박근혜 탄핵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심판청구를 인용하였다. 탄핵 인용 당일, 거리 곳곳이 그 동안 보기 어려웠던 밝은 미소와 기쁜 흥분으로 가득 찼다. 탄핵 이후 선거 일정이 빠르게 구체화 되고 있다. 국민들은 4월 대선을 예상할 때는 벚꽃 대선으로, 앞으로 다가올 5월 대선은 장미 대선으로 대통령 선거를 부르고 있다. 선거를 꽃과 연결 시켜 부르는 국민들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탐스러운 마음에 부응하듯 탄핵 선고일 이후부터 풀린 날씨는 완연한 봄기운으로 가득 찼다.

  현직 대통령을 혁명, 암살, 탄핵으로 하야시키는 경험을 70여년 안에 모두 거친 대한민국은 현대 민주주의 정치의 실험장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명제를 증명하던 과거 혁명의 역사에서 불과 30년 만에 살상무기가 감히 등장 할 수 없을 분위기가 대한민국에 자리 잡았다. 과연 대한민국은 어떻게 비폭력 시민저항을 성공시키고 사법 심판을 통한 탄핵을 실현 시킬 수 있었을까? 또 이 역사적인 경험이 대한민국에 남긴 것은 무엇일까?

 

박근혜의 시대, 70~80년대의 그림자

  2012년 12월 20일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다. 그는 박정희의 딸이었다. 그것은 그의 어떠한 정치 경력보다도 중요한 경력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70년대로 회귀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70년대는 박정희로 대표되며 박정희에 대한 평가와 기억은 선명하게 엇갈린다.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영웅이자, 유신 헌법을 통과시킨 독재자. 70년대로의 회귀는 어떤 이에게는 성공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실패였다. 힘의 논리가 가진 매혹은 분명하다. 모든 것이 명확하고 위계질서가 잡혀있으며 단 한사람만의 의견으로도 모든 것이 간단하게 변할 수 있다. 힘 있는 자를 무너뜨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더 큰 힘이다. 무력 혁명의 시대를 이끌었던 과거의 세대에게는 그들의 세대적 경험이 각인되어 있다. 

 

주권자의 시대, 00~10년대의 촛불

  90년대 이후의 세대는 선거로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을 살아왔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며, 대통령은 단지 대리인일 뿐이라는 개념이 보편 진리인 줄 알았으나 그것 역시 또 하나의 세대적 경험일 뿐이다. 이런 시대착오는 어느 세대에나 존재할 것이다. 과거의 세대가 그러했듯 지금의 세대 역시 이 기억에 오래토록 머무르게 될 것이다. 세대의 경험은 뿌리 깊고 거대한 힘을 가진다. 그리고 이 시대의 세대적 경험은 비폭력 시민 저항과 헌법 재판소의 사법 심판에 의한 대통령 탄핵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 세대의 경험이 만들어갈 앞으로의 대한민국은 분명히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비이성과 불합리, 비리와 은폐, 정의가 사라진 사회에 대한 지독한 피로감. 특히나 세월호 사건 이후에 생긴 국가 권력에 대한 불신은 2030세대를 무기력으로 몰아넣었다. 집단 우울증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그들이 속한 정치적 상황에서 승리 해본 적이 없었던 2030세대. 그토록 불투명한 미래에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던 2030세대도 지난 3월 10일만큼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부푸는 희망을 감출 수 없는 하루였을 것이다. 

한 네티즌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이 세대한테 정말 유의미한 경험이다 4공 5공 시절 총과 탱크로 하룻밤사이에 대통령이 바뀌면 그런가보다 그래도 되나보다 했던 세대와의 지리멸렬한 싸움이었다. 광장에서 의회로 의회에서 헌법재판을 통해서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탄핵하는 경험..” (출처 트위터 @NCT_Y)

 

탄핵의 경험이 남긴 것

헌법 재판이 탄핵을 결정하기 이전에 광장에 모인 수많은 시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 2016년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었고, 의회 정치의 저력을 실험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필리버스터, 대학 행정 비리를 묵인하지 않은 이화여대 학생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공론화 시킨 기자들, 세월호를 잊지 않기 위해 애썼던 수많은 시민운동들도 있었다. 그들이 모두 광장에 모였고,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국민들은 19주간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보탰다. 

미국 덴버대학교의 정치학 교수 에리카 체노워스가 2013년 TED 강연에서 주장한 3.5%의 법칙(“인구의 3.5%가 지속적으로 모이고 움직였을 때 어떤 운동도 실패하지 않는다.”)에서 대한민국의 촛불 시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체노워스 교수의 강연 내용 중 더욱 중요한 것은 다음 대목이다. 

 

“3.5%의 문턱을 넘은 시위는 전부 비폭력 시위였다. 실제로 비폭력적인 방식만 취한 시위는 평균적인 폭력 시위에 비해 4배 이상 규모였다. …… (비폭력)시민 저항은 사람들의 각기 다른 신체적 능력과 관계없이 시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노인, 장애인, 여성, 아이들, 사실상 참여를 원하는 사람 모두를 포함한다.”

 

시민들은 비폭력 시위에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났을 것이다. 어쩌면 여태껏 외면해왔거나, 나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마주쳤다. 그리고 서로에게서 함께 싸울 수 있는 동등한 시민이라는 동료 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지 않고, 함께 했기 때문에 그들의 저항이 성공할 수 있었다. 비폭력 시민 저항은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사회를 만들어야하는 이유를 증명하였다.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불평등한 조건을 제도와 시스템으로 최대한 보완하여 모두가 행복한 인간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민주주의의 이상은 그런 식으로 조금씩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단 한순간도 국민을 위한 정부를 대표한 적이 없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헌재의 판결은 국민들이 정말 오랜만에 목격한 사회정의의 실현이었다. 국민들은 수많은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국가의 결정들을 지켜보며 오래도록 절망해왔다. 박근혜라는 한 개인에 대한 인간적인 감정을 배제한 오로지 법질서에 의한 헌재의 판결은 그것의 공정한 권위와 합리성, 엄정함으로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피청구인의 법 위배행위가 헌법질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과 파급효과가 중대하므로,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할 것입니다.”

 

부당한 권위와 권력, 사익 추구, 이기심에 의해 망가졌던 모든 시스템과 질서가 바로잡히는 순간이었다. 인간이 주관적인 감정과 판단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만들어 진 것이 성문법이며, 그로 인해 인간 사회는 문명을 이루고 다수가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헌법 수호의 이익은 결국 대한민국 모든 국민 개개인의 이익과 함께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감정보다 법이 위에 있다는 것,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목표로 하는 헌법을 기반으로 대한민국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국민들의 가슴에 다시 한 번 아로 새겨졌다. 

 

세대의 기억으로 학습된 “함께하는 정치”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비단 어느 세대만의 승리가 아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공정한 사법 판결을 원했던 모든 국민들의 가슴 속에 깊이 남을 승리의 순간이었다. 4년 전 박근혜를 지지했던, 70년대의 향수에 젖어있던 기성세대에게도 이 사건은 그 견고한 세대적 경험을 부술 만큼 큰 충격이었다. 본인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폭력적인 시스템 안에 매몰되고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들이 희생하며 만들어온 사회가 어떤 결과물을 낳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어느 세대가 승리하였고, 어느 세대가 패배하여 세대 간의 갈등이 해소된 것이 아니다. 결국 대한민국의 현대 정치사는 국민이 곧 국가인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한 과정의 일부이다. 민주주의가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은 어떤 개인, 혹은 하나의 이익집단만을 위한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모든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국가가 눈에 보이는 유형의 성질이 아닌, 파편화된 개인의 모음이라는 것이 시대의 경험으로 남는 과정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정치는 함께하는 것임을 이해하고, 정치를 하려고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함께해보려고 하는 이성적인 판단이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는 것을 함께 경험하였다. 앞으로 다가올 또 다른 시련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함께하는 정치”를 기억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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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의 한국 사회, 어디로 가야할까

김시운 ifs POST 청년기자│서강대학교 미국문화/정치외교학

 

  지난 3월 10일 박근혜는 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되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고, 일부 극우단체들은 과격한 불복 시위를 이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두 갈래로 나뉜 반응 속에서 탄핵 과정에서 생겨난 우리 사회의 분열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진지하게 논의하는 분위기는 보이지 않는다. 분열로 인한 깊은 생채기들이 자연적으로 치유되는 것은 아니므로 탄핵 인용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만능 열쇠는 아니다. 따라서 마냥 환호하는 분위기에서 벗어나 분열의 해소 방안에 대해 객관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작년 12월부터 이어진 탄핵 심판 과정은 한국 사회의 분열을 동반했다. 정규재tv와의 인터뷰 중 ‘국민 여러분께서 오붓한 분위기 속에서 즐거운 명절 보내시길 기원하겠다.’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선의’가 담긴 소망과는 다르게, 지난 설의 밥상은 탄핵 인용과 기각으로 나뉘어진 말다툼으로 귀결되었다. 부모와 자식, 친척들, 친구들 사이의 갈등은 물론 SNS, 인터넷 커뮤니티 등을 통해 드러난 촛불과 태극기 집회 사이의 갈등은 탄핵을 둘러싼 분열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분열의 양상은 우리 사회에 엄청난 피로감과 단절감을 부여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촛불과 태극기 사이의 대결구도가 왜 생겨나게 되었는지 그 문제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다. 

 

  촛불시위와 태극기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들은 ‘탄핵 인용/기각’이라는 단 하나의 의제에 대한 요구로 수렴되는 단일적인 집단이 아니다. 각 집회는 사회에 대해 각 세대가 가지고 있는 여러 분노와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다양한 이슈들이 논의되고 공론화되는 역동적인 광장의 역할로 기능했다.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전상진 서강대 교수는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는 반-촛불 시민들은 주로 60세 이상의 노인 세대라고 밝혔다. 2015년 기준 60세 이상 1인 가구의 상대적 빈곤율이 67%에 달할 정도로 노인 세대는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또한 OECD노인 자살률 1위 지표가 보여주듯이 사회로부터 배제되었다는 소외감은 이들을 지독한 우울증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들이 겪고 있는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은 그들 사이의 세대적인 공감대와 분노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응집된 분노는 태극기 집회라는 수단을 통해 거세게 표출되고 있는데, 박정희 체제에 대한 향수와 보수 정치인들의 선동이 합세하면서 폭발한 것이다.

 

  또한 촛불 집회의 적극적인 참여세력인 청년들 역시 태극기 집회의 노인 세대와 다르지 않게 사회적, 경제적 약자이다. 청년들은 과거에 비해 과열된 스펙 경쟁을 강요 받고, 유례 없는 취업난과 기형적인 사회 구조에 고통 받는다. ‘돈 많은 부모 만나는 것도 실력이다’라는 정유라의 말을 통해 입증된 헬조선을 살아가면서 국가와 정의에 대한 기본적인 희망조차 상실하게 되었다. 평소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던 청년 세대는 이번 국정농단 사태를 계기로 분노 표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사회 변혁을 향한 열망으로 촛불시위에 참여하였다. 따라서 집회 사이의 갈등을 이해할 때, 탄핵 인용/기각에 대한 극단적인 대립과 태극기 집회의 폭력적인 행태를 중점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탄핵에 대한 정치적 의사표출은 집회의 규모를 키우는 데 역할을 했을 뿐, 결국 그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근본적인 이유는 현재 한국사회가 살기 팍팍하고, 구조적으로 불평등하고 부조리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지하여야 한다. 즉, 정치적 논쟁에 매몰되지 않고 근본적인 시위 참여배경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갈등의 원인을 해결하는 첫걸음이다. 

 

  물론 헌재의 판결에 불복하며 탄핵 인용 이후에도 끊임없이 과격 시위를 이어나가는 태극기 시위의 정치적 정당성에는 심각한 결함이 존재한다. 국민이 부여한 공적 권력을 본인의 사적 이익을 위해 오용함으로써 국민의 신뢰를 저버린 대통령에게 정치적 파면인 ‘탄핵’을 요구한 촛불 집회나, 이를 법치주의의 이름아래 실행한 헌재의 행위는 민주적으로 정의롭다. 그렇기 때문에 탄핵 선고에 불복하며 사실관계를 왜곡하고 폭력적인 행태를 일삼는 태극기 집회의 부당함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태극기 집회가 민주주의 사회의 근본적 가치를 부정하는 행태를 보인다고 해서 태극기 집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그 안에 담긴 노인 세대의 분노를 무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비판할 점은 비판하되, 사회구성원들은 태극기 집회 안에 담긴 노인 세대의 불만이 민주적으로 수용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을 별개의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 즉, 사회 통합을 위해서라면 정의로움을 추구하는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근간을 전제한 채로 이 가치를 지킬 수 있는 선에서, 각 세대의 사회적 요구를 건강한 방식으로 포착해야 한다.

 

  하지만 일부 언론은 각 시위의 탄핵에 대한 요구만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면서 이들이 역동적으로 의견을 표출하는 집단이라는 것을 지워버리고 두 집단 사이의 타협만을 요구한다. 태극기 집회가 성행하기 시작하던 12월부터 보수 언론, 정치인, 지식인들은 두 집단 모두 동일하게 배타적, 공격적이며 양극단을 달리고 있기 때문에 사회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촛불집회의 탄핵 인용 요구를 태극기 집회의 탄핵 기각 요구와 단순히 양비론적으로 비교하는 이들의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태극기 집회의 정당성에 대한 비판을 묵인하여 탄핵 인용이 정치적으로 정당하다는 기본 전제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를 흔드는 것으로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성찰을 전혀 견지하고 있지 않다. 또한 이들은 촛불과 태극기 시위를 탄핵 인용/기각 만을 주장하기 위해 모인 양극단의 정치적 집단으로 설정함으로써 그 안에 담긴 세대 간의 갈등과 사회적 요구를 수용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이 양비론을 통해 주장하는 통합은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을 뭉뚱그려 안이한 우려만을 내보임으로써 역설적으로 분란을 조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태극기 집회를 사이비 집단으로 규정하고 철폐하려는 사회적 분위기 역시 지양하여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의 정의와 행복이 소수의 의견을 묵살함으로써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극우’라는 명제 아래 이미지화된 태극기 밑에는 실제로 존재하는 노인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민주주의가 왜곡되었고, 사회의 절대 다수가 정의하는 민주주의와 다르다고 해서 노인 세대가 사회 속에서 느끼고 있는 불만과 분노 표출 자체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사회 통합을 위해서라면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가치 존립을 전제로 해야 한다. 하지만 촛불 집회를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 되어야 하는 진리로 절대화하고 태극기 집회는 그 극단의 위치에 서있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오히려 통합에 해가 된다. 각자 자기가 믿고 있는 상식과 비상식의 기준으로 국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가치를 양 극단으로 나누어 국론 분열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 

 

탄핵이 인용된 지금, 우리 사회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아래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축제의 분위기에 도취되어 탄핵이 던져준 과제를 해결하는데 안이한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파면을 선고하며 이정미 재판관이 “오늘의 선고가 더 이상의 국론 분열과 혼란을 종식시키고, 화합과 치유의 길로 나아가는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라고 말한 것은 탄핵 인용이 그 자체의 목적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출발점이라는 맥락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탄핵 인용이 던져준 진정한 의미의 통합을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정의(正義)로운 사회에 대한 정의(定義)를 바로 세워야 한다.

 

  이를 전제로 탄핵을 둘러싼 분열의 원인을 곪아 있던 세대간 갈등의 표출로 이해하고, 두 집단의 세대적인 분노 표출을 사회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수용함으로써 통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탄핵심판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소모된 정치공학적인 계산이나 여러 언론들, 정치인들의 이간질로부터 벗어나 촛불과 태극기 밑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세대 간에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노인 세대와 청년 세대의 불만 모두 사회 내에서 건강한 방식으로 이해, 수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합의의 원칙 하에 서로 존중하는 문화가 필요한 것이다. 이 불만들을 제도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대선 주자들은 관련 공약을 책임감 있게 발표해야 한다. 본인의 표를 챙기기 위해 특정 집단을 대변하거나 갈등을 부추기는 행태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공적인 틀 안에서 정책적으로 이들의 불만을 소화하고, 또 사적인 영역에서는 세대 간의 대화의 장(場)을 열어야 한다.​ 탄핵 인용을 계기로 공허하지 않은, 진정한 사회 통합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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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7년03월17일 16시36분
  • 최종수정 2017년03월18일 22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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