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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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말리온 효과의 배신, "희망고문을 멈춰라."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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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7년01월27일 20시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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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말리온의 꿈

 

 *피그말리온은 키프로스의 왕이자 제사장이며 동시에 조각가이다. 그는 여신의 저주로 성적으로 문란하게 되어 버린 키프로스의 여인들을 혐오하여 상아로 그만의 여성상을 조각한다. 불행하게도 그는 본인이 만든 아름다운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다. 조각상에게 다른 여인들이 좋아할 법한 선물을 주고, 매번 집으로 돌아오면 조각상에 입맞춤을 하고……. 그러나 조각상은 살아날 수 없고 피그말리온은 깊은 슬픔에 빠진다. 그의 슬픔을 알아차린 키프로스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피그말리온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결심한다.

 

 *여느 날처럼 집으로 돌아온 피그말리온은 조각상에 키스한다. 그러나 더 이상 조각상은 차고 딱딱한 상아가 아니었다. 조각상의 입술에선 촉촉하고 따뜻한 생기가 돈다. 피그말리온은 감격하여 그녀에게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을 짓는다. 후에 둘은 아프로디테의 축복 아래 결혼하고 행복한 삶을 누린다. 피그말리온의 신화는 더할 나위 없는 해피엔딩을 맞는다. 그러나 나는 피그말리온의 신화가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직관적이지 않은, 예술과 현실에서 효용을 상실해버린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갈라테이아는 살아나지 않는다.

 

 *피그말리온은 아름다운 꿈을 꾼다. 사람이 아닌 것이 사람이 되는 꿈. 그리고 사랑하게 되는 꿈. 피그말리온의 이룰 수 없는 꿈은 미의 여신의 손길로 이뤄지고 이는 수많은 예술가와 독자를 매료하기에 충분히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는 극으로, 영화로, 우리가 잘 아는 신드롬으로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다.

 

 *피그말리온 신드롬은 신화의 그가 그랬던 것처럼 간절히 바란다면 이뤄지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다. 오늘날에 이르러 바라면 이뤄지리란 명제는 주로 타자를 향한 심리학으로 적용된다. 상대에게 바라는 기대와 관심에 따라서 상대가 그리 변하리라는 것이 피그말리온 신드롬의 가정이다. 그러나 이는 타자의 실효성을 제한 자기 충족적 예언이라고 하는 것이 올바를 법하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위 증후군은 교육 심리학에서 소비된다. 선생과 학생 사이에서 이뤄지는 최소한의 성과, 다시 말해 이뤄 질 수 있는 꿈. 이를 두고 피그말리온의 이름을 빌리는 것은 유효한가. 피그말리온은 한 순간도 이뤄질 수 있는 꿈을 꾼 적이 없다.

 

 *피그말리온 신드롬이 한낱 자충적이라는 점에 대하여는 조지 쿠커의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1964)’를 참고할 수 있다. 극 중의 음성학자 히긴스 교수는 하층 계급의 여인을 자신의 의지대로 교육시킨다면 우아하고 세련된 귀부인을 만들 수 있으리라 믿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미의 이상을 오드리 햅번이 연기하는 극 중 일라이자에게 투영하고 성공함으로써 모종의 폭력을 휘두른다. 일라이자는 귀부인의 모습과 말투를 지니게 되었으나 그녀는 귀부인이 아닐뿐더러 과거의 그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녀는 불행하다. 히긴스 교수의 허영심은 그녀를 산산조각 내버리고 만다. 히긴스는 피그말리온이 아니었고, 일라이자도 갈라테이아가 될 수 없었다. 현실의 그것은 여신의 축복 아래 행복한 끝맺음을 내릴 수 없다. 막스 베버에 의한 의지의 투영은 어떤 방식으로든 여하막론 폭력이며 그 아래에서 아름다운 것은 없다. 오늘 날의 갈라테이아는 오직 석상이다. 살아나지 않는다. 살아나서도 안 된다. 천일확률로 그녀가 살아난다. 머지않아 일라이자의 불행처럼 그녀는 산산조각 나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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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뤄질 수 없는 꿈

 

 *피그말리온을 다루는 방식은 다양한 방향으로 수많은 공간에서 변주되었다. 조지 버나드 쇼는 피그말리온의 테마로 희곡을 썼다. 조지 쿠커는 다시 버나드 쇼의 극을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로 리메이크하여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원형 서사를 포함한 위 세 가지 이야기에서 발생하는 타자성에 대한 논의는 앞서 언급한 피그말리온 신드롬과 더불어 김용석이 「피그말리온의 타자성」에서 주인공을 두고 "지독한 이기주의자이자 자기중심주의자"라고 일컫는 것을 다시금 짚고 싶다. 그의 의심은 정당하다. "상아상 처녀가 인간이 되고 싶었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는가? 최소한 그의 뜻은 물어봤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한편 진중권은 피그말리온 신화의 원형을 예술의 재창조적 모방 욕구인 미메시스에 비추어 해석한다. 그에 의하면 피그말리온 신화에 대한 변론은 예술에서 더 설득적일 수밖에 없으리라. 예술이 실제의 것 이상의 효용으로 실제적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예술의 꿈이다. 단순한 모방의 예술이 아닌 삶에 밀접하여 생동하는 미메시스. 그것은 이 신화가 아름다운 원형으로 길이 변주되는 까닭이다. 예술이 삶에 미치는 심미적 파급이 피그말리온의 이야기에서는 결코 무시되지 않는다. 그것은 비극의 삶을 희극으로 전복한다. 그렇다면 피그말리온은 오직 그러한 의미로만, 오직 현실과 멀어진 예술의 숲에서만 행복하다. 피그말리온으로 예술을 말하는 「피그말리온의 꿈」에서 그의 마지막 말을 보라. "그리하여 예술, 미메시스, 피그말리온의 꿈, 우리 시대의 마지막 구원“

 

 *가상의 실제화와 허구의 것이 진실에 다가서는 미메시스의 아름다움. 그러나 현실의 꿈은 이와 거리가 멀다. 이뤄지지 않는 것은 끝내 이뤄지지 않는다. 불가능한 꿈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은 피그말리온의 꿈을 꾸며 살아간다. 우리 사회는 어쩔 도리 없이 불행한 사회가 되어버리고 만다.

 

 *과거의 꿈을 곱씹으며 왕년 속을 헤매는 취한 자들의 꿈. 어느 고시촌에서 아무런 확신 없이 출석하는 무의지의 의지들, 습관으로 일상화 되어버린 복권이나 한탕에 대한 꿈. 그들의 꿈을 폄하할 수는 없다. 다만 멀어지는 꿈에 대한 내성은 자위가 되어버리고, 생존방식으로의 지지부진한 꿈으로 밀접해진다. 그것은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시간을 되돌리는 불효자의 꿈이고, 크게 노래 부르는 벙어리의 꿈이다. 그것은 모두에게 얼마나 쓸쓸한 일인가. 자신에겐 꿈이 있다고 부르짖은 루터 킹 목사의 꿈이 실현된 것은 그것이 인종주의를 폐하는 당연하고 상식적인 꿈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가을 이래로 한국이 꾸는 행복과 상식을 위한 꿈의 모습처럼 말이다.

 

 *피그말리온 신화가 그러듯, 작품의 말미에서 하늘이 열리고 신이 등장한다. 신은 어지러운 세상을 교통정리 하듯이 질서정연하게 정리한다. 순식간에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모두가 행복해진다. 극적으로 치솟았던 갈등과 슬픔은 초자연적 힘에 의해 순식간에 꺼져버린다. 이를 두고 고대 그리스극에서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말한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끔 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장치는 초자연적이라는 전제를 제외하면 현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수저를 잘 물었다는 자식에겐 부모가, 최씨에겐 박씨가, S사에게는 조 모 판사가 일종의 마스터키로 효력을 발휘하는 셈이다. 요컨대 세상 어딘가에는 불가능한 꿈이 손짓 한 번으로 이뤄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손에 거머쥐는 꿈을 꿀 수도 있지 않을까. 꿈은 죽지 않았다. 이렇듯 어떤 방식으로든 꿈은 살아있다. 그러나 꿈을 이뤄주는 여신은 분명 죽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히긴스 박사의 허영된 꿈을 꾸지 않는다. 사회는 충분히 지난하고 피로하다. 당연지사의 상식은 왜 꿈이 되지 않고 모두는 물질만을 꿈꾸는가. 물론 자기착취의 성과사회를 즉물적 욕구나 속물성을 꼬투리 잡아 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채플린의 말과는 반대로 그것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희극이기 때문이다. 돈으로 사람이 적정 수준 행복해질 수는 있으리라. 그렇다면 차라리 정의를 꿈꾸며 불행하라고 감히 강요할 순 없다. 그러나 원경의 사회는 다시 지난하고 피로해진다. 그것이 피그말리온의 꿈이다.

 

No alarms, No surprises

 

 *1997년 영국의 밴드 라디오헤드는 오래 기억되고 있는 세 번째 앨범 ‘OK Computer’를 발매한다. 실제로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이 앨범은 디스토피아적 소리를 풍기며 세기말 인간이 느끼는 우울과 나약함을 처연하고, 거칠게 연주한다. 모든 곡이 명곡이라 손꼽히는 명반에서 특히 열 번째 트랙 ‘No Surprises’는 밴드의 음악 중에서도 더욱 직관적으로 밴드와 앨범의 색깔을 덧칠해버린다. 노래의 뮤직비디오에서는 보컬인 톰 요크가 작은 원형 수조에서 노래를 부른다. ‘너는 피로해보여. 행복하지 않아. 멍은 절대 지워지지 않고……. 나는 담배나 태우면서 조용한 삶을 살겠어……. 불안함 없이, 무엇에도 놀라지 않고, 제발’

 

 *내가 라디오헤드의 노래를 두고 피그말리온을 생각하는 것은 헛된 꿈을 꾸지 않는 자의 해방감과 행복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톰은 언제나 그렇듯이 불행한 얼굴로 노래를 시작한다. 노래를 부르는 그의 머리 위로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 물은 턱 끝까지 차오르고 톰은 차오르는 물을 인정해버린 듯 담담히 눈을 감는다. 물은 끝까지 차오르고, 그 안에 완전히 잠긴 그는, 그러나 평온한 미소를 머금는다. 물은 다시 빠져나가고 톰의 입가에 더 뚜렷한 미소가 번진다. 밀려오는 것을 인정하고 잠겨버린 그는 어떤 영문인지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

 

 *세상을 반쯤 등진 채로 담배나 피겠다는 사람의 말이지만, 그가 내뱉는 단어가 관조적이라거나, 해탈의 경지라거나……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통 받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의 간절함이 보인다. 그의 꿈은 불안과 공포가 사라지는 꿈이다. 그는 행복으로의 꿈을 꾸는 중이다. 물에 잠겨버리는 일은, 그러므로 스스로의 행복을 위한 최악의 최선이다.

 

 *톰에게 물이 밀려오듯 우리에게도 무언의 고난들은 상시 파도처럼 부딪친다. 그리하여 삶이 행복인지 고통인지의 바다라는 은유가 쏟아진다. 이를 두고 끝없이 헤엄치거나, 가라앉아버리거나……라고들 흔히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지를 찾았다는 자의 쓸 데 없는 전언은 세상에 가득하다. 육지는 돈이 되기 때문이다. 육지는 없다. 마찬가지로 육지가 되는 꿈은 곧 꺼질 허방이 꾸는 피그말리온의 꿈이다.

 

 *피그말리온은 이룰 수 없는 꿈을 꿨지만 그것이 이뤄짐으로써 꿈의 불가능성을 변증했다. 육지는 피그말리온의 꿈이다. 일어나지 않는 일은 끝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불가능한 꿈을 꾸는 일은 불행하다. 우리는 가능한 꿈을 꾸며 최선을 다해 행복해야 한다. 그러므로 육지를 믿지 않는 자에겐 신기루도 없다. 톰은 비로소 웃는다. 피그말리온의 꿈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은 행복한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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